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오마주



말이 많다는 말은 비교적 듣기 좋은 말이 아닌 경우가 많다. 부장님은 참 말이 많아, 교장 선생님은 말이 많아, 부모님은, 너는, 그 사람은, 뒤에 말이 많다는 말이 나오면 잔소리와 비슷하게 들린다. 하지만 말이 많은데 듣기 싫지 않는 사람도 많다. 거래를 하거나 영업을 따 내야 하는 사람들은 당연하지만 말을 많이 해야 한다. 말을 적게 하면 조직과 개인 모두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말이 많지만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이 많다는 말을 잘하지 않는다.


소설가들도 말이 많다. 따지도 보면 소설가만큼, 글을 쓰는 작가들만큼 말이 많은 사람도 없다. 작가들은 글로써 자신을 표현하고 말한다지만 실제로는 강연을 통해 말을 더 많이 한다. 그러니까 말이 많다.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 태어난 순간 내가 적은 글이라도 그 글은 읽는 독자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건 많은 말을 해서 궁금증을 풀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가들, 작가들이 말이 많지만 그 많은 말이 듣기 좋은 작가가 있고, 또 아 진짜 말이 많군, 흥. 하는 작가도 있다.


많은 말인데 더 해줘요, 하는 작가의 경우 엄청난 말을 쏟아내지만 듣는 이들이 알아듣기 쉽고, 거북하지 않은 속도와 내용 그리고 어려운 말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심플한 클래식을 듣고 있는 착각이 드는 말 많은 작가가 있다. 그중 우리가 좋아하는 작가 김영하 소설가가 있다. 소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김영하의 소설은 나오자마자 날름날름 다 읽었을 것이다. 김영하의 소설 역시 하루키처럼 소설에서 손이 뻗어 나와 나를 데리고 소설 속으로 가버린다. 김영하 소설가는 그동안 강의와 소설이 아닌 책을 출간하다가 근래에 소설이 나왔다. 유튜브에서, 티브이에서 공연장에서 김영하 소설가는 말이 많다. 하지만 더 듣고 싶고 더 많이 해줬음 하는 소설가다.


개인적으로 말을 무척 많이 하는데 역시 더 듣고 싶은 소설가는 원종우다. 원종우는 과학자(라고 해야 할까) 만큼 과학에 대해서 식견이 높으며, 음악가이자 작가인데 그가 펴낸 SF단편소설집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가 너무 재미있었다. 짤막한 단편 소설들로 채워져 있는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작품에 대한 과학적인 이야기와 자신의 의견을 첨부했다. 원종우 역시 방송이나 이런 데서 말이 많다. 하지만 귀에 쏙쏙 들어온다.


소설가만큼 말이 많은 게 시인이다. 시인은 말이 없을 것 같은데 아이러니하게도 말이 많다. 시는 짧지만 시의 세계는 깊고 풍부해서 시인의 입을 통해서 그 세계를 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시인도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군이다.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박준 시인도 말이 많다. 라디오 방송도 하고 있어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의 말은 스며든다. 우리는 스펀지가 되어 박준 시인의 말을 흡수한다.


그러고 보면 책을 펴내는 인문학자, 책을 펴내는 자기 개발서 작가, 책을 펴내는 철학가, 책을 펴내는 사진가와 평론가 등 책을 내는 사람들은 다 말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모두의 많은 말이 다 듣기에 괜찮지는 않다. 말 많은 소설가 중에서도 어쩐지 듣기 싫은 소설가도 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말속에 우쭐함이 묻어 있어서 나와 너는 다르며 나는 너보다 조금 위에 있다는 분위기를 가지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이 많은 말을 하면 듣기가 싫다.


또 반면에 배우들은 영상 속에서 끊임없이 말을 하는데 실제로는 입을 꾹 다물고 열지 않는 사람도 있다. 코미디언들 역시 말이 아주 많을 것 같은데 현실에서는 또 말이 별로 없는 사람도 있다. 세상은 아이러니해서 소설가는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글만 쓸 것 같은데 말을 더 많이 할 때도 있다. 시인 역시 그렇고 철학가들 역시 그렇다.


하루키도 말이 많다. 과묵하기만 할 줄 알았던 하루키 역시 말은 많다. 참 말이 많네, 가 아니다. 하루키도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또는 이전에 연설문을 통해 많은 말을 했다. 하루키는 분명 이 시대의 가장 영향력이 있고, 화제의 인물이며 이례적으로 펴낸 소설들이 엄청난 판매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하는 말속에 어려운 단어나 힘든 말은 없다. 그리고 애써 풀어서 말을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일상을 이야기하듯이 말을 할 뿐이다. 그건 아무래도 자동차보다는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지방으로 여행을 가서 그곳의 현지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시간을 보낸 탓일지도 모른다. 문학적인 문체가 있겠지만 말을 할 때에는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서 사람들과 소통을 한다.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소설가, 작가의 특성상 대부분 일상적인 언어로 사람들과 소통을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작가들도 많다. 그런 작가들은 안하무인격으로 일방도로 같은 면모를 보이다가 시간이 지나면 독자들과 언쟁을 높이고 싸우기까지 한다. 자신은 독자들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말을 통해서 알리려 든다.


유튜브에서 가끔 책 읽어주는 영상을 틀어 놓는 편인데 하루키의 에세이를 낭독하는 유튜버 중 그저 책만 읽어주면 되는데 낭독하는 이의 달리기 경험을 하루키의 조깅과 맞물려서 흡사하게 말을 한다. 하루키는 4 반세기를 매일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런 사람과 고작 1년 정도, 그것도 일주일 내내 달린 것도 아닌데 마치 자신과 하루키가 동일선상에 있는 듯한 느낌으로 많은 말을 한다. 조깅은 –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멋진 몸이나 날씬한 몸은 신기루 같은 것이다. 조깅도 그렇다. 지나고 나면 그런 멋진 몸은 금방 사라진다. 그래서 매일 해줘야 유지가 된다. 조깅이 그런 것이다. 작년에 매일 달렸더라도 그걸 머릿속에서 없애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매몰되어 버려 지금도 내가 계속 조깅을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전문 운동선수들을 보면 알 수 있다. 20년 넘게 하루에 8시간씩 운동을 했더라도 은퇴를 하고 1년만 운동을 끊고 잘 먹고 잘 쉬면 살이 쉽게 찐다. 인간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는 겸손해야 한다.


오래전 릴케도 말을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21살의 릴케는 37살 루를 만나 사랑과 죽음 그 이외의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오직 죽음 아니면 루에 대한 사랑을 말했던 릴케. 그리고 많은 말로도 모자라는 자신의 사랑은 시로 표현했다. 무명 시인이었던 릴케는 이미 명성이 자자한 루 살로메에게 매료되었다. 릴케의 구애가 장미와 편지를 통해 끝없이 이어졌다. 루 살로메는 당대 최고의 인물들을 매혹시켰다. 니체의 연인이기도 했고 프로이트의 연인이기도 했다. 루는 릴케의 애틋함을 1928년에 ‘릴케’를 펴내기도 했다. 릴케의 구애를 받아들여 두 사람은 뮌헨의 몽마르트 방갈로에서 한 달을 같이 보냈다. 그곳으로 달려간 전혜린은 두 사람이 머물렀던 곳을 [이 전나무 숲은 몇백 년 된 듯한 거대한 수목이 빽빽하게 서 있어서 낮에도 굴속같이 캄캄하고 보이는 것은 매끈하고 곧게 솟은 전나무의 줄기들뿐이었다. 어두운 때문인지 지면은 이끼로 덮여 있었고, 그 이끼도 몹시 두껍고 보드러웠으며, 검은 초록빛이었다. 어둠 속을 잘 보면 그 이끼 위에 오랑캐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였고 오랑캐꽃을 특별히 좋아하는 나는 미친 듯이 달려가서 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었다. 유난히 짙은 보랏빛이었고 꽃송이가 크고 꽃줄기가 굵고 길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라고 했다. 주위에는 백화 나무가 꽉 차게 서 있고, 그 풀밭 위로 릴케와 루는 맨발로 걸어 다녔다고 한다. 빵과 야채와 달걀만으로 살았다고 한다. 사랑은 그 모든 걸 가능케 했다. 릴케의 가장 찬란한 시가 루를 만났을 때 나왔다. ‘너는 위대한 여명’이나 ‘내 눈의 빛을 꺼다오’ 같은 시가 루와 함께 일 때 나왔다.


루 역시 릴케에게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 없어.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 또 우리들 마당의 돌담의 이끼 낀 틈에서 피어 나오는 새파란 오랑캐꽃의 무리... 이런 것들이 가장 사실적인 것, 알아야 하는 것, 반드시 체험해야 하는 것이야....]라는 글을 써서 줬다. 장소가 주는 기묘함 때문인지 릴케는 그 속에서 사랑하는 루와 함께 하며 사랑과 죽음 그 외에는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너는 밤과 시간의 뒤에 우는 닭소리다. 너는 이슬이다. 아침 미사다. 소녀다. 낯 모르는 남자다. 어머니다. 죽음이다] 릴케는 루에게 이렇게 말했다. 릴케는 이곳에서 루에게 아주 많은 말을 쏟아냈을 것이다.


근래에는 나도 말을 많이 하게 되었다. 나의 불안에 대해서, 나의 불안함 때문에, 나의 불안한 형태에 대해서, 근원적인 불안,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은 불안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은 못 했지만 불안에 대해서 많은 말을 들어주는 이에게 하게 되었다. 그건 나에게 있어 아주 기묘한 일이며 특별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내 속의 불안에 대해서, 불안이 있다, 라며 말을 꺼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끄집어내게 되면 막혀 있는 속이 뚫리는 것처럼 조금은 시원해진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을 해본 적이 언제였을까. 인간은 대체로 솔직하게 말하거나 마음을 내보이지 않는다. 가족일수록 가족의 속 마음은 더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에 사춘기에 접어들면 부모님보다는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등잔 밑이 어둡고 촛불의 가장 어두운 부분의 이야기가 괜한 말은 아니다.


불안은 직설적이고 구체적인 불안이 있고 그 위에 거대한 근원적인 불안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불안은 확대되고 확장할 뿐이지 축소되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두려움이 몰려오고 불안해진다. 이 행복의 끝이 이미 두렵다. 행복은 늘 추상을 달고 온다. 짧고 얕고 찰나적이다. 그런 찰나를 계속 만들어서 이어 붙어야 하는데 그런 삶은 지치게 된다. 한 번 주저앉으면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행복하기보다 덜 불행하기는 바라는 나에게 이 추상적이며 기이한 행복이라는 것이 근래에는 잦아졌다.


어제는 유튜브를 통해 100년 전의 한국어 육성을 원본으로 들었다. 일제강점기였다. 한국말을 못 쓰게 하는 일본의 만행이 이어지는 가운데 어린이들이 우리나라 말을 많이 하고 싶어서 한국말을 배우는 것을 들었다. 또박또박한 소리로, 소나무, 그 모자, 저 보자기,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어서 이리 오너라, 나비 나비 오너라, 노자 노자 나하고. 그저 말을 하고 싶어서 한국어를 할 뿐인데 듣고 있으니 뭉클했다. 소설가들이 말이 많은 이유는 글로 다 못한 이야기를 보충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말이 많다는 말을 들을지라도 말을 해야 한다면 가만히 있기보다 말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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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똑똑한 영화 찌질이들이 한곳에 왕창 나오는 영화다. 홍상수는 자신의 그 신묘한 찌질함과 여성관과 불륜을 매번 영화에 드러내는 세계 유일한 감독이지 않을까. 무서운 사랑을 찌질함으로 덮어버릴 줄 아는 감독, 진정한 일탈의 자유 속에는 무시무시한 시선이 있음을 우화적 영상으로 나타내는 유일무이한 감독일 것이다. 그 영화적 똑똑함이 부럽고 좋다. 

어느 한식당, 영화 속에서 중원 형이 주인공인 감독에게 쪼잔한 놈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쪼잔한 놈. 홍상수에게 하는 말이다. 자신은 그런 각본을 그냥 써버렸다. 그리고 개 찌질한 이야기들이 술집에서 오고 간다. 완전 찌질한 인간과 좀 찌질한 인간과 좀 덜 찌질한 인간이 한식집에서 술을 몇 병이나 마시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는 재미가 없는데 재미있다. 재미없는 재미가 있다. 북촌방향에는 소설이라는 술집이 나온다. 그곳에서 많은 이야기를 주인공들이 하지만 뭐 그렇고 그런, 찌질한 고학력자들의, 찌질한 일상 이야기들 뿐이다. 그 찌질함 속에 인간의 일상과 일탈이 다 들어가 있다.

매 영화가 비슷한 것 같은데 다 다르다. 강변 호텔은 시 같아서 시적이고, 그때는 맞고~는 판타지적이고, 도망친 여자는 꼭 전시회를 보는 것 같더라. 북촌방향에는 김보경이 일인이역으로 나온다. 이 역시 판타지 적이다. 북촌방향의 김보경은 아주 예쁘다. 김보경이 술집 소설의 주인 예전으로 나올 때는 그저 예쁘게만 나오지만 감독을 사랑하는 경진으로 나올 때는 찌질함에 스며들어 연기를 한다. 김보경의 기담이나 진숙이 누나나 드라마에서도 좋았지만 북촌방향의 담배 두 개비 빌리려는 찌질한 경진이를 너무나 잘 표현했다. 김보경이 작년에 암으로 죽었을 때 이 북촌방향이 생각이 났다.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실제로 영화적 커리어가 있어서 망해도 상관없어!라고 생각을 가지지만 내면의 그 찌질함을 영화로 표현하고픈 배우들이 나오거나, 진실로 홍상수의 그 대본 없는 대본에 있는 그 시나리오적 배우로 한 번 영화에 나를 걸어보고픈 배우가 나오거나. 아무튼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영화 뒷이야기를 하자면 중원 역의 김의성은 극 중에서 베우이며 영화 한 편 출연 후에도 인기가 없어 베트남으로 가 사업을 했지만 쫄닥 망하고 다시 온 걸로 나온다. 그건 김의성 배우의 실제 경험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 북촌방향이 칸에 초대를 받아서 배우들이 다 갔는데 김보경은 참석을 하지 못했다. 이미 그때부터 수술을 하고 몸이 아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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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용서받지 못한 밤’을 보면 유키히로는 스무 살 딸을 혼자서 키웠다. 그에게는 하나의 비밀이 있다. 딸 유미가 네 살 때 아내를 죽였다는 것이다. 당시에 누구도 모르게 그 사실을 숨기고 잘 처리했다고 믿었는데 15년 뒤에 누군가가 비밀을 안다며 돈을 요구한다. 덱스터의 기나긴 여정이 끝나고 10년 후에 덱스터는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마이애미에서 멀리 떨어진 뉴욕의 북부 작은 마을 아이언 레이크에서 살아가는데 덱스터 모건, 자신만큼 아니 자신보다 더 큰 어둠의 충동을 지닌 아들 해리슨이 나타난다. 그러면서 덱스터는 뉴 블러드 시즌이 시작된다.


덱스터가 10년 동안 시리즈 8까지 방영이 되었다. 대단했다. 엄청났다. 실로 조마조마하며 아슬아슬했고 통쾌했으며 사이코패스 살인마 덱스터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리즈 8 이후 10년 지난 21년에 시리즈 9, 덱스터의 뉴 블러드가 다시 방영했다. 이 시즌으로 이제 다시는 덱스터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건 영화를 보면 된다.


2006년에 했던 덱스터 시즌 1이 케이블 티브이를 통해서 다시 방영을 시작했다. 그 이름만으로도 얼마나 흥분되고 멋지고 짜릿하며 친근한가. 덱스터는 법적으로는 사이코 범죄자이나 사회규범적으로는 히어로인 셈이다. 현실에서 이런 히어로를 우리는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그건 부인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사형을 바란다는 악질 범죄자도 1심, 2심, 항소, 대법까지 가서 집행유예나 5년! 같은 선고를 받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우리는 그동안 많이 접했다. 심지어는 사회가 매장시키고픈 죄를 지은 가해자가 형을 살고 나오면 정부에서 보조금으로 지원을 해주며 사람들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공적인 인력을 배치하기도 한다.

 

법으로 해결이 안 되는,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 가며 성폭행을 일삼으며 심지어 죽여서 토막을 내는 사이코패스 범죄자들, 경찰이 잡지 못하는 악질범을 덱스터 모건이 심판을 한다. 덱스터 내부의 극심한 어둠과 살인 충동으로 사회악을 찾아서 처단을 한다. 물론 법적으로는 덱스터는 한낱 범죄자일 뿐이지만 법망을 피해 지속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 범죄자는 덱스터에 의해 처단이 되고 나면 다시는 그런 짓을 할 수 없기에 우리는 덱스터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 그런 모습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고 부처님도 아니기 때문에 사회 속에서 법망을 피해 다니며 죄를 짓는 인간들 - 소년범, 성범죄자들, 그루밍 범죄자, 악질 스토커들은 사라졌음 하는 것이다.


덱스터는 경찰이다. 덱스터는 혈흔 분석가로 아주 뛰어난 천재다. 살인 현장에 있는 혈액을 분석하여 범죄자를 잡는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덱스터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렇게 잡힌 범죄자는 보석금이나 변호사를 잘 두거나 재판정에서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이면 형을 살지 않을 수 있다. 또 덱스터는 모두에게 친근하며 문제가 있는 애인에게도 자상하며 애인의 아이들에게도 멋진 아저씨다. 하나뿐인 경찰 여동생 데브라에게는 믿음직한 오빠로서 도움을 줄 수 있는 한 도움을 주는 자상한 오빠다. 데브라의 아버지 헤리는 덱스터가 2살 무렵 입양을 했다. 데브라와 덱스터는 친남매는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데브라는 덱스터에게 모든 문제를 털어놓는다.


그럼에도 덱스터는 사이코 범죄자를 찾아서 그 누구도 모르게 토막 내어 처리를 하고 범죄자의 피 한 방울을 전리품처럼 가지고 있는다. 덱스터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려고 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 덱스터가 그게 가능한 것이, 그런 완벽에 가까운 생활을 가능케 하는 건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관계에 나타나는 감정은 덱스터의 연극일 뿐이다. 덱스터는 피가 난자한 살인 현장에서는 재빠르게 뇌가 회전을 하지만 애인이 지금 이 순간 덱스터와의 조금 불안한 관계에 대해서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래서 시즌이 넘어갈수록 덱스터는 인간의 감정을 하나씩 알아가고 덱스터가 어째서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가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덱스터에게는 살인하고픈 강렬한 충동, 이 억누를 수 없고 고통과도 같은 엄청난 충동을, 법망을 피해 교묘히 살인을 하는 사이코패스를 잡아서 토막 내는 데 사용을 한다. 다른 사이코패스의 무차별적 살인과 다른 점은 덱스터는 양 아버지, 경찰이었던 헤리에게서 어린 시절부터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살인충동을 억누를 수 없어 어차피 살인을 해야 한다면 살인자들, 경찰이 잡지 못하는 – 그래서 법망을 피해 가는 아주 나쁜 악질 범죄자들을 죽이도록 훈련을 받았다. 사이코패스는 사이코패스가 잡아야 한다는 덱스터. 그것이 우리가, 전 세계가 10년 동안 덱스터의 시리즈에 매료되었던 이유였다. 시즌 1에서 혈흔 분석가 사이크 패스를 알아본 살인자는 매춘여성들을 죽이면서 토막을 내고 피를 다 뽑아서 덱스터에게 자신을 찾아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렇게 시작된다.


덱스터가 티브이에서 방영한 시점이 묘하게도 계곡 사건의 주인공 이은해가 구속이 되는 시기다. 이은해는 현재 그 어떤 한국사람에게도 면죄부를 받을 수 없는 인간이다. 태어나기를 죄를 짓기 위해 태어난 인간처럼 보인다. 이은해와 요만큼이라도 관계가 있는 사람은 대부분 불이익을 다하거나 이은해에게 받아야 할 무엇인가를 받지 못했다는 기사가 올라오고 있다. 오죽하면 현재의 연인 조현수를 살린 것이 이번에 이은해의 구속이라는 말까지 있다. 노예인 조현수 역시 시간이 지나 주인인 이은해의 관심이 떨어졌을 때 어떻게 당했을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대국민 뒷골을 아프게 하며 도망 다니다 잡혔는데 – 자수했다고 하면서도 질문에 묵묵부답인 이런 범죄자가 사회적 잣대로는 무기징역 내지는 사형감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법정에서는 확실한 물증이니, 초범이니, 정신적인 감정 결과 문제가, 같은 선고로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흐지부지하여 실형이 어떻게 떨어질지는 의문스럽기만 하다.


저런 살인자들, 사람을 죽이고 토막을 내거나 죽인 사람을 가지고 노는 그런 사람을 우리는 살면서 몇이나 볼까? 이런 거 한 번 생각해본 사람이 있을까. 왜냐하면 내가 팔을 뻗는 울타리 안에는 평화, 정의, 행복만이 가득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호러블 한 것이 없다. 그리고 살면서 검사를 단 한 번도 만나지 않는 사람이 수두룩할 정도로 살인자를 만나는 일도 드물다. 하지만 2년 동안 근무한 구치소에서 나는 범죄자들을 아주 많이 만났다. 그들 모두 밖에서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착한 아빠, 다정한 남편, 능력 있는 사장이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우리는 늘 잊어버리고 산다. 우리의 문제라면 금방 까먹는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고유정의 일은 다 잊어버렸다. 치밀한 계획하에 남편을 죽이고 토막을 내서 유기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 중인 고유정. 하지만 지금과 같은 사이코패스 정신으로 가면을 쓰고 조신하게 20년 복역 뒤에는 가석방을 신청할 수도 있다고 한다.


현실에도 덱스터 모건 같은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이 살인자들에 대한 사건과 문제 해결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어야 하지만 사람들은 지나간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새로운 사건은 매일 터지며 새로운 소식을 우리는 원하고 바라기 때문이다. 아마 그렇게 이번 사건의 이은해도 곧 잊히게 될 것이다.


덱스터를 보면 경찰을 죽인 범인이 석방이 되어서 허망한 표정의 아버지 헤리에게 어렸던 덱스터가 그랬다.

“그건 불공평하잖아요.”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단다. 덱스터.”

시즌 9까지 사람들이 빠져 들어서 볼 수 있었던 것은 보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중에 덱스터는 인간의 감정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점점 인간화가 되어서 실수도 하게 되고, 들키기도 하는 등 아주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한 순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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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4-22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고의 미드중 하나죠.
10년이면 덱스터도 많이 늙었겠네요. 욕이 찰지던 동생도, 썰렁한 유머의 대머리도, 의리파 뚱뚱이 경사도, 덱스터를 거의 잡을뻔한 빼빼 형사도 모든 늙어서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네요.

교관 2022-04-23 11:37   좋아요 0 | URL
시즌9에서는 데브라가 헤리의 역할을 해요. 하얀 설원 속에서 펼쳐지는 피의 향연 ㅎㅎ. 시즌9를 마지막으로 이제 덱스터는 영영 볼 수 없어요 엉엉
 



고독하고 외롭지 않고서는 글을 쓸 수 없다. 철저하게 외로워야 구석진 곳에서 웅크리고 몇 시간이라도 글을 쓸 수 있다. 고독하고 또 외로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글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고독해야만 하고 외로워야만 한다. 그래야 그 속에 웅크리고 있던 불순물 같은 미미한 그리움이 활자로 그려진다. 외로움을 밀어내기 위해 외로움을 견디기보다는 외로워야만 하기 때문에 외로움을 동반한다. 이런 내가 타인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들과의 관계 역시 조금은 일그러져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떤 면으로 말하자면 외로움에서 벗어나기보다 벗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외로움이란 암 같아서 벗어났다 싶으면 거기에서 또 다른 외로움이 증식하여 삶을 갉아먹는다. 야금야금, 아주 천천히 배추벌레가 잎을 천천히 먹어 치우듯이. 판에 박힌 이야기지만 근원적으로 외롭게 태어나서 외롭게 죽는 것이 인간이다. 외롭지 않다면 사랑하는 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가끔 주위에서 그런 말을 나에게 하는 경우가 있다. 같이 있어도 외롭다고. 같이 있으면, 당연하지만 외로움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 말은 나이 먹기 싫어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피할 수 없다. 그것처럼 외로움 역시 벗어나려고 해 봐야 벗어나는 순간 또 다른 질의 외로움이 피부를 덮을지도 모른다. 외로움을 온몸으로 드러낸 나오코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미도리가 어쩌면 더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가서야 와타나베는 전화 수화기를 들고 그런 미도리의 마음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이건 비단 노르웨이 숲에서만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복잡하고 거미줄 같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고독 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 연령층은 더 어려졌다.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이다. 인파 속에서 고독함이 추위처럼 달려든다. 너무 추워서 몸이 떨리는데 따뜻하게 해 줄 사람 한 명도 없어서 얼어 죽는다. 나오코처럼 이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이다. 이 깜깜한 도시에서 어둠이 내미는 손을 잡는 것이 생생하고 또렷한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쓸쓸하게 죽고 나면 그 방에는 시취가 물처럼 찰랑찰랑 차오른다. 외롭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있다. 그건 사랑이다. 잠이 드는 것도 외롭다. 한 침대에 부부가 같이 들어도 잠은 혼자서 들어야 한다. 시간을 맞춰서 같이 잠이 들 수는 없다. 잠은 외로워야 한다. 외롭게 잠들어 길이보다 깊이 있게 들었다가 일어나야 잠들어 있는 동안 못 보던 가족을 보며 인사를 할 수 있다. 사랑이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잠마저도 우리는 외롭게 들지 못한다. 의식 그 너머에 외로움이 싫어서 시끄럽고 불안한 의식의 방해가 많아서 리추얼이 되지 않아 괴로워하는 이들이 늘었다. 가장 외로워야 하는 건 아픔이다. 아픈 건 누군가 대신 아파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혼자서 외롭게 아픔을 견뎌야 한다. 아이가 아프다고 해서 부모가 대신해 줄 수 없다. 하지만 외로워도 아픔을 견딜 수 있는 건 사랑하는 사람들이 옆에서 간호를 해주기 때문이다. 사랑이다. 내가 외로워서, 외로워야만 해서 할 수밖에 없는 것들은 사랑을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완벽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외로움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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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도록 세차게 비가 왔습니다. 애매한 계절에 이렇게 하늘이 뚫린 듯 비가 내리면 세상은 차갑게 몸을 웅크립니다. 저는 새벽까지 그런 빗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고 했을 때, 헤어지기 싫어 소리를 지르는 연인처럼 강하게 내렸습니다. 그리고 기운이 다 했는지 그 비는 지금 가늘어졌습니다. 힘이 없어 축 쳐진 새끼 고양이의 꼬리 같아졌습니다.


비가 내리면 세상은 전부 비에 젖습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비에 젖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다입니다. 바다만 비에 젖지 않고 얼굴을 비에 드러냅니다. 비는 규정적입니다. 비가 내리는 모든 곳이 비에 젖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는 비 규칙적입니다. 강하게 내리는가 싶으면 어느 순간 가늘어졌다가, 또 어느 순간 바람을 대동해서 마구 내립니다. 밤에는 지구의 저편 기침을 심하게 하는 마른 숨결의 존재를 대동하여 거칠고 푸석한 비를 밤새 뿌렸습니다.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치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내서는 안 되는 소리를 일부러 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고양이 소리였습니다. 저에게 이름 모를 고양이는 전부 해시시라는 이름입니다. 그 고양이도 해시시라고 부르겠습니다. 비가 오는 밤에 비 맞은 해시시는 칼날 같은 소리를 냈습니다. 고요한 아파트 단지에 이렇게 찢어지게 큰 소리로 울다니요. 언젠가 책에서 고통을 참지 못해 해시시를 하루 종일 피우는 여자를 읽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해시시의 혈관이 검붉게 변한 여자의 얼굴이 겹칩니다.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천장으로 기어 다녔고, 추악하고 싶은 장면은 흐릿해졌습니다. 천장은 늘 그렇듯 비열하고 추악한 것을 열거해 놓은 고대 상형문자가 무늬로 환생하여 저를 내려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눈을 감아 보지만 이미 한 번 눈을 감은 상태입니다. 그리하여 저의 눈앞에 뚜렷하게 무늬가 나타나고 맙니다. 그건 굉장한 악몽입니다. 무늬가 스스로 움직여 나에게 다가오니 말이죠. 세상에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그러한 것들이 더러 있습니다.


목이 마르지만 일어나기가 싫습니다. 눈을 뜨면 눈앞에 조악한 기억이 푸른빛을 내고 요상한 소리를 지르며 얼굴에 달라붙을 것만 같습니다. 무섭습니다. 목이 마릅니다. 침을 삼켜 보지만 1%의 아밀라아제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목 안이 그야말로 아타카마가 된 것 같습니다. 물이 몽땅 빠져나간 나의 몸을 생각하다가 메마르게 잠이 듭니다.


눈을 떴을 때 더 이상 세차게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곧바로 물을 마셨습니다. 마치 뭔가를 밀어 내려는 듯. 물을 마시고 나니 목에서 물비린내가 났습니다. 비는 칼로 자르듯 사라지기 싫은지 잿빛의 하늘과 바람을 타고 하늘하늘 내리고 있습니다. 라디오에서 프리실라 안의 레인이 나옵니다. 레인을 들으며 밖으로 나오니 파도가 요동을 치고 있습니다. 파도는 꼭 크게 울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람이 불어 좋은 날이 있습니다. 바람이 그대를 데리고 오는 날이 있습니다. 바람에 실려 그대의 냄새가 날 때면 저는 바람을 맞습니다. 형이상학적인 모습을 하고 어떤 물리적인 법칙을 무시한 채 그대를 맞이합니다. 가까운 바람 속에, 저 먼 해풍 속의 그대, 바로 당신이 있습니다.


그대와 연락이 되지 않을 때 저의 슬픔은 제대로 커지고 맙니다. 얼마나 깊고 큰지 저 자신조차 알지 못합니다. 휴대전화는 많은 일을 하게 해 줍니다. 많은 것을 측정할 수 있고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휴대전화로 슬픔을 측정할 수 있다면, 그리움을 측정할 수 있다면 참 졸을 텐데요. 휴대전화의 액정으로 간단하게 슬픔의 수치가 나타난다면 나는 그대에게 내 슬픔의 수치를 전송할 수 있을 텐데요. 그렇다면 시간 별로 나는 슬픔을 측정하여 캡처해 두었다가 그대에게 편지와 함께 보낼 텐데요.


닥터 Q를 찾아갑니다. 닥터 Q는 사람들의 기억을 수집하고 관리하는 일을 합니다. 한 달에 두서너 번 그를 찾아가서 내 기억을 관리받습니다. 기억에 손상이 갔습니다. 기억이 나약해졌으니 이건 따로 보관해 두겠습니다, 같은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미 제 기억의 9할이 보관이 된 상태입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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