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하고 외롭지 않고서는 글을 쓸 수 없다. 철저하게 외로워야 구석진 곳에서 웅크리고 몇 시간이라도 글을 쓸 수 있다. 고독하고 또 외로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글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고독해야만 하고 외로워야만 한다. 그래야 그 속에 웅크리고 있던 불순물 같은 미미한 그리움이 활자로 그려진다. 외로움을 밀어내기 위해 외로움을 견디기보다는 외로워야만 하기 때문에 외로움을 동반한다. 이런 내가 타인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들과의 관계 역시 조금은 일그러져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떤 면으로 말하자면 외로움에서 벗어나기보다 벗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외로움이란 암 같아서 벗어났다 싶으면 거기에서 또 다른 외로움이 증식하여 삶을 갉아먹는다. 야금야금, 아주 천천히 배추벌레가 잎을 천천히 먹어 치우듯이. 판에 박힌 이야기지만 근원적으로 외롭게 태어나서 외롭게 죽는 것이 인간이다. 외롭지 않다면 사랑하는 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가끔 주위에서 그런 말을 나에게 하는 경우가 있다. 같이 있어도 외롭다고. 같이 있으면, 당연하지만 외로움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 말은 나이 먹기 싫어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피할 수 없다. 그것처럼 외로움 역시 벗어나려고 해 봐야 벗어나는 순간 또 다른 질의 외로움이 피부를 덮을지도 모른다. 외로움을 온몸으로 드러낸 나오코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미도리가 어쩌면 더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가서야 와타나베는 전화 수화기를 들고 그런 미도리의 마음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이건 비단 노르웨이 숲에서만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복잡하고 거미줄 같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고독 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 연령층은 더 어려졌다.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이다. 인파 속에서 고독함이 추위처럼 달려든다. 너무 추워서 몸이 떨리는데 따뜻하게 해 줄 사람 한 명도 없어서 얼어 죽는다. 나오코처럼 이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이다. 이 깜깜한 도시에서 어둠이 내미는 손을 잡는 것이 생생하고 또렷한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쓸쓸하게 죽고 나면 그 방에는 시취가 물처럼 찰랑찰랑 차오른다. 외롭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있다. 그건 사랑이다. 잠이 드는 것도 외롭다. 한 침대에 부부가 같이 들어도 잠은 혼자서 들어야 한다. 시간을 맞춰서 같이 잠이 들 수는 없다. 잠은 외로워야 한다. 외롭게 잠들어 길이보다 깊이 있게 들었다가 일어나야 잠들어 있는 동안 못 보던 가족을 보며 인사를 할 수 있다. 사랑이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잠마저도 우리는 외롭게 들지 못한다. 의식 그 너머에 외로움이 싫어서 시끄럽고 불안한 의식의 방해가 많아서 리추얼이 되지 않아 괴로워하는 이들이 늘었다. 가장 외로워야 하는 건 아픔이다. 아픈 건 누군가 대신 아파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혼자서 외롭게 아픔을 견뎌야 한다. 아이가 아프다고 해서 부모가 대신해 줄 수 없다. 하지만 외로워도 아픔을 견딜 수 있는 건 사랑하는 사람들이 옆에서 간호를 해주기 때문이다. 사랑이다. 내가 외로워서, 외로워야만 해서 할 수밖에 없는 것들은 사랑을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완벽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외로움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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