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주 일요일, 라이언 맥긴리 사진전을 봤고 지난주 일요일, 영화 그래비티를 봤다. 언제부터 영화와 멀어졌나. 생각해보니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다. 바로 그 시점부터 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갤러리 방문이 시작되었고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일은 드물어졌다.

 

의식적, 무의식적 이유들이 잔뜩 붙어 있긴 하겠지만, 라이언 맥긴리 사진 전시회에서 그 이유 중 하나를 보다 확실히 느꼈다.

 

사진(또는 그림)이 벽에 걸려있고.. 다른 관람객이 내가 보고자 하는 그림 앞에 있는 경우 또는 관람객들이 서로 엉켜있어 그 사이사이를 끼어들듯 헤쳐나가야 하는 경우. 다른 관람객의 뒷통수와 그림의 일부를 함께 보는 걸 내가 은근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관람객과 관람객 사이로 발걸음을 살짝살짝 비틀어가며 지나다니는게, 마치 근사한 자작나무 사이를 산책하는 것처럼 느껴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젠가는 어떤 전시회에서 50대의 어머니와 20대의 장성한 아들이 그림 한 점 앞에서 서로의 감상을 나누던 것을 훔쳐 들었고, 언젠가는 젊은 연인들이 조르주 앙리 루오의 그리스도의 얼굴. 앞에서 진지하게 서로의 종교관과 인생관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그런 순간들이 내가 보고자 했던 그림(사진)만큼이나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미팅을 할 때처럼 차려입은 사람들, 미술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은근히 내 보이는 사람들, 형태와 색상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림, 사진, 조각들. 그들 사이사이를 기꺼운 마음으로 산책하듯 움직인다. 사람들과 그림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속에서 부유한다. 뜨듯한 온천수 속에서 부드럽게 유영하듯. 

 

영화는, 교실을 떠올리게 한다. 빅브라더(어떤 형태든)가 거대한 화면을 장악하고, 나는 어둠 속 작은 의자에 꼼짝 못하게 잡혀있다. 무조건 그의 말을 들어야만 한다. 회의실에서 두 시간 동안 줄창 떠들어대는 팀장 앞에서 스무명의 부하직원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잠자코 있을 때. 그렇게 미칠듯 무기력감을 느낄 때를 상기시킨다는 사실을. (다행히 그래비티는 이런 느낌을 주는 영화는 아니었다)

 

내 발로 움직인다는 것. 수 많은 그림들 중 마음에 드는 한 작품 앞에서 다른 99점의 작품들 앞에서 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갤러리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일은 확실히 책을 읽는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20대 연인들이 라이언 맥긴리의 누드사진을 관람했다. 내가 20대였을 때, 나는 못했을 일. 아마 선입견때문에 시도조차 못해 봤을 일. 하지만 미술관 안에는 무언가 고양된 에너지가 부드럽게 차 있었다. 그건 값싸게 매도할 그런 것도, 지나치게 숭고한 어떤 것도 아니었다. 그건 성(聖)은 아니고 속(俗)에 속한 것이었지만, 성숙한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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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6 08: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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