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를 하다 보면


글을 읽으랬더니 글자를 읽는 난독증이 왜 이렇게나 많은지. 그런 사람 대부분이 내가 읽은 책 한 권이 전부야!라고 하는 것만 같다. 그 책 한 권이 이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말을 한다. 문장이 있으면 단어만 읽고 말하지 말고 문맥을 봐야 할 것이 아닌가.


근데 글밥 좀 먹었다는 사람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출판사와 나이 든 한 등단시인이 나에게 감동적인 소설을 써라고 했다.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때 예, 알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감동적인 소설은 세상에 널려 있는데, 그거 읽으면 되는데 왜 굳이 감동과 거리가 먼 소설을 쓰는 나까지 감동적인 소설을 써야 하는가, 감동적인 소설을 원하면 세상에 나와 있는 감동적인 소설을 읽으면 된다. 그걸로 부족한가? 무엇보다 소설의 세계가 얼마나 넓은데 감동이 없으면 좀 어때? 감동을 꼭 소설에서만 느껴야 하나? 감동은 주위에 실제로 널려있다. 만화에도 있고, 길거리 고양이에도 감동이 있다. 그걸 캐치하는 사람이 있고 캐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라며 나와서 다시는 그 시인을 보지 않았다. 그때 예예 하며 잘 비볐으면 나는 좀 달라졌을까. 김영하 소설을 좋아해서 대부분 읽었는데 김영하 소설에서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김영하 소설은 그냥 재미있었다. 읽는데 막힘없이 술술 읽혀서 좋았다. 하루키도 그렇다. 하루키 소설 속 상상의 세계가 재미있고 좋은 거지 감동을 받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경을 건드리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 속에서 감동을 받았다. 또 인문학 책이었던 메리 로치의 [인체 재활용]에서 아 하며 감동을 받았다. 살아있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걸 죽은 사람, 시체가 그걸 해내고 있었다. 요컨대 자동차 연구에 마네킹이 아닌 시체가 자동차의 엄청난 충돌, 추락에 의한 충격을 어떻게 받는지 해내고 있었다. 방탄복 연구에도 시체가 그 일을 해내고 있었고, 비행기의 추락에서도 시체가 산 사람 대신 그 역할을 해내는데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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