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뷰가 좋은 카페에 간다. 카페에 앉아서 바다 뷰, 도심지 뷰, 또는 논 뷰 등 탁 트인 경치를 바라보는 카페를 좋아한다. 그런데 내가 가는 카페는 골목에 있는 아주 작은 카페로 창문으로 오래되고 단단한 골목의 벽이 보인다. 나는 벽 뷰를 좋아한다. 앞이 딱 막힌 벽을 보는 게 좋다. 벽은 마치 나에게, 푸른 하늘이 보고 싶어? 하지만 볼 수 없어.라고 하는 것만 같다. 아직 계절의 추위가 사람들의 옷깃에 매달려 카페로 딸려 들어온다. 그 느낌을 받으며 벽을 멍하게 보고 있으면 벽이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의 피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페에는 책이 있다. 나는 그 책을 뽑아 들었다. 어제도 읽었고 오늘도 읽는다. 제목이 벽 속의 다른 벽이다. 벽을 깨고 싶어 하는 벽의 이야기다. 초현실이며, 극사실주의에다가 온통 은유로 가득한 모호한 책이다. 모더니즘을 깨는 이야기다. 해체에 가깝다. 형식과 틀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다. 그래서 어렵다. 인간도 단단한 벽을 두르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벽이 더 완고해진다. 그러다 보면 도저히 깰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카페에 앉아서 벽을 보는 건 좋다. 골목의 벽은 봄이 되면 벽과 벽 사이에서 생명의 태동을 볼 수 있다. 녹색의 그것들이 고개를 들고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면 벽을 보는 재미가 최고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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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봄눈이 떨어지고, 얼굴을 건드리는 바람이 기분 좋아질 것 같다. 여기는 다른 지역보다 이른 벚꽃의 만개를 본다. 해가 붉은 깃의 꽁지를 달고 하루를 달에게 반납하고 나면 팡이 팡이 열린 봄송이가 그림처럼 펼쳐서 초현실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러나 만개한 벚꽃을 보는 건 너무 아름다워서 슬프다. 벚꽃과 불꽃은 닮았다. 불꽃과 벚꽃은 찰나적이다. 오직 우리 의식에 지워지지 않는 점을 찍는다고 김혜리 기자도 말했다. 완성의 순간 수십만 개의 소멸로 흩어진다. 절정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벚꽃의 만개와 꼬리를 흔들며 비명을 지르며 올라 한 지점에서 터지는 불꽃은 무섭도록 닮았다.


불꽃의 색이나 형태는 잊어버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보는 것이다. 불꽃놀이하는 날 누구와 보냈는지 만큼은 계속 생각나서 추억이 되니까. 불꽃은 금방 사라져 버리지만 추억은 영원하니까. 벚꽃 역시 그러하다. 그리하여 너무 아름다워서 슬프다. 세상에는 그런 기묘한 것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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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4개월 동안 끊었던 

찌개와 마요네즈를 듬뿍 먹었습니다. 

반찌개세력의 밥상 장악, 

브로콜리의 식당장악 시도, 

채소폭거 등 

세계에서 콜레스테롤을 몰아내려는 

파쇼행위에 대한 상황을 

알리기 위한 대국민 호소에, 

저는 개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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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에도 슬픈 라면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어쩌면 라면은 너무 맛있어서 슬픈 음식일지 모릅니다.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라면은 슬픈 음식입니다. 상우와 은수의 첫날밤의 팡파르는 라면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소주와 몹시 어울리는 라면은 금세 식어버리지만, 또 금방 끓어오릅니다.


상우와 은수는 그 뜨거운 사랑을 합니다. 화분의 꽃이 더디게 피듯 상우의 시간은 차근차근 흘러가지만, 은수의 시간은 라면처럼 빠르게 끓어오릅니다.


후루룩 입으로 빨려 올라오는 라면은 어느 순간 바닥을 보이는 냄비의 허무를 나타냅니다. “라면이나 끓여” 은수의 말에 이제 상우는 고작 라면이나 끓이는 놈이 되어버렸습니다.


누군가와 마주하고 먹으면 더없이 행복한 라면이지만 혼자 먹으면 더 맛있기에 라면은 슬픈 음식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끓이는 라면은 슬픕니다.


결국 상우는 은수에게 “내가 라면으로 보이냐고!” 소리를 지릅니다. 라면은 그렇게 슬픕니다.

   

라면이 끓어오르면 비로소 외로움과 마주하게 됩니다. 스프를 넣고 팔팔 끓일수록 자극은 극에 달합니다. 라면은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젓가락으로 자꾸 휘젓게 됩니다.


몸부림을 바라는 라면은 외로워서 슬픈 음식입니다. 라면의 많아진 종류만큼 슬픔도 전부 제각각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라면을 마주하며 슬픔을 젓가락질합니다.


그대에게 닿지 않을 거라는 걸 압니다. 그래도 또 편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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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나미 레이 좋아해?

에반게리온에서는 역시 아야나미 레이지, 제일 딱하고, 안타깝고, 차갑게 불타오르고, 강하고, 냉철하고, 부드러운 말도 안 되게 예쁜 캐릭터.

집에 있는 아야나미 레이 피규어 이거 한 17년 정도 된 것 같다.

에반게리온 파에서 ‘날개를 주세요’가 나올 때 소름 돋았지. 마지막 장면, 신지가 인류를 포기하고 오직 레이를 구하기 위해 야수화 되어서 사도의 코어에 갇혀 죽어가는 레이를 꺼낼 때 흘러나오는 노래.

에반게리온 파는 당황스러운데 행복하다. 이 노래는 1970년에 나온 노래로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아야나미 레이의 성우가 직접 부른 버전이다.

당시 음정이 불안해서 호불호가 갈렸다. 스튜디오에서 확실하게 녹음한 버전이 있었지만 데모버전에서 불안한 음정으로 부른 버전을 안노 감독이 채택했다.

장면과 노래는 기이하게 행복한데 슬프고, 닿았는데 닿을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신지는 레이라 부르지 않고 끝끝내 아야나미라고 부르고 인류는 대재앙을 맞이한다.

마치 이 노래를 삽입하게 위해 그동안의 에반게리온을 깡그리 뭉개고 ‘파’를 만들었나 싶을 정도다. 행복하지만 슬픈 느낌의 노래다브런치 글 이미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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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wBfbldZpcDc?si=oNEX2gvyL4kHIEc5



아스카 랑그레이는 좋아하지¿


에반게리온에서 아야나미 레이는 감정을 소거하고 이성으로만 사람을 대하니까, 이성만 표출하는 겐도는 상대하기 쉬운데, 감정을 드러내는 신지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그런 점에서 레이는 표층적이라면 아스카 랑그레이는 심층적일지도.


아스카는 겉으로는 밝음을 넘어 되바라지고 지기 싫어하고 직언 폭탄에, 좋아하는 건 바로 표출해서 표층적일 것 같지만 신지만큼 복잡한 심층 세계를 가지고 있다. 아스카의 엄마 역시 에반게리온의 코어에 영혼이 녹아있다.


에반게리온은 끝으로 도달할수록 아스카가 점점 돋보인다. 아스카 피규어는 반다이 조립 버전이 최고인 것 같다. 슈트도 주황색이 가미된, 어디더라? 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인가? 거기서 테스트용으로 입은 슈트 버전이다.


붉은 슈트 버전에 비해서 몹시, 아주 섹시하다. 그건 안노 감독이 최대한 섹시한 아스카의 피규어가 나올 수 있도록 제작을 했기 때문이다. 애니의 캐릭터 피규어는 예전 밍키 때부터 사활을 걸었다. 퍼스트 건담의 모빌슈트가 지금도 미친 듯이 팔려나가는 걸 보면 피규어의 세계는 엄청나고 또 엄청나고 자꾸 엄청나다.


아스카는 초기 티브이 버전의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가 있고, 극장판의 시키나미 아스카 랑그레이가 있다. 에반게리온이 언젠가는 영화가 되어 나올 텐데 아스카를 누가 할 것인가. https://youtu.be/6Ovpl2423gg?si=tKExJu2CPEtaEMT1



그리고 네르프 공식 업무용 쿠페가 나에게 미니카로 있다. 에반게리온 속에서는 붉은 줄이 있는데 내 미니카에는 없다. 온통 하얀색의 쿠페로 차문까지 열리는 엄청 오래된 미니카다. 에반게리온 이전에는 울트라맨의 MAT 비클이었던 쿠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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