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소리


내가 일하는 건물에서 한 십 분 정도 빠르게 걸어가면 시립 미술관이 있고 그 옆에는 동헌이 있다. 옛날의 사또가 머물렀던 곳으로 근래에 지은 시립 미술관과 연결되어 있다. 오전 9시에 우체국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잠시 동헌에 앉았다.


봄이다. 어제까지 입었던 두꺼운 외투를 벗어던지고 나는 저지 티셔츠를 입고 벤치에 앉아서 따뜻한 햇살을 양껏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계속 폰으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동헌의 정원에 나무들이 많은데 그 안에서 새들의 소리가 들렸다. 라디오를 끄는 순간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음악처럼 들렸다. 정말이지 아름답고 좋은 소리였다. 삐육삐육, 째액째액(새소리를 이 정도로 밖에 표현하지 못하다니 빌어먹을)하는 맑고 경쾌한 소리가 내가 앉아 있는 벤치 주위에서 선물처럼 들렸다.

여기만 벗어나면 온통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이 만들어낸 소음이 가득한데 이 안에서는 새들의 소리만 존재했다. 마치 공간의 벽이 밖의 소음을 차단하고 오직 동헌의 정원 속 새들의 지저귐만 들리게 한 것 같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새들의 소리만 들었다. 도심지 속에 이런 공간이 있는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고 그 안에서 들을 수 있는 새들의 소리는 축복에 가까웠다. 새들은 보이지는 않지만 나무들 속에서 지저귀고 있었다. 그저 나의 생각에 참새들이거니 생각했는데 소리가 다 달랐다. 강아지들도 얼굴이 다 다른데 참새라고 해서 소리가 다 같을 거라고 생각한 나는 정말 바보인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나무속에 벌이 한 삼사 십 마리 정도 있다. 약간 떨어져서 보면 벌들은 정말 분주하다. 정말 잊고 있었는데 벌들이 다니는 걸 보니 봄은 봄이다. 검은 저지 때문에 햇살을 받은 등을 점점 뜨거워져 온다. 그 온기의 번짐이 나쁘지 않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코로나, 산불, 전쟁, 선거의 후유증을 앓는 사람들에게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10시가 넘어 어르신들이 하나 둘 들어오니 이상하게도 새들이 조용해졌다. 나 혼자 있었을 때는 오케스트라처럼 서라운드 돌비 시스템처럼 여기저기서 팡파르를 울리던 새들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많아져 사람들의 말소리가 늘어나니 새들의 소리는 줄어들었다. 그런 것을 보면 코로나 초기 사람들의 왕래가 사라진 곳곳에서 동물들이 활개를 치던 기사를 본 것이 떠올랐다.


이제 일어나서 가자. 당근 케이크가 있어서 그것을 좀 먹자. 그리고 새들의 소리를 기억하며 일과를 보내자. 새들도 저토록 열심히 저저 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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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3-13 2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말씀 드리면 실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레깅스를 즐겨 입으시나 봐요. 각선미가 느껴져서요ㅋㅋ
죄송함다. 3=33

교관 2022-03-14 10:31   좋아요 1 | URL
ㅋㅋㅋ 매일 조깅을 하는 바람에 매일 입고 달리다가 이럴 때 사진을 찍게 되네요. 저는 조깅을 매일 한 시간 정도 한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조깅을 한 번 해보세요 그럼 각선미가 ㅋㅋㅋ

stella.K 2022-03-14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역시 하루키 마니아다우십니다. 고려해 보겠슴다. ㅋㅋ
 

몰랐다가 가지를 생으로 먹어도 되기에 생으로 씹어 먹고 아니 이렇게 맛있었어? 했다. 어른이 되어도 아이 때보다 좋은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이렇게 가지의 맛을 알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아이 때에는 가지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어쩌다가 가지 맛을 알아버린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면 뭐든 잘하고, 뭐든 하고 싶으면 할 수 있고, 뭐든 다 알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어른이 되어 보니 어린이 때보다 더 모르고, 더 못 하고, 더 할 수 없다. 그래도 이렇게 가지의 맛을 알게 되지 않았던가.


가지의 맛을 알아가는 것, 그게 어른 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숨은 가지의 맛이 여기저기 아직 많이 숨어 있다. 어른들은 숨어 있는 그 맛을 얼마나 더 찾아내느냐 하는 것에 따라 따분한 어른의 생활이 좀 더 활력적으로 바뀌지 않을까.


가지의 맛은 어릴 때에는 알지 못한다. 이런 걸 먹느니 차라리, 하는 생각을 아이 때에는 가득하다. 물론 어릴 때부터 가지를 좋아하는 아이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아이는 보지 못했다. 아이가 가지를 좋아해서 오늘 가지 무침을 해달라고 해서 같이 밥상에 앉아서 맛있게 먹어도 좋지만 아이는 성가셔도 이런 건 맛없어, 돈가스 달란 말이야, 하는 게 더 나은 것 같다.


뭐든 기름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맛있는데 그중 으뜸은 가지 튀김이다. 나는 가지전이 전 중에서도 가장 맛있다. 중국집에서 탕수육이나 꿔바로우도 좋지만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가지 튀김이다. 바삭함을 벌리면 뜨거운 가지가 기름을 머금고 있다가 육즙을 터트리며 입 안을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맥주를 부르는 맛이다.


가지 튀김만큼은 아니지만 가지무침도 맛있다. 집에서는 중국집처럼 가지 튀김을 해 먹을 수 없다. 가지무침도 기존의 무침이 넘볼 수 없는 단단한 맛을 지니고 있다. 뜨거운 밥 위에 올려 확 말아먹으면 맛있다. 옆에는 맥주가 노래를 부르며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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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22-03-12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지 맛있죠. 저도 나이 들어서 비로소 가지가 맛있는 음식이란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교관 2022-03-13 10:45   좋아요 0 | URL
그쵸 ㅋㅋ 처음 알게 된 맛이 이렇게 좋다니요. 가지 같은 맛있는 것들을 오늘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ㅋ 좋은 주말 보내세요
 



바야흐로 봄이다.


좋은 날이다.


산책하기에 좋은 날이다.


겨울의 틈새를 활짝 벌리고 밀려 들어온 봄기운에


운동화 끈을 질끈 당긴 다음


걷다가 강을 바라보기 위해 잠시 머물고,


지난날을


그리고 그 사람을 떠올리기 좋은 날이다.


조금은


나른하고


희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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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흑과 백이 같이 있음으로 해서 시너지가 나타난다. 태극기에도 청과 홍, 붉은색과 푸른색이 맞닿아 있다. 그리고 흑과 백의 조화가 태극기를 형성한다. 태극기의 이미지는 그렇게 의식의 한 부분에 새겨진다. 금붕어들이 있는 어항 속에는 수초와 금붕어의 묘한 보색 대비가 시선의 안정을 준다. 그리하여 금붕어들의 유영을 하루 종일 쳐다봐도 질리지 않는다.


음식도 보색으로 차려 놓으면 꽤나 먹음직스럽다. 별거 없는, 그저 한낱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일 뿐이지만 고추도 같이 기름에 달달 볶아서 올려놓으면 맛있게 보인다. 기름 위에서 춤을 추듯 색이 변하고, 맵싹 한 고추에도 기름이 옷을 입어 냄새에 벌써 배가 고프다. 케첩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없어도 상관없다. 이대로 이렇게 맥주와 함께 먹으면 맛도 보색의 대비가 되어 입 안에서 팡이 팡이 요동을 친다.


겉절이는 어떠한가. 그저 고춧가루 양념에 무쳐놨을 뿐인데 이렇게도 아름답다. 색이란 이런 것이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양념 속에 식초도 있고, 고춧가루, 고추, 양파, 마늘이 있어서 먹으면 새콤하면서 매콤하며 배추의 단 맛이 올라와 달콤하기도 하다. 이래서 우리는 겉절이를 포기할 수 없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옛말이 정말 그럴싸하다.


요즘은 떡도 형형색색의 떡이 떡집에 가면 우리를 반긴다. 떡이 정말 맛있어졌다. 떡 하면 어릴 때는 시큰둥했는데 요즘은 어린이들도 떡이 좋아서 잘 먹는다. 베이커리에 밀린 떡이지만 떡집 앞에 가면 정말 맛있고 예쁜 떡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있다. 하얀 술떡도 위에 까만 깨가 몇 알 박혀 있어서 그 보색 대비가 주는 안정감이 있다.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지 뭐. 하는 사람도 있지만 플레이팅에 신경을 쓴 밥상이라면 먹는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식탁 위 보색 대비로 한 번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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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3-10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겉절이도 할 줄 아시고. 생활력이 강하시군요.
어디 가면 굶지는 않으시겠어요.ㅎㅎ

교관 2022-03-11 11:02   좋아요 1 | URL
바야흐로 겉절이가 밥상에서 빛을 발하는 계절이네요 ㅎㅎ
 

봄이란 그렇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을 뚫고 올라오니 얼마나 독기를 내뿜는가. 세상을 노랗게 물들이는데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밀어낸다. 그리하여 들판의 새싹을 새들은 함부로 먹지 않는다. 어린잎은 자신의 방어를 위해 땅 밑에서 독을 품고 올라오기 때문이다. 봄이면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보이지 않아서 보이는 것들.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들은 어두운 곳에서 봄의 침묵을 노래한다. 그 소리가 봄이 되면 나를 괴롭힌다. 봄의 침묵이 울부짖는 소리. 점점 몸을 꽉 조여 오는 소리. 그리고 피부를 뚫고 몸으로 파고드는 소리.


이번 봄에는 그 소리가 더 크고 심해졌고 너무 무서워졌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일어나지 못할 잠이 들 것 같은 기분. 그 소리는 많은 것들을 죽인다. 사람들의 오늘을 죽이고, 사람들의 내부를 죽이고, 사람들의 생각을 죽인다. 코가 간질간질거리고 눈앞이 부예지는 아, 봄이구나. 하는 날에 굉음은 많은 사람들을 죽음이라는 벽 앞에 놓이게 만들었다.


아직 봄이라고 하기에는 이르지만 봄의 기운이 이미 생활 전반에 파고든 지금, 벌써 무기력해지려고 한다. 봄이 되면 이 알 수 없는 무기력 때문에 사고가 힘들다. 특히 조깅을 할 때 무기력해지면 걷잡을 수 없다. 날이 포근하고 기온이 오르면 먼지 때문에 시야가 뿌옇게 되는 세상이 되었다. 이상하고 기묘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날 조깅을 하다 무기력해지면 그대로 서서 나무가 되는 것처럼 움직이기조차 힘들다. 몸을 움직여야지 하는 의지가 제로에 가까워진다. 그러면 그대로 서서 저 먼 곳의 강을 바라본다. 봄이란 이렇게 악독한 계절이다.


이번 봄은 세계의 사람들에게 악독한 계절이다. 그럼에도 때가 되었으니 차곡차곡 계단을 밝고 올라오듯 어김없이 오고 만다. 바야흐로 MJ의 Heal the World를 들어야 할 때다. 그것만으로 이 노래가 크게 울려 퍼지기를 바랄 수밖에. 노랫소리가 공포의 소리를 조용하게 할 수 있기를.

https://youtu.be/BWf-eARnf6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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