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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릭스 포트노이는 누구에게 이 긴 고백을 내뱉고 있나. 정신과 의사
슈필포겔에게 상담을 받는 설정이지만, 슈필포겔은 (아직)나타날 생각을 안 한다. 목소리 없이 귀만 있는 존재. 슈필포겔 역은 독자가 맡게 된다. 이 특이한 환자는 견디기 좀 힘들다. 학회지에 발표할 임상표본으로는 너무 그럴싸하기에 흥미롭게 지켜볼 수 밖에 없지만, 정신과 의사로서 소명을 느끼는 사람이더라도 이런 환자는 아마 좀 괴로울 것이다. 돈만 아니면 끊이지 않는 장광설을 내뱉는 이 미친 환자를 당장 쫓아내고 싶어할지도. 감정노동이란 게 정말 힘들다. 이 구질구질한 얘기를 경청하는 척
해줘야 한다는 게 끔찍하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흥미롭든
그렇지 않든 그러나, 의사는 환자의 말을 일단 경청해야 한다. 돈을
받지 않았는가. 이 지점이 재미있다. 독자인 나는 내 돈으로
이 소설을 구입해서 읽었다. 그런데 소설은 돈을 낸 사람을 되려 돈 받고 일해야 하는 처지로 바꿔 놓는다. 소비자(독자)-생산자(작가)의 관계를 의사(상담자, 독자)-환자(내담자, 화자)의 관계로 돌려놓는다.
뭐 이렇기만 하다면 굳이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한 페이지에서 어떤 역전이 일어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환자와 의사,
화자와 청자(독자)라는 관계가 아니라 앨릭스
포트노이와 dreamout의 관계가 된다. 단독자와 단독자. 고유명사와 고유명사의 관계로.
앨릭스의 정체성은 두 겹으로 확인된다. 먼저 엄마로 대표되는 것들. 착한 아들, 양심, 유대인, 청결, 정직, 천재 등등. 하지만 그 확인은 또한 끔찍한 것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에서 정의
내리는 심리적 증상들이 복합적으로 표출된다. 그렇지만 마지막 (타인의)목소리로 인해 이 모든 외설적 장광설은 ‘작품’이 된다. 그는 전과는 조금 다르다.
만들어진 존재에서 만드는 존재가 된다. 이러저러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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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얘기와 비속어의 남발에 대해서는 묘하다.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우스운 것은 남자로서 이 얘기가 야해? 재미있었어? 라고 묻는다면 별로. 나는 남자는 관심 없고 다른 남자의 성생활은
더군다나 관심이 없고 아무리 야한 얘기, 흥미로운 얘기라 할지라도 이렇게 줄기차게 말 많은 인간 곁에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앨릭스의 연인 메리 제인(앨릭스는
그녀를 멍키라고 부른다)은… 음…
하지만 dreamout인 ‘나’는 물론 빨려들 듯 읽었다. 앨릭스 포트노이의 이 불평, 이 장광설이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에 관한 어떤 글에서 스카즈(Skaz)라는 어휘를 배웠는데, 이는
구어체적 표현, 1인칭 서술자의 개성적인 목소리가 반영되어 즉흥적으로 얘기를 만들어 들려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서술을 말한다. 앨릭스의 개성적인 입말에 빠져들면 비속어도 크게 거슬리지 않고, 외설도 조금 눈을 가늘게 만들 뿐. 집어치우라고 화를 내기 어렵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외설적 의미의) 육즙(肉汁)보다
육성(肉聲)이 더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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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그때 읽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피어나게 한다. 열여덟이나 열아홉. 이 소설을 그때 읽었더라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좋은 쌍으로 기억에 보다 깊게 남았겠지. 친부살해
욕망과 성욕은 숨길 수 밖에 없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갈 곳 모른 채 둘둘 말리기만 했던 내
(온갖 권위주의에 대한)분노의 일부분을 대신 풀어줬다. 『포트노이의 불평』도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