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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판지로 만들어 세운 탑 옆에는 여자들이 벨벳옷감을 펼쳐놓았단다. 벨벳은
꿈이고, 벨벳은 밤이고, 벨벳은 환영 인사지. 벨벳은 창녀고, 벨벳은 사랑이야,
킹. 벨벳 위에 여자들은 반짝반짝 광을 낸 보물들을 늘어놓아. (p.150)
나이든 여인들은 얼룩과 오줌 자국이 있는 거친 벽에 레이스 달린 옷감들을 널어서 온 거리를 하얗게 만들어. 레이스는 사치고, 레이스는 외로움이고, 레이스는 기다림이야. 레이스는 손가락 꼽기이고, 레이스는 섬세함이야. 레이스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고, 레이스는 집중이고, 레이스는 유혹이야. 얼마나 자랑스럽겠니? 자기 레이스를 벽에 거는 그 여자들은 말이야. (p. 151)
잔니가 내 손을 잡아. 오토바이를 탄 경찰관 두 명이 우리를 향해
당나귀 걸음 같은 속도로 다가오지. 거리의 통로를 따라 길을 트려는 건데, 이미 통로엔 리본이 달린 가장 예쁜 옷을 챙겨 입고 나온 어린 소녀들로 가득한 거야. 리본은 활이고, 리본은 땋은 머리고, 리본은 손목이지. 리본은 당겨 푸는 거야. (p. 152)
아름답지. 곱고 섬세하고, 살풋
부끄럼이. 그러면서도 자부심이 가득 느껴지지. 이런 얘기만, 이런 문장만 얘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는 알지. 그럴 수 없다는 걸. 그렇게 되지만은 않는다는 걸.
벨벳과 레이스와 리본은 코트와 비슷하게 묶일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 도시
북쪽, M. 1000 도로 옆, 잊혀진 쓰레기 하치장. 작가는 이 곳을 코트에 비유한다. 집같이 생기지도 못한 집을 짓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곳은 추위를 막아주는 따뜻한 코트와 같은 곳. 필요한 것이지. 하지만 충분하진 않아. 가난해도 꿈은 꿔야 한다고 흔히들 말하지. 맞는 말. 그 꿈은 벨벳과 레이스와 리본이어야 할거야.
하지만 우리는 노숙인들이 그런 섬세하고 아름답고 자부심이 가득 느껴지는 기억 또는 환상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흔히들 잊지. 아니 인정하려 하지 않지. 그건 꼭 사기 같거든. 진실이라면? 그들이 그런 섬세한 꿈과 기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공포지.
전염병 환자를 피하듯 우리는 그들의 불운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어해.
비코와 비카, 킹. 그리고
쓰레기 하치장의 몇몇 주민들에 대해 읽으면서, 나는 최대한 생생하게 어떤 모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서울역 부근 지하도에서 본, 지독한 냄새 때문에 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던
재수없이 생긴 노숙자와 털이 뭉턱뭉턱 빠지고 더러운 것들이 잔뜩 묻은 말라깽이 개. 그래. 나는 그들을 드럽게, 냄새 나게,
못생기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연민을 느끼지 않으려고 한 게 아냐. 그렇게 미운 모습으로 그리지 않으면, 공포-나도 언젠가 그럴 수도 있다-가 나를 놔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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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소설일줄 뻔히 알면서 왜 읽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너무 성급한
질문이다. 그래도 그렇게 묻는다면 대답을 하긴 해야겠지.. 글쎄..
비카가 킹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하면 그나마 좀 대답이 될까.
저이는 겨자가 도움이 안 된다고 하지만 그건 잘못 생각하는 거야, 킹. 나는 저이가 틀렸다는 걸 알지. 도움이 되고 말고. 매일 아침 겨자에 담그지 않으면 손가락이 뻣뻣해. 붓기가 사라지지
않고 보기에도 끔찍하지. 한 손가락에 삼 분씩, 양손 모두
하는 데 삼십 분. 어느 쪽에 더 도움이 되는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겨자를
바르는 손가락에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겨자를 문지르는 다른 쪽 손가락에 도움이 되는지. 양쪽 다 아닐까, 아가? 열여덟
살 때 이 손이 어땠는지 상상이 가니? 야나체크의 곡을 연주하던 그 손이? 아니, 너는 상상도 못 할 거야.
(p. 40)
그래. 뻣뻣해지지 않기 위해서야. 인간이라는
거 뻣뻣해지면 그건 곧 시체잖아?
겨자를 바르는 쪽인지 문지르는 쪽인지… 양쪽 다 도움이 된다고 그렇게
믿고 바르고 문지르면, 뭐. 최소한 플라시보 효과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