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보다 더 재미있게 본 것 같다. 원작에서는 배우들의 정보를 모르니까 그냥저냥 재미있게 봤는데 한국 버전은 배우들을 아니까 오홋 하면서 보게 되었다.

공승연이 망가지니 웃음이 막 나온다. 공승연이 망가졌을 때 재미있었는데 망가짐이 너무 빨리 끝나서 아쉬웠다. 공승연이 핸섬가이즈 오퐈들을 보며 더 사납게 욕하고 난리 피웠어야 했는데 몹시 아쉽다.

클리셰 떡밥을 보여주는 것도 괜찮았다. 신나 넣은 피티병이나, 기름이 줄줄 새는 걸 먼저 보여준다거나, 곡괭이가 떨어진다거나. 그러면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을 하면서도 그 무슨 일이 무시무시한데 코믹을 장착하고 있어서 재미있다.

고어적인 장면은 좀 더 고어적이게 넣었어도 좋았겠다 싶다. 하우스 오브 왁스에서 패리스 힐튼이 이 영화에서 정화가 죽는 것처럼 죽는데 지금 봐도 와우! 끔찍하면서 작살나게 죽는다. 정화는 가장 먼저 오컬트의 노예가 되었는데 친구에게 염소눈알 전염시킨 다음에 왜 다시 나타나지 않았을까.

영화는 두 주인공이 웃음을 주는 게 아니라 두 주인공 외의 사람들에게 웃음을 유발하게 한다. 아무래도 그렇게 연기하는 게 쉽지 않은데 두 사람이라 그게 가능했지 싶다. 박지환이 좀비로 깨어났을 때 그 기괴한 뒤틀림은 분명 웃음 포인트다. 나는 박지환의 좀비행동이 예전의 무한도전에서 일반인들이 나왔을 때 태권도하는 여성 대학생을 보는 것 같아서 웃음이 팍 나왔다. 그때 무표정에 신데렐라 신데렐라 노래에 맞춰서 품새를 하는데 박지환이 좀비가 되어서 꼭 그러는 것 같았다 큭큭.

핸섬가이즈는 원작을 리메이크했지만 곡성과 범죄도시를 코믹하게 섞어 놓은 것 같은 영화다. 예전의 영화로 치면 총알탄 사나이와 무서운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서 반가웠던 ‘핸섬가이즈’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여름이 지나간다


올여름도 조깅 덕분인지 에어컨 없이 선풍기만으로도 밤을 보냈다. 수요일부터 폭염이 칼로 싹둑 자르듯 잘려 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수요일까지는 조깅을 하면 땀이 잘 나지 않는 정강이에서도 땀이 퐁퐁 솟아났다. 지금도 조깅을 하면 땀이 엄청나지만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있다.


저녁의 강변에 부는 바람은 여름을 장식했던 한 여름의 바람이 아니다. 저녁에는 꺼져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는 매미소리와 귀뚤이 소리가 동시에 들려온다. 이런 자연에 대고 신비하다고 계속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거의 매일 한 시간 반 정도 조깅을 하고 있는데 마음 같아서는 한 시간 반 내내 미친 듯이 달리고 싶지만 조금씩 거리와 속도가 줄어들어가고 있다. 이제는 온전한 조깅보다는 중간중간 몸 푸는 곳에서 근력 운동에 좀 더 집중을 해야 할까 싶다. 코로나 이전만 해도 여름이면 12킬로미터 정도를 달리고 나서 흠뻑 젖은 몸으로 상쾌함을 느꼈다. 이제는 그렇게 달리지 못하는 게 별로다.


여름에 조깅을 하면 체온이 엄청 오르기 때문에 밤에 부는 덥덥한 바람도 시원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찬물로 샤워를 하고 선풍기 바람만으로도 선선한 밤을 보낼 수 있다. 너무나 더운 열대야라면 에어컨을 가장 약한 바람의 27도로 맞춰놓아도 시원하다. 평소에 땀이 나면, 땀이라는 게 찝찝한 영역에 속하는 물질인데 조깅을 할 때 흘리는 땀의 느낌은 정말 좋다. 정강이, 귀 안에서도 땀이 흘러서 나오는데, 이런 건 짜릿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이때의 땀은 대체로 수분이라 짭짭한 맛도 별로 없다.


얼마 전에 션이 조깅 때문에 발톱이 여섯 개 빠진 기사를 봤다. 션만큼 긴 거리를 달리지는 않지만 매일 달리는 덕분인지, 요즘 같은 이런 무더운 날에 조깅을 해서 인지 나도 발톱 두 개가 신호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조깅을 멈출 수는 없다. 숨이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숨이 잘 쉬어지는 기묘한 경험을 하는 거다.


강변은 매일 달리면 마주치는 사람도 매일 비슷한데 다르고, 계절의 변화도 오감을 통해 보고 느낄 수 있다. 매일 보는 구름이지만 매일 다르다. 매일 사진을 담아서 인스타 스토리에 올리고 있다. 여름이 되면 구청에서 강변의 벌초를 해 놓아서 풀냄새가 확 나는데 그 냄새를 맡으며 달리는 게 좋다.


슬슬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오늘도 무척이나 무덥지만 하늘은 가을 하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친구라고는 5살 유키(이름이 생각 안 나서 그냥 유키로) 밖에 없는 유학생 송은 어느 날 학교 계단을 내려가다가 시바사키 고교 축제를 준비하던 밴드는 송에게 보컬제안을 한다. 일어가 서툰 송은 그래, 오케이, 하이 라며 승낙을 하고 나중에 보니 자신이 보컬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에 무리라고 한다.


하지만 어떻게든 블루하트로 축제에서 노래를 성공시키고픈 밴드 멤버들. 밴드는 전설의 록 그룹인 블루하츠의 ‘린다 린다 린다’를 성공적으로 부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드럼의 쿄코, 밴드의 리더이자 까칠한 기타의 케이, 음식을 하면 짜게 만들지만 실력 좋은 베이스의 노조미. 그리고 보컬의 한국 유학생 송. 이들은 밴드 연습 할 수 있는 공간에 모이는 것조차 힘들다.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다 모이면 다른 밴드에게 내줘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떻게든 연습을 이어간다.


모두가 떠난 밤에 조용한 고양이처럼 노래를 부르고 연습을 하다가 현타가 온다. 이렇게 한다고? 하면서. 이 아이들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드는 건 좌절하지 않는다. 그냥 그러려니 하며 힘든 과정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특히 배두나, 카시이 유우의 송과 케이가 밤새고 세수를 하러 후반부에 화장실에서 송은 한국말로, 케이는 일본말로 잘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마음이 통하면 각자 내뱉는 나라의 언어로도 마음이 통한다는 걸 보여준다.


이들의 밴드 연습실에는 마를린 맨슨, 버브의 애쉬 크로포드, 오아시스, 레드 재플린 같은 록밴드의 사진들이 죽 걸려있는데 그런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이 영화에는 초현실 장면이 나온다. 꿈을 꾸는 장면인데 그런 장면이 좋다.


마지막 늦어버린 축제 밴드 무대에 시궁창 쥐처럼 비를 쫄딱 맞고 맨발로 무대에 오른다. 학교 아이들은 지칠 대로 지쳐서 무대를 본다. 송은 연습을 많이 했지만 너무나 떨린다. 그래서 자신들을 소개할 때 “파란 마음 데스”라고 해버린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린다린다린다를 외칠 때 학교 아이들이 전부 일어나서 떼창을 한다. 신난다 야호다.


가사는 파란 마음 밴드부 아이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틀어진 관계, 서먹한 관계, 어긋한 관계, 힘든 관계를 풀어 버리듯 송은 노래하고 밴드는 연주를 한다. 영화는 청춘 성장물이다. 성장 영화는 대체로 재미있다. 몇 번을 봐도 좋다.


블루하츠는 87년에 결성되어 95년까지 활동한 일본의 펑크 락 밴드다. 우리나라의 크라잉 넛, 천조국의 그린데이가 펑크 락을 미친 듯이 했었다. 크라잉 넛은 현재진행형이다. 블루하츠의 보컬은 공연에서 늘 이상한 표정을 짓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유는 락을 하는 사람은 멋진 사람이 아닌 나 같은 이상한 놈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전부 일본 인으로 밴드구성을 했는데 감독인 야마시타가 설정을 보컬은 유학생으로 하자고 해서 배두나를 섭외했다고 한다. 이런 설정 때문에 마츠야마 켄이치가 송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재미있다.


소각장에 가면 너를 마주치기 때문에 늘 소각장에 너를 보러 갔다며 마츠야마가 어설픈 한국어로 말을 하고, 송은 아, 아, 하다가 한국말로 빠르게 말을 휙 해버리는 장면들. 사랑고백에 소각장이 나오는 것은 청춘 영화밖에 없을 테니까.


밝은 영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다. 그 이유는 노래를 연습할 수 있는 친구들이, 일본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5살 유키가 학교 축제에서 송에게 너 친구가 있네?라고 할 때 송이 무심하게 응 하는데 좋은 장면이다. 파란 마음과 함께 공연 준비를 하고 싶다면 봐도 좋을 ‘린다 린다 린다’였다.



파란마음의 린다 린다 린다 https://youtu.be/R110dpl_5Fc?si=H9FKiz_ydcA3cPq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가 사는 곳은 바닷가이고 거대한 회사가 있어서 외국인 기술자들 때문에 외국인들이 가족단위로 많이 살고 있다. 그리고 100퍼센트라고 해도 될 만큼 전부 강아지들을 키우고 있다. 그들은 보통 하루에 두 번 이상 강아지들을 산책시키는 거 같다.


여름의 쉬는 날에는 바닷가에서 고등어구이처럼 태양 밑에서 몸을 이리저리 태우며 소설을 읽곤 한다. 그러다가 몸이 스리랑카 사람들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타면 일행과 함께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와 샌드위치 같은 걸 먹는 걸 좋아한다. 날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외국인들도 많이 나와서 썬텐을 즐기고 있다. 그들은 몸이 뚱뚱하거나 맞는 수영복 따위가 없어도 별로 개의치 않고 썬텐을 즐긴다.


한 번은 그러고 있는데 저 앞에서 개의 목줄을 놓친 외국 여성이 개를 막 부르는 거다. 하지만 개는 이미 신났다. 바다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모래에 몸을 비비고 하하하 완전 신났다. 개의 입장에서는 야호다. 저 멀리 보이는 모습을 보며 외국 여성이 개를 놓쳐서 고생을 하네,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개가 너무 신난 나머지 주인의 손을 벗어나 나에게 막 달려오는 거다.


그 모습이 슬로모션으로 보였는데. 어어 하는 찰나 개가 혀를 내밀고 나에게 달려와서 신나게 몸을 털었는데 모래가 마치 산탄총알처럼 파바다다다닥 책과 나의 얼굴과 일행의 몸 여기저기에 막 튀었고, 주인이 달려와서 난처해하기에 일행이 영어로 괜찮다고 막 말했는데, 개의 주인은 독일인이더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NS를 하다 보면


글을 읽으랬더니 글자를 읽는 난독증이 왜 이렇게나 많은지. 그런 사람 대부분이 내가 읽은 책 한 권이 전부야!라고 하는 것만 같다. 그 책 한 권이 이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말을 한다. 문장이 있으면 단어만 읽고 말하지 말고 문맥을 봐야 할 것이 아닌가.


근데 글밥 좀 먹었다는 사람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출판사와 나이 든 한 등단시인이 나에게 감동적인 소설을 써라고 했다.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때 예, 알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감동적인 소설은 세상에 널려 있는데, 그거 읽으면 되는데 왜 굳이 감동과 거리가 먼 소설을 쓰는 나까지 감동적인 소설을 써야 하는가, 감동적인 소설을 원하면 세상에 나와 있는 감동적인 소설을 읽으면 된다. 그걸로 부족한가? 무엇보다 소설의 세계가 얼마나 넓은데 감동이 없으면 좀 어때? 감동을 꼭 소설에서만 느껴야 하나? 감동은 주위에 실제로 널려있다. 만화에도 있고, 길거리 고양이에도 감동이 있다. 그걸 캐치하는 사람이 있고 캐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라며 나와서 다시는 그 시인을 보지 않았다. 그때 예예 하며 잘 비볐으면 나는 좀 달라졌을까. 김영하 소설을 좋아해서 대부분 읽었는데 김영하 소설에서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김영하 소설은 그냥 재미있었다. 읽는데 막힘없이 술술 읽혀서 좋았다. 하루키도 그렇다. 하루키 소설 속 상상의 세계가 재미있고 좋은 거지 감동을 받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경을 건드리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 속에서 감동을 받았다. 또 인문학 책이었던 메리 로치의 [인체 재활용]에서 아 하며 감동을 받았다. 살아있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걸 죽은 사람, 시체가 그걸 해내고 있었다. 요컨대 자동차 연구에 마네킹이 아닌 시체가 자동차의 엄청난 충돌, 추락에 의한 충격을 어떻게 받는지 해내고 있었다. 방탄복 연구에도 시체가 그 일을 해내고 있었고, 비행기의 추락에서도 시체가 산 사람 대신 그 역할을 해내는데 감동을 받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