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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되기-소내되기-소내하기 ㅣ 스투디움 총서 4
김진석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해변의 카프카』를 소외되기-소내되기-소내하기 라는 프레임을 이용해 다시 읽는다면 유용하지 않을까. 킨포크나 페이퍼, 어라운드 같은 잡지를 이 방식으로 고찰해 본다면?...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소외-자유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계기가 됐다.
소내하기는 낯선 내부가 확장되는 상황에서도 투정하지 않고 질질 짜지 않는 강함을 표현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능동적인 것이 수동적인 것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성이나 언어로도 극복되지 않는 수동성과 부정성이 ‘여기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극복되거나 초월되기 위해서 ‘여기 있지’ 않다. 아무리 해도 극복되지 않는 쓸쓸함과 막막함,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극복될 수 없는 중심 없음이 있다. 그 도저한 흐름과 완강한 흐름을 생각하면 오히려 쓸쓸함과 막막함이 소내하는 과정에서도 바닥에 깔려 있다. 다만 개인의 자발성과 의지를 고려할 때, 개인이나 집단은 능동성 덕택에 일어서고 그 힘으로 달려나갈 때가 있다. 위험 속에서 모든 것을 잃는 것을 무릅쓰면서도 자유를 갈망하는 때가 있다. 투정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할 때가 있다. 바람 속에서 흔들리면서도 제 길을 갈 때가 있다. 이런 순간을 지칭하기 위해 ‘소내하기’라는 능동성을 강조할 뿐이다. 소내하는 인간은 이 내부의 갈등과 혼란, 이 내부의 낯설음과 흔들림을 견디고, 더 나아가 때로는 긍정한다. (299)
아무리 안에서 길을 잃고, 아무리 초월성이 없어진 진부한 내부가 허망하더라도, 우리는 이 내부의 길 위에서 달린다. 아무리 달리고 또 달려도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을지라도, 그래서 아무리 달려도 그저 기어가는 듯해도, 우리는 이 내부의 힘으로 내부를 탐색한다. 내부의 허술함 속에서 허술함을 받아들이기, 안에서 부는 바람의 바람을 맞고 바람기를 받아들이기, 안에서 달리고 또 달리면서 기어가기, 박박 기어가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다시 바람에 실려 날려가기, 날려가다가 다시 땅으로 떨어지기, 그리고 다시 서기, 서서 달리기, 달리다 날아가기, 그러다 다시 기어가기. 포월의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소내되거나 소내한다. 소내되고 소내한다. (300)
무엇보다 저 소외 개념이 너무나 공허하고 맹목적인 투쟁을 생산하고 소비했기 때문이다. 존재의 내부에 중심이 있다고 설정하고, 또 생명이 그 자체로 내면적 방향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질서 있는 삶과 권력만이 믿을 만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믿음에 의존하는 투정과 징징거림이 아름답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끝없이 중심에서 이탈하며, 끝없이 탈을 쓰고 탈이 난다. 처음부터 그랬다. 역사에서 한동안은 중심과 질서를 찾은 듯했고, 또 언제든지 새로 무게중심을 찾을 수는 있다. 그러나 언제나 옳은, 불변하는 중심과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200~201)
우파들은 심리적으로 고독과 쓸쓸함에 사로잡히는 현대인의 정서가 소외상태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고, 좌파들은 오히려 소비와 행복에 집착하는 태도를 소외상태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여기서도 ‘기우뚱한 균형’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고독과 쓸쓸함도 긍정되어야 하지만, 개인들이 소비와 행복에 신경 쓰는 태도에도 긍정할 점들이 있다. 고독과 쓸쓸함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만 숭고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지금이 대중민주주의의 시대인 한, 보통의 대중이 불안 속에서 안정을 희구하는 태도도 무시하거나 간과할 수 없다. (203~204)
흔히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이 소외되었다고 할 때, 사람들은 매우 중요한 단순화와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다. 마치 자신이나 자기 집단은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고 순수한 평화를 원했는데, 타자가 일방적으로 불행과 모순을 강요한 듯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자. 정말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은 전혀 권력이나 폭력을 추구하지 않고 평화와 상생만을 도모했는지. 아니면 단지 현실적인 힘의 역학관계에서 밀려난 것인지. 이 둘 사이의 간격은 얼마나 큰가? (211~212)
‘소외된 약자’라는 표현 역시 사회적 진보에 크게 기여하면서도 일종의 철학적이고 휴머니즘적인 가상을 만들어냈다. 약자는 모든 면에서, 혹은 본질적으로 약자이고 따라서 철저하게 강자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가상을. 그러나 약자라고 해서 모든 면에서 언제나 약자인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인 남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가정에서 혹은 젠더 차원에서 강자인 경우가 많다. 또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남성에 비교해 약자라고 여겨지는 여성들이 실제로는 가정경제와 교육 등의 영역에서는 남성들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고 강한 지위를 누린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강자라고 모든 면에서 강자인 것도 아니며, 약자들이라고 해서 강자의 힘과 이익의 그물망 바깥에만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러 경로로 그들은 그 그물망에 입을 대고 있거나 직간접적으로 그 그물망을 엮고 있다. 이들이 다만 의식이 없거나 비겁한 약자들일까? 그렇게 부르는 것이 엘리트 좌파들의 게으른 관행이었다.(중략) 때로는 약자가 강자에 기생하고, 때로는 강자가 약자에 기생한다. (226)
노동자들은 분업화된 생산의 꽉 짜인 메커니즘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거기서 벗어나면 자신의 존재가 헐겁고도 외로운 한 조각의 살덩어리로 변하는 느낌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서로 꽉 물린 채 돌아가는 톱니바퀴들의 틈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그대로 자유를 포기할 리는 없다. 그는 꼭 끼인 채로 더욱 자유를 열망한다. 꼭 끼임과 헐거워짐의 함수관계 속에서 그는 소내된다. (368)
우리는 위에서 ‘해방(리베라시옹)’의 전략과 구별되는 ‘자유(리베르테)’의 길을 푸코의 예를 빌려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둘이 기본적으로 소외와 소내의 존재방식을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방’으로부터 구별된 ‘자유’는 단순히 소내를 소외와 구별하는 척도일 뿐 아니라, 다시 그 소내의 영역 내부에서 소내되기와 소내하기를 구별하는 이차적인 척도로 작용한다. ‘자유’가 이렇게 이중 삼중의 역할을 하는 것은 그저 우연적인 일이거나 나쁜 모호함 때문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모호성은 자유의 특이한 복합적 성격이나 작동방식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우선 자연권 이론이 말하는 천부적 권리의 하나였다. 그리고 권리로서의 자유는 다름아닌 소외의 가설이 탄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음으로 자유는 ‘경제적 인간’으로서의 개인들이 나름대로 모두 요구하는 유익함과 합리성을 보장하기 위한 핵심적인 장치였다. 그리고 그 자유 및 자유가 유발하는 위험, 그 위험을 관리하는 안전의 삼각형은 다름아닌 소내되는 인간이 움직이는 기본적인 활동의 장이었다.(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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