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자기 계발서를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근데 앞으로도 읽을 생각이 없고, 읽을 계획도 없다. 책을 추천해 달라는 요구를 가끔 받는데 사람들에게 자기 계발서를 권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뭔지 몰라서 권할 수가 없다.


자기 계발서를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는 말에 어떤 댓글이 달렸는데 그건 소개하지 않기로 한다. 소설책 읽는 시간도 촉박한데 자기 계발서까지 읽을 시간도 없을뿐더러, 중요한 건 소설만으로도 자기 계발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현명해지려면 자기 계발서는 필수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말 그 말이 맞는다면 나는 현명해지지 않겠다. 자기 계발서를 읽어야만 자기 자신을 계발할 정도로 믿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소설이나 인문학으로도 자기 계발은 저 먼 우주까지 끌어올리지 않을까 싶다.


좀 다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인간은 편하고자 기계를 만들었는데 – 그 기계 속에는 휴대전화도 포함이 되는데 지금은 사람이 기계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현재 우리는 휴대전화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용한 인간이 되었다. 휴대전화가 없이는 음식도 배달하지 못해서 먹지 못하며, 어딘가로 가지도 못하고, 누군가를 만나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면서 휴대전화로 휴일에 연락이 오는 회사 상사 때문에 휴대전화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 휴대전화가 없으면 불안해한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리면 정마 큰일이 나는 것이다. 예전에는 만취에 지갑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일어났지만 요즘은 만취에 휴대전화를 잃어버리게 되면 다음 날 맨탈의 붕괴를 막을 수가 없다. 그 엄청난 불안이 온몸을, 온 마음을 잡아먹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깜깜해진다.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인데, 기계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기계와 좀 더 동 떨어진 책이 소설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그렇다. 날아다니는 상상력, 물속에서 물고기처럼 유영을 하는 상상력, 이런 상상이 비행기를 만들고, 잠수함을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인공지능이 발달해 가는 이 시대에 영화 시나리오도, 시도, 소설도 인공지능이 써버리게 될 것이다. 하물며 자기 계발서 역시 인공지능이 쓰고 그걸 인간이 자기 계발을 하는데 사용한다면 이 역시 기계에 인간이 지배당하는 꼴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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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막스의 노래가 오전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리처드 막스의 노래를 들으며 계란말이를 먹고 있으니 학창 시절이 생각난다. 이렇게 파가 속속 박혀 있는 계란말이가 도시락 반찬으로 들어 있을 때는 친구들의 젓가락이 우르르 오기 때문에 경계대상이었다.


계란말이가 다 맛있지는 않았다. 파가 들어간 계란말이의 맛에 한 번 빠지고 나면 파가 들어가지 않으면 그렇게 맛있지 않았다. 그저 계란만으로 계란말이를 하면 맛이 덜 했다. 퍽퍽한 계란말이가 시간이 지나 말라서 도시락 반찬으로 있으면 친구들 젓가락도 오지 않았다.


계란말이는 식어도 맛있는데 그건 파가 들어야 맛이 났다. 파는 촉촉함을 유지시켜 준다고 해야 할까. 그냥 계란만으로 만든 계란말이보다 파가 들어가면 이렇게나 맛있었다. 기억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계란말이도 참 기묘한 음식이라 집집마다 맛이 달랐다.


어떤 집 엄마의 계란말이는 맛이라는 게 전혀 나지 않았고, 어떤 집 엄마의 계란말이는 치즈가 같이 녹아 있어서 아주 맛있었다. 어떤 집는 몹시 짰는데 그게 엄마의 계획이었다. 짜니까 다른 친구들이 먹지 않을 테고 밥을 많이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정장 그 집 아들도 못 먹을 지경이었다.


계란을 매일매일 먹는데 질리지 않는다. 이런 음식이 또 있을까. 계란은 다양한 요리로 먹을 수 있기에 가능하다. 아침에 날 계란에 참기름 한 방울 떨어트려 먹는 맛이 있고, 계란 프라이는 말해 뭐 하고, 계란찜으로 먹는 맛 역시 좋다. 라면에 넣어 먹어도 맛있고, 두부에 계란 옷을 입혀서 먹어도 맛있다. 맛에서 멀어지지 않는 게 계란이다. 그중에 계란말이는 맛 중의 맛이다.


계란은 한때 품귀현상으로 가격이 올라 수입까지 해 오는 경우가 얼마 전에 있었다. 우리는 한낱 계란에서 위로를 얻는다. 오전에 아파트 복도에 계란 프라이 냄새가 퍼지면 정말 정신이 혼미하다. 그 오전이 일요일이라면 어느 정도 방어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지만 평일의 아침이라면 ㅁ 벙비상태라 냄새에 무너지고 만다.


계란은 현재진행형이지만 이상하게도 늘 추억의 음식이다. 요네하라 마리도 ‘미식 견문록’에서 ‘아버지가 삶은 달걀 껍질을 까주신다. 내가 하나를 먹으면 또 하나를 까주신다. 아, 얼마나 행복한지. 그 달걀도 홀랑 입속으로 넣는다’고 했다. 달랑 두 줄인데 요네하라 마리의 글 속에는 미소를 짓게 만드는 위트와 추억이 있다. 계란은 우리에게 그런 음식이다.



Richard Marx - Endless Summer Nights https://youtu.be/1NvsMKYgCsM?si=enLi5cGOkFu7wF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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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구름이야ㅋㅋㅋ


역대급이라는 말이 싫다


오늘도 어김없이 일기예보 뉴스에는 역대급이라는 단어가 떴다. 역대급 더위, 역대급 홍수, 역대급을 안 갖다 붙이면 이젠 기사를 내보낼 수 없는 지경이다. 그놈의 역대급이라는 말이 없으면 이젠 아무것도 내보낼 수 없는 모양이다.


역대급이라는 말이 세상에 나온 뒤 매년 여름이 되면 역대급 가뭄이라는 기사가 내가 사는 도시에도 늘 떴다. 나는 매일 강변을 조깅하는데 역대급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가뭄이면 강이 말라서 강바닥 정도는 보여야 하지 않나. 그러나 태화강이 바닥을 보인 적은 한 번도 못 봤다. 가뭄이 심했을 때에도 태화강은 늘 적정 수위로 잘 흘러갔다.


도대체 그놈의 역대급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나. 작년에 역대급 센 놈이 왔으면 올해는 역대급보다 더 한 표현을 써야지. 티브이 예능에서도 이건 역대급이야, 같은 말을 한다. 듣기가 아주 싫다.


예전에 ‘니마이’라는 말이 유튜브 속 개그맨들에게 유행처럼 떠돌았다. 말 끝마다 니마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치 내가 이런 유행어를 만들어 내고 유행시키는 사람이야,라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듣기 싫은 말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니마이’라는 말을 썼다. 물론 안 쓰는 개그맨들도 많았다. 그때 니마이를 입에 달고 유튜브를 하는 개그맨(개그우먼 포함)들은 너네들은 어떤 일정한 수준은 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원하는 공중파 출연이나 유튜브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는 그 생각처럼 되었다. 그런 ‘니마이’ 같은 유행어를 입에 달고 지내는 개그맨, 개그우먼들보다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러 프로그램에서 활약 중이다.


또 듣기 싫은 말이 해리티지다. 문화유산을 말하는 단언데 언젠가부터 시계에 붙기 시작하면서 티브이 광고에서도 해리티지 타령이다. 롤렉스에 해리티지라는 말이 붙기 시작하더니 이 해리티지라는 단어가 좋은지 여기저기서 갖다 쓰고 있다.


해리티지라는 단어를 입에서 사용하는 사람 역시 이 단어를 이때에 이 발음으로 해야겠다는 의지 같은 게 엿보여서 참 별로다. 적당한 곳에서 적당히 사용되어야 해리티지라는 말도 듣기가 좋을 텐데 난무의 범위에 들어서게 되면 정말 듣기 싫은 단어가 된다.


롤렉스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가진 거 개뿔도 없으면 롤렉스에는 왜 그렇게 미쳐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 시계 하나가 너를 결정짓는 것도 아닌데, 여유가 되고 롤렉스가 어울리는 사람이 있겠지만 생활 때문에 끙끙거리면서 롤렉스를 차고 다니는 것은 도대체 뭐야.


45년 차 시계장인이 롤렉스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https://youtu.be/qTkIHsSrhOQ?si=H0_-cH1KjsHVnU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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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봤을 때 나만 그런지 몰라도 안야 테일러 조이의 목소리가 9년 전 분노의 도로에서 퓨리오사였던 샤를리즈 테론의 목소리 같아서 좀 놀랐다.

그때 영화의 뒷 이야기를 하자면 톰 하디 이 새끼가 항상 지각이라고 한다. 지각도 몇 시간 정도 늦는 게 아니라 8시간씩 막 그렇게 늦게 와서도 나한테 시비 걸지 마 찌발 같은 태도였다고. 그래서 샤를리즈 테론과 사이가 참 별로였다네. 영화 촬영 할 때만 빼고는 같이 있지도 않았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밀러가 피를 갈아서 영화를 만들어서 그런지 와 정말 재미있었다. 보면서 인간의 뇌에서 나올 수 있는 서번트는 다 나온 것 같았다. 아드레날린, 도파민, 아세틸콜린 같은 물질이 쥘쥘 흘렀다.

그에 비해 이번 퓨리오사는 분노의 도로만큼 뇌에서 분비물이 수돗물처럼 나오지는 않는다. 이 생 날 것의 추격전이 분노의 도로를 꽉 채웠던 만큼 퓨리오사에서는 덜 해서 그런지 분노의 도로와 비교될 수밖에 없다.

이번 퓨리오사는 퓨리오사의 캐릭터에 초점이 많이 가 있어서 그런지 몸이 들썩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밀러는 나처럼 이렇게 영화를 찍으면 환장하게 될 걸,라고 여실히 보여주었다.

액션씬만큼은 눈을 뗄 수 없었다. 또 언제 매드맥스 후속 편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임모탄 버전은 안 나오나. 임모탄이 개 양아치 같은 리더인 줄 알았는데 인간미가 흐르는 그런 캐릭터잖아.

매드맥스 하면 1편인가, 80년대 세상이 망하고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빌런을 전부 박살 내는 멜 깁슨의 액션이 정말 좋았다. 초초초 저예산으로 카체이싱 액션신을 이렇게 담아냈다니.

퓨리오사는 인간미를 버려야 했다. 인간미를 발휘하다는 엄마처럼, 잭처럼 될 수 있다. 퓨리오사의 전사로의 성장통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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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죽음에 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떻게 사는 것 못지않게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은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죽게 만든다. 하야오는 전쟁에 대한 무서움을 알고 있기에 바람이 분다,에서도 이 영화에서도 전쟁을 일으키는 자신의 나라에 대한 비판을 가득 담고 있다.

아직 어린 히미가 미래의 마히토를 만나 “너를 낳는 건 멋진 일이잖아”라고 말한다. 비록 히미 자신이 죽을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히토를 낳겠다는 심정으로 우리가 이 땅에 이렇게 태어났다.

그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는 존재가 없다. 할머니들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오늘 나온 통조림을 보며 기뻐하고 음식에 열의를 보인다. 내일 죽을지라도 오늘을 열심히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반복의 순환이 모여 역사를 이룬다.

지구본은 돌아가고 우리는 그 지구본을 열심히 돌려야 한다. 영화의 모든 장면이 전부 열려 있다. 보는 이들이 보는 대로 생각하면 그게 장면 장면이 말하는 의미이자 어떻게 살 것인가 못지않게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이게 뭐지? 난해하고 이상한데?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삶의 의미일 수 있다. 우리의 삶 역시 정확하게 정해진 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고 이상하기만 한 것이 우리의 삶이다. 죽 불행하다가도 한 번 행복함에 우리는 그때 웃기도 한다.

히미처럼, 실수하더라도 그리하여 목숨마저 잃을지라도 마히토를 다시 낳겠다는 것처럼 그 실수가 실패는 아니기에 우리는 두 발로 바닥을 딱 버티며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하야오가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한 원작 소설을 가져온 이유는 전쟁 속에서도 생명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생명은 계속 이어져야 하며 죽음이라는 건 삶의 대극이 아니라 한 부분이라는 걸 히미와 마히토를 빌어 절실히 말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야오가 팔순이라 더없이 순수하고 아름답게 보였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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