알고 있던 것 같다. 황정은이 이런 소설을 쓸 거라는 사실을.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 묻는다면. 묻는다면이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린 채 며칠을 이리저리 굴려봤다. 굵은 것 서너 가지로 결국 뭉쳐졌지만. 사소한 것 하나, 지금 내가 쓰고 싶은 건 모래알갱이 만하게 뭉쳐진 소똥 경단 하나.

 

 

백의 그림자은교씨와 무재씨의 대화에서 그 대화가 이뤄지는 방식의 독특함.

상대방이 했던 말의 일부 또는 전부를 그대로 사용하여 반응함으로써 말을 건넨 사람의 심리적 부담을 경감시켜 보다 정확하고 안정된 소통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기제. 라포르를 형성하는 그 첫 단계를 인물들간의 대화에 적극 활용했다는 그 사실이, 작가가 독자인 내게 착오 없이 정확하게 건네주고 싶어하는 그 무엇. 틀림없이 작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할 그 무엇에 대해, 그 무엇의 내용을 알기도 전에 이미 그 무엇에 대한 내 태도를 정하게 만든, 흐트러진 매무새를 다시 가다듬게 만든 그 선행하는 형식. 선행하는 의식(리추얼)으로 기능하는 대화.

 

두 번째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독특함.

자폐증 걸린 이들처럼. 큰 충격(아픔, 상처)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알싸한 광기의 맛.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고 나서 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 황정은의 인물들은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

 

 

작가가 무엇보다 얘기하고 싶었던 그 무엇은 폭력과 기만의 세계 구조. 자본과 개발논리에 의한 폭력과 기만의 증폭 과정 그 자체다. 독자가 그것들의 내용을 의식적으로 알아채기 전에 이미 선행하여 작동되고 있는 그 형식에 대해.

 

외부에 실재하는, 선행하는 형식으로서의 폭력과 기만. 인간 내부에 실재하는, 선행하는 형식으로서의 정신 반짝 차림(자기 보존에의 욕망).

 

그 선행하는 형식이 만들어 낸 풍경 = 목이 매어 눈물을 떨굴 것 같은 그 시점에서 끝끝내 주먹을 부르르 꽉 움켜쥐고 눈물을 삼켜내고야 마는 그 지점. 바로 그 지점으로 독자인 나를 정확히 데려다 놓는 매트릭스의 빨간 약. 그것이 황정은 소설 속 '대화(이자 선행하는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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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1-19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상하게 이번 황정은의 작품을 읽기가 망설여지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엔 패쓰하자, 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아마도 최근의 작품집이었던 [파씨의 입문]이 [백의 그림자] 보다 조금 실망스러웠기 때문이었던 것도 같아요. 그래서 실망할까 두려운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드림아웃님의 이 글을 읽으니 실망이고뭐고, 일단 읽어보자는 생각이 드네요.

목이 매어 눈물을 떨굴 것 같은 그 시점에서 끝끝내 주먹을 부르르 꽉 움켜쥐고 눈물을 삼켜내고야 마는 그 지점, 에 저도 한 번 다녀올게요.

dreamout 2013-11-19 21:35   좋아요 0 | URL
굵은 것 서너 가지. 라고 쓴 부분.. 실제 그걸 다 풀어내면 몇 페이지를 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모든 것을 주저리 주저리 다 풀어낸다면 그건, 무슨 무슨 이론대로 써낸 것에 불과할 것 같기도 했어요.

하지만 지금, 어제 쓴 이 글을 다시 읽어보니 그럼에도 무슨무슨 이론 냄새가 많이 풍기는 듯 해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부르르... 그렇게 마음이 요동치는 한 순간.에 대한 황정은의 감각은 천부적인 것 같아요. 저는 한 가지라도 제대로 제 마음을 붙잡는 포인트가 있으면, 그것만으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충분히 좋아하는지라.. 다락방님이 읽고 어떤 평을 쓰실지 궁금하기도, 조금 걱정되기도 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