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오마주



말이 많다는 말은 비교적 듣기 좋은 말이 아닌 경우가 많다. 부장님은 참 말이 많아, 교장 선생님은 말이 많아, 부모님은, 너는, 그 사람은, 뒤에 말이 많다는 말이 나오면 잔소리와 비슷하게 들린다. 하지만 말이 많은데 듣기 싫지 않는 사람도 많다. 거래를 하거나 영업을 따 내야 하는 사람들은 당연하지만 말을 많이 해야 한다. 말을 적게 하면 조직과 개인 모두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말이 많지만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이 많다는 말을 잘하지 않는다.


소설가들도 말이 많다. 따지도 보면 소설가만큼, 글을 쓰는 작가들만큼 말이 많은 사람도 없다. 작가들은 글로써 자신을 표현하고 말한다지만 실제로는 강연을 통해 말을 더 많이 한다. 그러니까 말이 많다.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 태어난 순간 내가 적은 글이라도 그 글은 읽는 독자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건 많은 말을 해서 궁금증을 풀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가들, 작가들이 말이 많지만 그 많은 말이 듣기 좋은 작가가 있고, 또 아 진짜 말이 많군, 흥. 하는 작가도 있다.


많은 말인데 더 해줘요, 하는 작가의 경우 엄청난 말을 쏟아내지만 듣는 이들이 알아듣기 쉽고, 거북하지 않은 속도와 내용 그리고 어려운 말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심플한 클래식을 듣고 있는 착각이 드는 말 많은 작가가 있다. 그중 우리가 좋아하는 작가 김영하 소설가가 있다. 소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김영하의 소설은 나오자마자 날름날름 다 읽었을 것이다. 김영하의 소설 역시 하루키처럼 소설에서 손이 뻗어 나와 나를 데리고 소설 속으로 가버린다. 김영하 소설가는 그동안 강의와 소설이 아닌 책을 출간하다가 근래에 소설이 나왔다. 유튜브에서, 티브이에서 공연장에서 김영하 소설가는 말이 많다. 하지만 더 듣고 싶고 더 많이 해줬음 하는 소설가다.


개인적으로 말을 무척 많이 하는데 역시 더 듣고 싶은 소설가는 원종우다. 원종우는 과학자(라고 해야 할까) 만큼 과학에 대해서 식견이 높으며, 음악가이자 작가인데 그가 펴낸 SF단편소설집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가 너무 재미있었다. 짤막한 단편 소설들로 채워져 있는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작품에 대한 과학적인 이야기와 자신의 의견을 첨부했다. 원종우 역시 방송이나 이런 데서 말이 많다. 하지만 귀에 쏙쏙 들어온다.


소설가만큼 말이 많은 게 시인이다. 시인은 말이 없을 것 같은데 아이러니하게도 말이 많다. 시는 짧지만 시의 세계는 깊고 풍부해서 시인의 입을 통해서 그 세계를 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시인도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군이다.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박준 시인도 말이 많다. 라디오 방송도 하고 있어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의 말은 스며든다. 우리는 스펀지가 되어 박준 시인의 말을 흡수한다.


그러고 보면 책을 펴내는 인문학자, 책을 펴내는 자기 개발서 작가, 책을 펴내는 철학가, 책을 펴내는 사진가와 평론가 등 책을 내는 사람들은 다 말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모두의 많은 말이 다 듣기에 괜찮지는 않다. 말 많은 소설가 중에서도 어쩐지 듣기 싫은 소설가도 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말속에 우쭐함이 묻어 있어서 나와 너는 다르며 나는 너보다 조금 위에 있다는 분위기를 가지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이 많은 말을 하면 듣기가 싫다.


또 반면에 배우들은 영상 속에서 끊임없이 말을 하는데 실제로는 입을 꾹 다물고 열지 않는 사람도 있다. 코미디언들 역시 말이 아주 많을 것 같은데 현실에서는 또 말이 별로 없는 사람도 있다. 세상은 아이러니해서 소설가는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글만 쓸 것 같은데 말을 더 많이 할 때도 있다. 시인 역시 그렇고 철학가들 역시 그렇다.


하루키도 말이 많다. 과묵하기만 할 줄 알았던 하루키 역시 말은 많다. 참 말이 많네, 가 아니다. 하루키도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또는 이전에 연설문을 통해 많은 말을 했다. 하루키는 분명 이 시대의 가장 영향력이 있고, 화제의 인물이며 이례적으로 펴낸 소설들이 엄청난 판매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하는 말속에 어려운 단어나 힘든 말은 없다. 그리고 애써 풀어서 말을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일상을 이야기하듯이 말을 할 뿐이다. 그건 아무래도 자동차보다는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지방으로 여행을 가서 그곳의 현지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시간을 보낸 탓일지도 모른다. 문학적인 문체가 있겠지만 말을 할 때에는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서 사람들과 소통을 한다.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소설가, 작가의 특성상 대부분 일상적인 언어로 사람들과 소통을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작가들도 많다. 그런 작가들은 안하무인격으로 일방도로 같은 면모를 보이다가 시간이 지나면 독자들과 언쟁을 높이고 싸우기까지 한다. 자신은 독자들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말을 통해서 알리려 든다.


유튜브에서 가끔 책 읽어주는 영상을 틀어 놓는 편인데 하루키의 에세이를 낭독하는 유튜버 중 그저 책만 읽어주면 되는데 낭독하는 이의 달리기 경험을 하루키의 조깅과 맞물려서 흡사하게 말을 한다. 하루키는 4 반세기를 매일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런 사람과 고작 1년 정도, 그것도 일주일 내내 달린 것도 아닌데 마치 자신과 하루키가 동일선상에 있는 듯한 느낌으로 많은 말을 한다. 조깅은 –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멋진 몸이나 날씬한 몸은 신기루 같은 것이다. 조깅도 그렇다. 지나고 나면 그런 멋진 몸은 금방 사라진다. 그래서 매일 해줘야 유지가 된다. 조깅이 그런 것이다. 작년에 매일 달렸더라도 그걸 머릿속에서 없애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매몰되어 버려 지금도 내가 계속 조깅을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전문 운동선수들을 보면 알 수 있다. 20년 넘게 하루에 8시간씩 운동을 했더라도 은퇴를 하고 1년만 운동을 끊고 잘 먹고 잘 쉬면 살이 쉽게 찐다. 인간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는 겸손해야 한다.


오래전 릴케도 말을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21살의 릴케는 37살 루를 만나 사랑과 죽음 그 이외의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오직 죽음 아니면 루에 대한 사랑을 말했던 릴케. 그리고 많은 말로도 모자라는 자신의 사랑은 시로 표현했다. 무명 시인이었던 릴케는 이미 명성이 자자한 루 살로메에게 매료되었다. 릴케의 구애가 장미와 편지를 통해 끝없이 이어졌다. 루 살로메는 당대 최고의 인물들을 매혹시켰다. 니체의 연인이기도 했고 프로이트의 연인이기도 했다. 루는 릴케의 애틋함을 1928년에 ‘릴케’를 펴내기도 했다. 릴케의 구애를 받아들여 두 사람은 뮌헨의 몽마르트 방갈로에서 한 달을 같이 보냈다. 그곳으로 달려간 전혜린은 두 사람이 머물렀던 곳을 [이 전나무 숲은 몇백 년 된 듯한 거대한 수목이 빽빽하게 서 있어서 낮에도 굴속같이 캄캄하고 보이는 것은 매끈하고 곧게 솟은 전나무의 줄기들뿐이었다. 어두운 때문인지 지면은 이끼로 덮여 있었고, 그 이끼도 몹시 두껍고 보드러웠으며, 검은 초록빛이었다. 어둠 속을 잘 보면 그 이끼 위에 오랑캐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였고 오랑캐꽃을 특별히 좋아하는 나는 미친 듯이 달려가서 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었다. 유난히 짙은 보랏빛이었고 꽃송이가 크고 꽃줄기가 굵고 길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라고 했다. 주위에는 백화 나무가 꽉 차게 서 있고, 그 풀밭 위로 릴케와 루는 맨발로 걸어 다녔다고 한다. 빵과 야채와 달걀만으로 살았다고 한다. 사랑은 그 모든 걸 가능케 했다. 릴케의 가장 찬란한 시가 루를 만났을 때 나왔다. ‘너는 위대한 여명’이나 ‘내 눈의 빛을 꺼다오’ 같은 시가 루와 함께 일 때 나왔다.


루 역시 릴케에게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 없어.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 또 우리들 마당의 돌담의 이끼 낀 틈에서 피어 나오는 새파란 오랑캐꽃의 무리... 이런 것들이 가장 사실적인 것, 알아야 하는 것, 반드시 체험해야 하는 것이야....]라는 글을 써서 줬다. 장소가 주는 기묘함 때문인지 릴케는 그 속에서 사랑하는 루와 함께 하며 사랑과 죽음 그 외에는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너는 밤과 시간의 뒤에 우는 닭소리다. 너는 이슬이다. 아침 미사다. 소녀다. 낯 모르는 남자다. 어머니다. 죽음이다] 릴케는 루에게 이렇게 말했다. 릴케는 이곳에서 루에게 아주 많은 말을 쏟아냈을 것이다.


근래에는 나도 말을 많이 하게 되었다. 나의 불안에 대해서, 나의 불안함 때문에, 나의 불안한 형태에 대해서, 근원적인 불안,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은 불안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은 못 했지만 불안에 대해서 많은 말을 들어주는 이에게 하게 되었다. 그건 나에게 있어 아주 기묘한 일이며 특별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내 속의 불안에 대해서, 불안이 있다, 라며 말을 꺼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끄집어내게 되면 막혀 있는 속이 뚫리는 것처럼 조금은 시원해진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을 해본 적이 언제였을까. 인간은 대체로 솔직하게 말하거나 마음을 내보이지 않는다. 가족일수록 가족의 속 마음은 더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에 사춘기에 접어들면 부모님보다는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등잔 밑이 어둡고 촛불의 가장 어두운 부분의 이야기가 괜한 말은 아니다.


불안은 직설적이고 구체적인 불안이 있고 그 위에 거대한 근원적인 불안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불안은 확대되고 확장할 뿐이지 축소되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두려움이 몰려오고 불안해진다. 이 행복의 끝이 이미 두렵다. 행복은 늘 추상을 달고 온다. 짧고 얕고 찰나적이다. 그런 찰나를 계속 만들어서 이어 붙어야 하는데 그런 삶은 지치게 된다. 한 번 주저앉으면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행복하기보다 덜 불행하기는 바라는 나에게 이 추상적이며 기이한 행복이라는 것이 근래에는 잦아졌다.


어제는 유튜브를 통해 100년 전의 한국어 육성을 원본으로 들었다. 일제강점기였다. 한국말을 못 쓰게 하는 일본의 만행이 이어지는 가운데 어린이들이 우리나라 말을 많이 하고 싶어서 한국말을 배우는 것을 들었다. 또박또박한 소리로, 소나무, 그 모자, 저 보자기,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어서 이리 오너라, 나비 나비 오너라, 노자 노자 나하고. 그저 말을 하고 싶어서 한국어를 할 뿐인데 듣고 있으니 뭉클했다. 소설가들이 말이 많은 이유는 글로 다 못한 이야기를 보충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말이 많다는 말을 들을지라도 말을 해야 한다면 가만히 있기보다 말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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