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만에 먹어보는 오예스인지 몰라도 뜯자마자 크기가 너무 작아서 사진을 한 번 찍었는데 뭔가 플레이팅 같아 보였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는데 외국인들이 자꾸 좋아요,를 눌러서, 이거 오예스야!라고 하고 싶었지만, 정말 하고 싶었지만 외국어를 하지 못해 꾹꾹 참았다.


접시는 방금 전까지 가자미를 담아서 먹다가 닦아내고 오예스를 올려서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음,, 하지만 그저 사진만 보는 이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오예스는 이제 한 입에 쏙 먹을 수 있었다. 정말 작아졌다. 내 입은 크지도 않지만 한 입 짜리다.


한때(라고 해봐야 군대 있을 때) 나의 최애 간식 크라운 산도(반드시 크라운 산도라고 쳐야 함. 그냥 산도라고 치면 과자가 나오지 않음)는 말할 것도 없이 축소되고 축소되어서 몇 개를 한 입에 먹을 수 있을 정도다.


그나마 초코파이가 아직 있지만 역시 크기가 작아진 것 같다. 일전에 한 번 올렸던 민초 초코파이는 훨씬 작아서 그냥 한 입에 쏙 들어간다. 초코파이, 오예스 같은 것들은 이상하게도 군대나 단체생활을 할 때 먹으면 맛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군대에서 먹는 음식 중에 기억에 많이 남는 음식은? 하고 물으면 봉지라면과 초코파이다.


초코파이 계열의 음식이 있다. 오예스, 몽쉘통통 같은 것들. 아주 맛있어서 몰래 먹다가 들켜도 어지간한 고참들은 웃으며 봐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뭔가 만들고, 그리는 재주가 있어서 고참들이 뭔가를 만들거나 하면 늘 불려 갔다. 그리고 겨울에는 모든 훈련에서 빠져서 크리스마스 카드와 연하장 만드는 병력으로 차출되어서 내내 카드 디자인만 하곤 했다. 물론 아주 피곤하지만 근무도 없고 무엇보다 단체기합이나 폭력에서 열외였기 때문에 좋았다.


그런데 한 고참이 자신이 나무를 깎아서 비행기를 만드는데 나를 불렀는데 나는 더 고참이 불러서 더 고참과 함께 무엇인가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잖아. 열이 받은 고참은 내가 새벽 근무를 하고 있을 때 나에게 왔다. 그날 아침이 첫 외박을 나가는 날이었는데 첫 외박 축하한다며 몽쉘통통 두 통을 들고 와서 그 자리에서 다 먹게 했다. 워낙 악명이 높은 고참이라(이 번 신병 드라마에서 강찬석 상병을 생각하면 된다) 그 자리에서 다 먹어야 했다.


몽쉘통통 한 통에 16개가 들어있다. 두 통이면 32개. 몽쉘통통이란 게 말이다 하나를 먹으면 너무 맛있거든. 입 안에서 살살 녹는 촤컬릿과 형용할 수 없는 부드러움의 조화. 정말 맛있다. 그래서 하나를 더 찾게 되지. 두 개를 먹으면 아 이런 맛에 살맛이 난다니까.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나를 더 먹어. 세 개를 먹으면 약간 정신이 들지. 단맛이 가득해서 뇌를 자극하여 엔도르핀이 너무 뿜어져 나온다.


망설이다가 하나를 더 먹게 되면 이제 그만, 하는 신호가 온다. 그런 신호가 온다. 혀도 그걸 감지한다. 달달한데 그 달달함이 거북하게 치고 올라온다. 그래서 몽쉘통통은 다음에,를 기약한다. 그런데 이걸 앉아서, 꼭 앉아서 먹게 했다. 쪼그리고 앉아서. 왜 그러냐 하면 위가 짓눌러있기 때문에 소화가 더 안 된다는 걸 그 고참은 알고 있다. 내가 미웠던 그 고참은 새벽에 잠도 자지 않고 몽쉘통통 두 통, 32개를 나에게 먹였다.


나는 그걸 먹고 오전 식사는 고사하고 화장실에서 계속 오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외박을 나와서도 멍하게 보냈다. 그런 기억이 있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오예스인지는 몰라도 맛있었다. 크기가 작아진 건, 양이 적다는 건 적당히 먹어라, 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방향으로 보면, 소주가 도수가 아주 낮아졌다. 만취하지 말고 그저 즐기면서 술을 마시자는 의도라고는 하지만 소주의 열렬한 애용자는 20대 대학생들인데 그들이 한 병으로는 너무 말짱하니까 몇 병을 마시게 된다. 이게 선인지 악인지 구분이 안 간다. 회사에서 봤을 때에도, 소비자에서 봤을 때에도 선과 악의 구분이 너무 모호하다.


그래서, 오예스 주제에 맛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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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은 바닷가에 인접해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부러운 눈빛을 띱니다. 바닷가에 집을 짓고 산다는 것은 어떤 면으로 보면 참 낭만적인 색채를 띠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면으로 본다면 태풍이 몰아치면 생존에 위협을 받기에 어른들은 늘 긴장을 하며 지냅니다.


 태풍은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반드시 오니까요. 어떤 해는 일 년에 두, 세 번 온 경우도 있었습니다. 전 바닷가에 살면서 매년 태풍을 보아왔습니다. 태풍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태풍이 오면 그 태풍이 그 태풍이려니 하겠지만 태풍은 우리 사람들처럼 전부 제각각입니다.


 모두 다른 모습을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강우량을 많이 동반하는 태풍이 있는가 하면 바람을 많이 지니는 태풍이 있고 파도를 크게 일으키는 태풍이 있는가 하면 바다는 고요하게 두고 지형에 영향을 줘버리는 태풍도 있습니다.


 바다는 집에서 30미터만 가면 바로 바닷가이니 우리 집은 바다에서 꽤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고 보면 됩니다. 태풍이 바다를 변이 시키는 모습을 매 년 보는 겁니다. 태풍은 전조가 있습니다.


 하늘이 온통 잿빛으로 변하고 고요해지며 구름의 형상이 변하기 시작하며 전운이 감돕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하늘이라고 불리는 것이 마치 사랑에 실패하여 열병을 심하게 앓는 미술가가 그려놓은 하늘처럼 보입니다. 우울하고 절망과 멸망의 감정이 가득 실린 고요한 하늘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매 년 보다 보면 그런 것은 항시 느끼게 됩니다. 태풍이 다녀가면 바닷가는 쓰레기로 가득 찹니다. 표류물이 바다 위에 떠다니다 보면 대부분 쓰레기가 됩니다. 어떤 영화에서는 태풍이 몰고 간 후에 바닷가가 아주 깨끗하게 보이던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태풍이 지나가고 그다음 날이나 바로 그날에 태양이 다시 나타나도 바다는 아주 더러운 흙색을 띄고 바닷가는 어디서 몰고 온 것인지 모를 쓰레기로 가득 찹니다. 아이였던 시절에는 파도를 타고 태풍이 몰고 온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일이 신났습니다.


 어이없지만 작은 냉장고도 있었고 개 집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자 속옷도 세트로 있었고 태풍으로 인해 깨져버린 유리파편이나 고기를 잡는 그물의 일부가 미역과 함께 같이 뒤섞여 딸려 온 적도 있었습니다. 미역과 뒤섞인 그물은 마치 거인 유령의 머리카락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자동차의 백미러로 보이는 거울도 있고, 큰 소나무 가지가 꺾여 해안에 밀려온 것도 있었습니다. 해안 근처에 등대가 있습니다. 등대공원이 전부 소나무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마도 태풍이 몰아치면서 힘없는 소나무 가지가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태풍이 닥쳐오면 이런 모습을 매년 한 번씩은 꼭 보게 됩니다. 더불어 바다에 인접해 살고 있는 사람들은 태풍이 오면 바짝 긴장을 하고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아이들은 현실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태풍이 오면 그저 재미있는 일이 하나 더 생긴다고 느낍니다.


 아시겠지만 태풍이 몰아치면 그 소리가 아주 큽니다. 무섭게 몰아치는 거대한 소용돌이의 소리입니다. 태풍이 오면 태풍으로 인해 간접 피해가 더 큽니다. 도로 위의 간판이나 현수막 같은 것들이 태풍이 만들어낸 몇 헥토파스칼에 의해서 공중으로 떠서 날아다니며 유리창을 깨버린다던가 사람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습니다.


 태풍 자체의 소리보다 태풍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터뷸런스나 잔류가 자아내는 소리가 더 굉장합니다. 그것은 두려움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태풍 본연의 소리도 엄청납니다. 대공포의 소리 같습니다. 지축을 울린다는 말이 통용되는 소리를 태풍은 냅니다. 그런데 저에게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태풍 본질이 내는 소리에 전 어느 날부터 그만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미취학 아동에서 탈피를 했을 때 내가 태풍의 소리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태풍이 휘몰아쳐오며 만들어내는 신음과 굉음, 그 거대하게 쥐어짜는 소리를 언젠가부터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멀리 떨어진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 드디어 그 소리를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러지 말아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태풍이라는 것은 아직 인간의 힘으로 제어가 불가능한 천재지변입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강하게 끓어오르는 욕망 같은 그 힘을 제 자신도 제어가 불가능했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운이 없었는지 그날은 저 혼자 집에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집에 없었습니다. 엄마는 저에게 태풍이 오니 문을 잠그고 다른 날처럼 꼼짝 말고 집에 있으라고 했습니다. 전 그러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전 정말 고무되어 있었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바닷가에 태풍이 오기 전이면 바다가 호수처럼 고요해집니다. 바닷물이 싹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어느새 바다가 다시 고요하게 해안에 들어찹니다. 자세하게 보고 있지 않으면 바다가 만들어내는 그 신기한 그림을 놓치게 됩니다. 전 그러지 말아야 했지만 문을 열고 바다에 나갔습니다. 우우 우웅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태풍이 오기 전의 전주 같은 것입니다.


 태풍이 만들어 낸 노랫가락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터무니없이 들리는 이야기겠지만 저에게는 태풍이 오면 태풍이 만들어내는 운율을 들을 수 있었어요. 그것은 노래처럼 들렸습니다. 꽤 부드럽기도 하고 경쾌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웅장했습니다. 굉장히 웅장했어요.


 태풍이 만들어 낸 운율은 드뷔시의 ‘바다’와 흡사했습니다. 네, 그랬어요. 확실하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굉장했습니다. 전 태어나서 그런 광경과 경험은 처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콰르르릉 쿠쿵 하는 소리가 내 머리를 뒤 흔들었습니다. 더불어 내 눈앞에 바다가 내 키의 몇 배 높이로 떠올라 있었습니다.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부는지 바다 위의 표류물이 전부 하늘에 떠서 뱅뱅 돌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내 머리카락을 전부 뽑아 버릴 기세로 나를 때렸고 옷을 마구 뒤 흔들었습니다.


 나는 대역죄인 같은 몰골을 하고 이대로 태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사멸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버렸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방법은 하나지만 죽는 방법은 여러 가지라고 들었습니다. 행복의 종류는 한 가지이나 불행한 이유는 수만 가지라는 말처럼 이렇게 죽는 것도 덜 불행하다고 생각을 해 버린 것입니다.


 전 양팔을 들었습니다. 태풍은 내가 서 있는 바다를 지나쳐 어딘가로 이동을 할 것입니다.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니까요. 태풍은 자신에게 허락된 곳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대동하여 움직입니다.


 쿠우우웅 쿠르르릉 콰과쾅.


 가슴을 뒤흔드는 소리에 넋이 나갔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태풍이 하늘로 띄워 올린 표류물 중에는 바다거북도 보였습니다. 어린아이만 한 거북이였는데 눈앞에서 다른 쓰레기와 표류물과 함께 공중 부유해서 태풍의 바람을 맞고 있었습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단지 저의 착각일지도 모릅니다만 본 대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태풍은 거대한 소리와 함께 강력한 바람을 만들었습니다. 나도 바람을 맞았고 공중으로 떠 오른 쓰레기 더미와 표류물 역시 바람을 맞고 있었습니다. 바다거북도 공중으로 떠올라 어디로 갈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태풍의 거센 바람을 맞았습니다.


 태풍이 만들어낸 바람은 바다의 파도를 3미터 이상 크게 만들었고 공중으로 떠오른 쓰레기들의 모양을 완전히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다거북은 꽤 먼바다에서 태풍에 휩쓸려 이곳까지 표류해온 모양이었습니다. 지쳐 보였고 늙어 보이는 바다거북이었습니다.


 그런데 태풍의 바람에 의해서 바다거북은 등껍질은 그대로 둔 채 얼굴과 지느러미, 꼬리가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살점이 점점 흐물렁 해지더니 바람에 의해서 바다거북은 처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보잘것없는 등껍질만 남겨둔 채 생명체에서 이탈해가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쓰레기들도 태풍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바람에 의해서 성질이 전부 뒤 바뀌었습니다.


 [잠시 틈을 두었다. 물을 한 잔 마셨다]


 전, 그 뒤로 점점 아무것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네, 다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병원에서도 아직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크게 불편한 점은 없습니다.


 네, 태풍의 소리는 들립니다. 거짓말이라고 받아들여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매 년 태풍이 오면 그 소리는 들을 수 있어요. 태풍이 절 부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태풍을 연구하는 기관이 있지만 태풍을 저처럼 체험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렇게 해서 태풍 전문가가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들은 태풍의 소리는 전부 이 안에(가슴을 가리키며) 있습니다. 하나하나 다 다릅니다. 경이로운 일입니다. 아마도 그때 전 바다거북처럼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태풍이 나의 죽음을 막아줬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인간의 일이라는 게 참 어이없고 당황스럽기도 한 것처럼 또 굉장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이 인터뷰를 끝내면 ‘Storm Chaser’에 출연 중인 토네이도 전문가인 Tim Samaras와 함께 토네이도를 만나러 갑니다.


 그들은 아주 전문적입니다. 지구에서 최고죠. 순식간에 일어나는 현상의 데이터를 기록하고 계측해버립니다. Tim Samaras팀은 계측장비와 Ni Diadem소프트웨어를 자연스럽게 이용하는 기술자들입니다. 그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제 일이니까요. 저 역시 토네이도와 만나는 것에 흥분됩니다. 정말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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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마이클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래서 음악 감상실에 가면 조지 마이클의 노래를 자주 신청했다. 음악 감상실의 모습을 설명하자면 어두운 실내에 다운 라이트가 비치고 있고 극장처럼 앞을 보며 앉을 수 있는 소파 같은 의자가 일렬로 죽 있다.


극장을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앞에는 디제이 부스가 있고 그 옆에는 대형 스크린이 있어서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튼다. 무엇보다 음향시설이 좋아서 질 좋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다는 기분이 든다.

대충 짜깁기를 했는데 이런 식이다


요즘 음악 감상실의 이미지를 따와서 대충 편집을 해 보면 이런 모습이다. 연재하고 있는 소설 속 음악 감상실도 이런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디제이 박스의 오른쪽에 작은 구멍이 있어서 신청곡을 밀어 넣으면 된다.


조지 마이클은 죽고 없지만 크리스마스만 되면 전 세계에서 조지 마이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조지 마이클이 있던 웸(이 맞을까 왬이 맞을까, 왬으로 검색을 해도, 웸으로 검색을 해도 다 wham이 나온다)이 희대의 명작인 ‘라스트 크리스마스’를 불렀기 때문에 매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라스트 크리스마스는 뮤직 비디오도 재미있는데 잘 보면 현재와 과거가 교차 편집되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크리스마스에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서 자신의 영혼은 아직 헤어진 전 여자 친구에게 가 있는 뭐 그런 내용이다.


조지 마이클은 왬에서 떨어져 나와 솔로로 성공을 했다. 바로 찢어진 청바지에 가죽재킷에 기타 하나를 둘러매고 춤을 추며 부른 ‘페이스’가 전 세계인을 사로잡았다. 페이스는 얼굴이 아니라 신뢰, 믿음의 풰이뜨다. 조지 마이클의 목소리를 듣는 건 정말 기쁜 일이다. 특히 ‘키싱 어 풀’이나 ‘원 모어 트라이’ 같은 블루스적인 발라드를 부를 때 조지 마이클의 목소리는 천상의 목소리다. 대체 불가능이다.


조지 마이클과 엘튼 존이 함께 부른 “돈 렛 더 선 고 다운 온 미’는 언제 들어도 너무너무 좋다. 정말 좋다. 1절을 조지 마이클이 부른 다음 신사숙녀 여러분 앨튼 존입니다.라고 소개할 때도 멋지다.  https://youtu.be/RsKqMNDoR4o <=엘튼 존과 같이 부른 돈 렛 더 그거


조지 마이클은 이반이라는 걸 들키고 난 훙 당당하게 나는 이반이야,라고 한 후에 어쩌면 더 노래를 깊이 있게 부른 것 같다.


아마 조지 마이클의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피지컬이나 목소리나 얼굴이나 뭐든 빼어났기에 기록을 해야 하는 미국 영화인들 중에는 분명 기획을 하고 있는 인간이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앨튼 존의 영화도 나왔는데 조지 마이클도 나와야지.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도 살아있는 가수라도 재미있게 다시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법한데.


1980년대의 이지연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다. 제목은 ‘이지연’이나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로 해서 백두산의 리더 유현상이 미칠듯한 고음과 미친 비주얼로 열약한 대한민국 메탈 신을 이끌다가 이지연을 발굴하여 삼고초려 끝에 가수로 데뷔시키면서 이지연의 개인적인 삶과 고뇌, 방송활동, 그리고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갔던 티파니가 한국에 왔을 때 같은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일화를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주인공 이지연 역에는 안희연이 맡는다. 안희연은 하니로 가수 생활도 했고 연기자로도 찬찬히 경험치를 쌓고 있다. 이미지도 비슷하다. 예쁘고 노래도 잘 부르고 또 인기가 많고. 가수 이지연이 불렀던 노래도 안희연이 소화할 수 있으니 기획단계만 잘 거치면 충분히 영화로도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영화 ‘이지연’ 한 편을 끝내고, 또다시 한 편을 만드는데 바로 90년대를 풍미했던 현진영이다.


현진영이 박남정의 댄서 시절부터 이수만과의 만남과 데뷔하는 과정도 약물 남용으로 수감되는 그 모든 과정을 그리는 것이다. 제목은 ‘현진영 고’다. 현진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니까. 현진영은 지금도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지금은 재즈 보컬이라고 해도 될 만큼 목소리가 엄청나 졌다.


현진영의 일대기를 그리는 영화의 주인공으로는 임시완이다. 임시완 역시 얼굴이 현진영의 어린 시절의 얼굴을 닮았다. 임시완도 가수 출신으로 인기자로의 변신이 완벽하다는 평이다. 임시완이 열심히 댄스를 배워서 현진영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2탄이 극장가에 걸리는 것이다.


라고 한 번 생각해봤다. 아무튼 음악 감상실에서 조지 마이클의 페이스를 신청하면 옆의 대형 스크린으로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었다. 그럼 한 번 볼까요.

옆의 스크린으로 뮤직비디오를 틀어준다


https://youtu.be/6Cs3Pvmmv0E <= 풰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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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9-04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지 마이클 = 찢어진 청바지 .....
 


비가 많이 내리면 강변의 조깅 코스에 사람들이 소거된 것처럼 보인다. 비가 와도 조깅 코스에 몇 명은 나와서 슉슉 숨을 뿜어내며 달리거나 자전거를 타는데 지정할 수 없는 비가 내리면 이렇게 사람들이 전부 약속이나 한 듯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바글바글거리는 도심지 속에서 아무도 없는 강변에 있으면 마치 초현실 세계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인구가 120만 명이나 되는, 어딜 가나 인간들이 바글거리는 도시에서 이렇게 거짓말처럼 인간이 쏙 빠져버린 공간에 서 있는 기분은 마치 달리의 그림 속에 와 버린 것 같다.


영화를 찍는다면 바로 지금 여기서 촬영을 하면 좋은 그림이 나올지도 모른다. 사람들을 억지로 비켜서게 하지 않아도 되며 모두가 촉촉이 젖은 가운데 영화 촬영이 시작되면 모두가 그 장면에 그대로 몰입할지도 모른다. 초현실 세계에 온 것처럼.


라디오를 듣는데(나는 라디오를 참 많이 듣는구나) 고등학교 졸업사진을 찍었다는 학생의 이야기가 나왔다. 학생은 마스크를 벗고 졸업앨범을 찍는데 반 친구 중에 몇몇 친구들의 얼굴을 그대로 본 건 처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도 뭔가 부끄럽다며 졸업앨범 사진을 찍은 사연이 소개가 되었다. 마스크를 제거하면 친구들에게 민낯을 보여줘야 해서 부끄러워하는 게 지금의 세계다. 우습지만 이게 초현실이 아니고 무엇일까.


배추가 9,500 원하는 현실이다. 초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인간이 바글거리는 도심지 속에서 아무도 없는 강변을 거닐어도 이상하게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초현실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을 벗어난 것이 초현실, 상상과 판타지의 세계가 초현실인데 이미 판타지인 것이다. 그래서 그래픽이 왕창 들어간 판타지 영화가 나와도 사람들은 시큰둥할 뿐이다.


앙드레 브레통이나 도라 마르가 살아서 지금 세계에 온다면 화들짝 놀라며 신나서 작업을 했을지도 모른다. 미래는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굉장하구나, 온통 재미로 가득하구만. 하면서 미친 듯이 초현실 사진을 찍고, 초현실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도라 마르의 애인이 한 때 피카소였는데 처음에는 거장이라 말도 못 붙일 정도로 쭈뼛거렸다가 시인 폴 엘뤼아르 덕에 피카소를 만나게 되고, 피카소는 지적이고 아름다운 도라 마르에게 반하게 된다. 도라 마르는 아주 미인이다. 두 사람은 10년 정도 불같은 연애를 하고 헤어졌는데 피카소에게 도라 마르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당신은 위대한 예술가 일지 모르지만 당신은 인간쓰레기예요]


그 덕인지 도라 마르는 죽을 때까지 초현실 그림을 그렸다. 도라 마르가 지금 잠에서 깨어나 여기에 온다면 기뻐서 초현실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런 세상에 우리는 지금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열심히 버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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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동굴 속의 작은 모닥불’


태엽 감는 새의 이미지를 끌어모아 디자인을 한 번 해보았습니다. 이런 작업을 꽤나 재미있습니다. 2019년에 하루키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보타리 라트 재단에서 수여하는 latters grinzane award의 한 부분의 섹션 수상자로 선정되어서 수락 연설을 했습니다. 선사시대부터 동굴 속에서 인간은 상상의 세계를 꽃피우며 전혀 오던 이야기의 힘에 대해서, 하루키는 자신의 이야기에 빗대어서 연설을 했습니다. 그중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 관한 부분입니다.


제 또 다른 장편 소설 ‘태엽 감는 새’ 역시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이라는 단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소설의 첫 단락은 이렇습니다.


[부엌에서 스파게티를 만들고 있는데, 낯선 여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스파게티가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는 순간이었고, 라디오에서는 로시니의 도둑까치 서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파게티를 만들기 위해 완벽한 음악이었고, 나는 휘파람으로 음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갑자기 영감을 받아 쓴 이 단락은 일단 이렇게 써 둔 다음 서랍 속에 넣어두었습니다. 요컨대 비디오카메라로 영상을 촬영하고 아카이브에 보관하기 전에 필요한 장면만을 편집해 보관하는 것처럼 잘 정리해서 보관해주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깨기 전 꾸었던 꿈을 기억하고 기록해두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요, 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특별한 목적 같은 건 없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단락은 잘 발효되어 단편 소설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저는 잡지에 이 글을 기고했고, 단편 모음집에 포함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저는 이 단편을 매우 긴 장편 소설 ‘태엽 감는 새 연대기’로 발전시켰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짧은 단편은 이야기의 형태를 취한 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장편 소설로 팽창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2단계 발효를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일은 저에게는 자주 일어납니다.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은 짧은 단락으로 나타나고, 더 견고한 형태를 취할 때까지 한 단계씩 자라나고 발전해나가는 일종의 화학반응을 일으킵니다. 머리가 아닌 마음의 화학 작용이죠. 저는 전체의 과정을 주시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그 일련의 과정을 따르게 됩니다. 저에게 있어 이야기는 자발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연스러워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설득력일 잃게 됩니다.


설득력을 잃은 이야기는 결국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위 이야기의 첫 번째 단락과 관련하여, 단편으로 출간했을 때, 한 비평가로부터 꽤나 거센 공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대단했습니다. 그는 그 첫 단락이 매우 비현실적인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일본 남자는 정오에 혼자 주방에서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지 않아요”라고 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의 의견입니다. 그런데 저는 종종 혼자서 스파게티를 요리하는 일이 발생하고, 왜 그런지 정말 모르겠지만, 스파게티 면이 거의 다 익어갈 때쯤, 전화가 울립니다. 진심입니다.


여하튼, 전 이런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전체 소설의 프로젝트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이 소설이 어떻게 끝나게 될지 너무 궁금한 상태로 이야기를 써 내려갑니다. 신나는 일입니다. 독자들과 함께 그 답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한 페이지 또 다음 페이지를 함께 읽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적어도 소설이라는 세계는 이런 식으로 작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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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이 탄생된 이야기부터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중에 태엽 감는 새 부분만 발췌를 했어요. 또 하루키가 한 연설을 그대로 옮겨오지 않고 중간중간 저의 설레발 의역을 왕창 넣었습니다. 태엽 감는 새 이야기 밑으로의 연설에서는 ‘자유로움’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연설이 좋은 점은 하루키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부터 끝까지 했다는 점입니다. 의역이 들어가지 않은 부분은 원본 연설 부분을 보시고, 또 ‘파인팅 하루키’ 사이트에 들어가면 연설문을 다 읽을 수 있습니다.  


John Coltrane - A Love Supreme, Part I - Acknowledgement

https://youtu.be/fth9UUa1M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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