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망상
루퍼트 셸드레이크 지음, 하창수 옮김 / 김영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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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나는 수세기에 걸쳐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굳어진 '가설'들이 과학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에 대해 다룰 것이다. 과학이 사로잡힌 가장 큰 망상은 과학이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들은 이미 이론적으로 해결되어 있다고 여긴다. - '서문' 중에서

 

 

현대 과학의 열 가지 도그마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당연시하는 열 가지 핵심적인 신념들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기계적이다.

2. 물질은 모두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3. 물질과 에너지의 총량은 항상 일정하다.

4, 자연의 법칙들은 고정되어 있다.

5. 자연은 목적을 가지지 않으며, 진화 또한 목표나 방향을 가지지 않는다.

6. 모든 생물학적 유전은 물질적이며, 유전 물질에 실료 이동한다.

7. 정신은 뇌 안에 들어있으며, 뇌의 작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8. 기억은 뇌 안에 물질적 자취의 형태로 저장되며, 죽음과 함께 완전히 사라진다.

9. 텔레파시처럼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각에 불과하다.

10. 기계적 의학은 실제 작동되는 유일무이한 의학이다.

 

결국 이런 믿음들은 물질만능주의의 철학이나 이념을 만들어낸다. 그 중심에는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물질적 혹은 물리적이라는 추론이 놓여 있다. 이런 신념 체계는 19세기 후반의 과학을 지배하기 시작해 지금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많은 과학자들은 유물론이 여러 가설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과한다. 그들은 유물론을 과학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현실에 대한 과학적 관점이나 세계관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이에 대해 실제로 배운 적도 없고 논쟁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그들은 지적 세뇌를 당할 뿐이다.

 

과학은 우리의 믿음처럼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구했는가? 과학이 현실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이 곧 ‘과학의 망상’이다. 영국의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과학자인 루퍼트 셸드레이크 교수는 현대 과학이 착각하는 10가지 도그마들을 설득력 있게 검증하여 하나의 종교가 되어버린 '유물론적 과학'을 비판하고, 과학이 보다 자유로워지고, 보다 많은 즐거움을 줄 수 있음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현대 과학에 던지는 10가지 질문

 

21세기가 시작된 지 20년 가까이 되어가는 오늘날, 정점에 다다른 듯한 현대 과학기술은 그 영향력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고 있으며, 과학기술이 거둔 승리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론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 종교가 되어버린 과학을 오랜 시간 정면으로 비판해온 과학자가 있다.

 

영국의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루퍼트 셸드레이크는 이 책을 통해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들은 이미 이론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여기는 과학의 태도를 비판하며 현대 과학의 발목을 잡고 있는 주요 10가지 도그마를 과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검증한다.

 

"이 책은 과학을 위해 쓰인 것이다. 나는 과학이 덜 독단적이고, 좀 더 과학적이었으면 한다. 나는 과학이 자신을 옥죄고 있는 독단에서 벗어날 때, 과학이 다시 태어나리라고 믿는다" - 루퍼트 셸드레이크 

 

우리 세계는 물질적이거나 물리적인가? 세계는 생명 없는 물질로 만들어진 기계이며, 자연은 목적이 없는가? 정신은 뇌 안에 얽매여 있으며, 뇌의 작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가? 초자연적 현상은 환각에 불과한가? 기계적 의학만이 효과가 있는 유일한 치료법인가? 등등 과학계의 이단아, 셸드레이크 교수는 현대 과학이 영원불변하다고 믿는 열 가지 확신을 의문으로 바꿈으로써 우리의 고정된 생각과 유물론적 세계관에 대한 통념을 깨뜨린다.

 

과학계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큰 방향을 초래한 형태발생장 이론으로 노벨상 후보로 회자되기도 했던 그는 형태공명이라는 혁신적 이론으로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 이 책은 여러 매체와 연구자들로부터 "토머스 쿤<과학혁명의 구조> 이후 현대 과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역작"으로 평가받으며, '영국 과학, 의학 네트워크' 선정 '올해의 책'을 수상했다.

 

형태공명 가설: "자연의 체계들은 이전에 존재했던 자신들의 모든 종으로부터 집단기억을 물려받는다"

 

 

과학사의 주요 핵심이론과  쟁점을 살펴본다

 

저자는 유물론과 기계적 과학으로 대변되는 현대 과학의 문제점을 읽는 이들이 스스로 깨닫고, 보다 자유로운 탐구정신을 갖출 수 있도록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사상의 변천과정과 문제들, 주요 사상가들의 과학철학 흐름과 쟁점을 한눈에 파악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니체, 아인슈타인, 리처드 도킨스 등을 포함한 주요 사상가들의 과학철학 쟁점을 쉽게 이해할수 있도록 설명하며, 유물론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주류 과학자들과 오랜 시간 첨예하게 부딪친 주요한 논쟁의 쟁점들을 살펴본다. 특히 리처드 도킨스처럼 현대 과학의 슈퍼스타와 다름없는 이들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비판하며 균형 잡힌 과학적 지식을 제시하도록 돕는 셸드레이크의 '형태공명' 이론에 주목할 만하다.

 
그의 형태공명 가설은 발생, 유전, 기억과 같은 생물학의 보편적 주제뿐 아니라 예지, 텔레파시, 영적 응시효과 같은 초자연적 주제들까지 아우르며 기존의 과학이 부정하고 도외시한 주요 질문에 새로운 답변을 제시했다. 저자는 2013년 스위스 '두트바일러 연구소'의 '세계의 사상을 주도하는 인물 100인'에 선정되었다.

 

유전자와 유전자 변형, 그리고 형태공명을 포함하는 유전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새로운 질문의 장을 열게 하고, 생명과학으로 하여금 분자 생물학의 수렁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와준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우선 '유전되는'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유전학의'와 동의어가 아니다. 유전자들은 유전의 일부지만, 전부는 아니다. 

이처럼 형태공명은 문화적 유전에 있어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형태공명을 통해 동물과 식물들은 그들의 이전 세대들과 연결된다. 이들 개개인은 그들 종의 총체적 기억을 활용하며, 동시에 거기에 기여한다. 동물과 식물들은 자신의 종과 품종의 습성을 물려받는다. 이 방식은 인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유전에 대한 이해의 확장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 앞선 세대들로부터의 영향,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에게 우리가 미치게 될 영향들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꿔놓을 것이다. 

 

 

셸드레이크가 전하려는 핵심 메세지

 

자연은 기계적인가? 

기계론은 기계라는 은유를 바탕에 깔고 있다.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은유는 분자들, 식물계, 동물계를 포함한 일련의 포괄적 층위에 속하는 모든 층위의 복잡성이 갖춘 유기적 체계를 잘 표현하는데, 각 층위의 전체는 부분들의 총합보다 크며, 더 낮은 층위에서도 제각기 전체들인 것은 변함이 없다.  

 

기계론의 가장 열렬한 신봉자조차 목적에 부합하는 조직 원리를 살아있는 유기체에다 이기적 유전자나 유전적 프로그램의 형태로 주입시킨다. 우주 대폭발 이론을 감안했을 때도 전체 우주는 기력이 점점 쇠퇴해가는 기계이기보다는 성장하고 진화하는 유기체에 더욱 가깝다.

자연은 목적이 없는가?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는 목표 지향적인 성장과 행동을 보여준다. 성장하는 식물과 동물은 성장의 목적들로 이끌려가며, 만약 성장이 방해를 받는다면 다른 경로를 통해 동일한 목적을 성취할 수도 한다. 심지어 인류에게 있어서도 대부분의 목적과 목표들은 습관적이다. 의식적인 목적들은 원칙이기보다는 예외에 속한다. 진화와 발전은 모두 영향력이 미래의 목적으로부터 시간을 거슬러 과거와 현재로 작용하는 인자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생물학적 유전은 모두 물질적인가? 

 


발생과 행동의 유전은 고유의 기억을 가진 조직의 장에 의해 결정될지도 모른다. 성장과 행동의 습성은 종의 집단기억을 통해 이전될 수 있는데, 각각의 개체들은 이 기억으로부터 자신들의 특성을 끌어내기도 하고, 또한 기억의 형성에 기여하기도 한다. 유기체들은 유전자 내에 암호화되어 있지 않은 형태와 행동의 습성을 형태공명 과정을 통해 물려받는다.

기억은 물질적 흔적으로 저장되는 것일까?

 
기억의 흔적들을 추적하는 데 있어 거듭된 실패는 오히려 기억을 공명 현상으로 보는 생각을 뒷받침해준다. 공명 현상은 과거에 있었던 유사한 패턴들의 활동이 정신과 뇌에서 일어나는 현재의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개개인의 기억과 집단적 기억은 모두 공명에 의존하지만, 특히 개인의 과거에 대한 자기 공명은 더 분명하며, 따라서 더 효과적이다. 동물과 인간의 학습은 형태공명에 의해 시공간을 관통해 전해질 수 있다. 공명 이론은 심각한 뇌 손상에도 불구하고 기럭력이 존속되는 경우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며, 모든 종류의 기억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초자연적 현상은 환각일까?


대부분의 사람은 텔레파시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수많은 실험의 통계적 결과들이 보통의 감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법을 통해 정보가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에게로 이동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예감은 보통 꿈에서 일어나거나 직관을 통해 일어난다. 인간의 예감에 대한 실험 연구에서, 미래의 감정적인 사건들이 탐지 가능한 생리적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시간이 흐르는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작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학의 미래

 

과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19세기 이후 과학을 지배하던 유물론적 이념은 낡은 시대의 유물이다. 필수적 도그마들 전부가 교체되고 있다. 과학의 권위적 구조, 객관성이라는 환상, 전지전능한 과학이라는 환상은 과학이 지닌 유용성을 완전히 잠식해버렸다.

 

과학이 변해야만 할 이유는 또 있다. 지금의 세계는 전과는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기계적 과학과 유물론적 이념은 유럽에서 자라나, 17세기 이후 줄곧 유럽인들의 의식을 사로잡던 종교 분쟁을 통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하지만 이런 식의 집착은 세계의 다른 많은 지역에 존재하는 문화와 전통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많은 과학 분야들이 어떻게 진화해갈 것인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만, 저자는 '과학'만이 그 분야의 발전을 이끌어가는 유일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믿는다. '과학'은 여러 '과학 분야'에 길을 제시해왔다. 유물론을 넘어선 행보를 통해 물리학의 위상이 변화해왔다. 과학을 유물론 이념으로부터 해방시켜줌으로써 논쟁과 대화의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이를 통해 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이 전개된다.

 

 

 

 

과학이 건너야 할 '망상'

 

저자는 스스로 종교가 되어버린 과학을 정면으로 비판해온 진보적 과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단순히 감성적 추론이나 논리를 앞세운 비판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실험을 통해 얻어진 데이터와 자유로운 사고, 풍부한 상상력에 의해 길러 올린 설득력 있는 가설에 있다. 이는 바로 '형태발생장' 이론이다. 하지만 이것이 '망상'의 강에 빠진 과학이 스스로 헤엄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명조끼일지는 알 수 없다.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망상의 강을 따라 망상의 바다로 향할지도 모른다.

 

"가장 멋진 과학은 열린 마음으로 탐구하는 모습이지, 믿음의 체계가 된 모습이 아니다"

- 루퍼트 셸드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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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놓아줄게 미드나잇 스릴러
클레어 맥킨토시 지음, 서정아 옮김 / 나무의철학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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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자동차 한 대가 나타난다. 젖은 브레이크가 끼익 소리를 내자 다섯 살배기 소년이 쿵 하고 차창에 부딪혀 빙그르르 돌더니 땅에 내동댕이쳐진다. 엄마는 아들을 쫓아 아직 멈춰 서지 않은 자동차 앞으로 달려간다. 그러다 미끄러져 손바닥을 펼친 채 넘어진다. 그 충격으로 숨이 막힌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새에 끝났다. - '프롤로그' 중에서

 

 

사람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이를 감추려한다

 

책의 저자 클래어 맥킨토시12년 동안 영국 경찰로 재직하면서 범죄수사과 형사와 공공질서를 담당하는 총경을 지냈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해 이미 작가가 되기 전에도 지역 뉴스레터와 잡지에 자신의 칼럼을 연재하다가 2011년 경찰을 그만두면서 전업 작가로 데뷔했다.

 

영국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을 만큼 탄탄한 구조가 매력적인 이 데뷔작은 경관으로 재직하던 당시 옥스퍼드에서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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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비밀 마탈러 형사 시리즈
얀 제거스 지음, 송경은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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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하디 흔한 '예기치 않은 살인 사건'이라는 소재를 선정적으로 다루는 것 이상을 보여준다. 시니컬하지만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형사 마탈러와, 유능하면서도 개성 넘치는 경찰청 소속 팀원들이 앙상블을 이루어 지적이면서도 재치 있게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수사 과정도 흥미진진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특정 신념에 경도되어 스스로 파멸하면서도 끝내 반성할 줄 모르는 한 인간의 몰락을 '추리'라는 외형에 담아 날카롭게 조감하면서, '누가 누구를 죽였느냐'는 추리 소설의 전형적 질문을 '무엇을 위해 살인을 선택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꿔 놓는다.

 

 

무엇을 위해 살인했는가?

 

파리에서 소규모 극장을 운영했던 70대 노인 호프만, 어느 날 그는 TV쇼에 출연하여 60년 동안 고향인 독일 땅을 밟지 않은 비밀을 털어놓는다. 12살 때 나치 대원에 의해 부모가 끌려가는 것을 목격한 이후 그날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오랜 세월 안간힘을 썼던 일을 말이다. 방송이 나가자마자 그에게 전달된 두꺼운 서류봉투 속에는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세계적 작곡가의 미출간 친필 악보가 들어 있는데, 그 악보의 가치는 무려 수백만 유로에 달한다.

 

전작 <너무 예쁜 소녀>에서 경찰 조직의 체계적인 수사와 완벽한 팀플레이로 인상적인 추리과정을 선보였던 프랑크푸르트 경찰청의 강력계가 또 한 번 맹활약을 펼친다. 강력계 팀장인 로버트 마탈러는 특유의 성실함과 냉정한 판단력, 그리고 전형적인 수사반장 같은 인간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사건 해결의 중추적 역할을 맡는다. 과학수사연구소장 사바토, 감식팀 팀장 쉴링 그리고 새로 부임한 프랑크푸르트 경찰청 국장 샤로테 등, 여러 인물들이 사건이 미궁에 빠질 때마다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며 마탈러와 환상적 콤비를 이뤄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방송기자인 발레리는 호프만의 대리인 자격으로 저작권 계약을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가지만, 약속 장소인 선상 레스토랑에서 다섯 명이 살해되고 그녀는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수사를 맡은 프랑크푸르트 경찰청의 강력계 팀장 로버트 마탈러, 그는 단서를 찾아 범인을 뒤쫓을수록 사건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더욱 끔찍한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선상 레스토랑에서 잔인한 총격 살인 사건이 발생한 후, 본격적인 수사에 돌입하지만 좀처럼 범행의 목적도 과정도 잘 파악되지 않는다. 피해자의 주변 인물을 용의선상에 두고 탐색하지만 뚜렷한 실마리를 찾지 못하던 중, 유력한 단서로 떠오른 것은 사건 현장에서 프랑스 여기자와 함께 사라진 오펜바흐의 친필 악보이다.

 

그러나 악보의 저작권을 차지하기 위한 범죄라고 하기엔 설명되지 않는 점들이 너무 많은 가운데, 금품을 노렸거나 원한 때문에 벌어진 사건도 아니다. 도대체 범인은 무엇을 노리고 이처럼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것일까? 작가가 멍석에 깔아놓은 온갖 복선들을 단서로 범인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유추해나가는 과정에서 뜻밖에도 놀라운 비밀이 드러난다. 악보에 얽힌 진실들이 서서히 장막을 걷어내고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한다.

저자 얀 제거스는 스릴러의 새로운 거장으로 불리는 독일의 베스트셀러 작가다. 괴팅엔대학교에서 문학과 미술사를 전공한 그는 추리소설을 쓰기 전부터 에세이와 문학비평으로 많은 팬을 확보한 인기 작가였다. 1992년 <식인종의 사랑>으로 데뷔한 뒤 1997년 <늑대가 있는 풍경>으로 40세 이하의 젊은 작가에게 수여하는 마부르크 문학상을 수상했다. 2004년부터 얀 제거스라는 필명(본명은 마티아스 알텐베르크)으로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고독한 수사관 마탈러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물 <눈 속의 신부>와 <한여름 밤의 비밀> 등을 펴내며 스릴러 문학의 새로운 거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마탈러 형사 시리즈물은 독일 공영 방송인 ZDF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어 인기리에 방영되기도 했다.

 

 

1941년 10월 19일, 동틀 무렵 프랑크푸르트 서부 주택가는 어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독일의 다른 도시나 시골 마을과 같은 평범한 가을날이었을 뿐. 그런데 바로 그날, 열두 살 사내아이 오르크의 인생이 뒤바뀔 사건이 일어났다. 전날 저녁 어머니가 아이에게 뜻밖의 말을 했다. 그날 밤은 이웃집에서 자게 될 거라는 얘기였다. 그날 이후 64년 동안 살아오면서 게오르크는 그날 밤 부모님의 모습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 '프롤로그' 중에서

 

 

"이건 악보예요. 오페레타 악보죠. 이 곡의 제목은 <한여름 밤의 비밀>"

 

호프만 씨는 종이 뭉치를 뒤집었다. 큰 글씨로 단어 네 개가 쓰여 있었는데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릴 때 그가 쓰던 말이었다. <한여름 밤의 비밀>. 그가 독일어로 읽었다. 그는 미소 지으며 빙 둘러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사람들은 영문을 모른 채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몇 장 넘기니 악보가 나왔다. 그는 계속 미소 지었다.

 
발레리: "호프만 씨 아버지가 작곡하신 곡이란 말인가요?"
노신사: "아니요.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레타요"

 

2005년 5월 29일, 호프만 씨는 그날 저녁 생전 처음으로 TV방송국에 출연했다. 거기서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일흔다섯 살로 건강한 편이며 앞으로도 오래 살기를 원한다. 한가지 희망이라면 자신의 여자 친구 블랑슈보다 먼저 죽는 것이다. 그녀는 그가 운영하는 극장에서 처음 무용수로 일을 시작했다. 지금껏 그는 자신이 살았던 이 마을을 떠난 적이 거의 없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파리 시내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의 묘비가 햇빛에 반짝였다.

 

무용수들은 대부분 각지를 떠돌다 행운을 잡껬다는 꿈을 안고 파리까지 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개 스스로 춤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돈을 벌기 위해 저녁에 남자들을 상대로 춤을 추고 옷가지 벗는 그런 무용수로 전락하게 된다. 블랑슈도 예외는 아니다. 그녀가 그의 침대에 오르기까지 2주 정도 소요됐을 뿐이다. 두 사람은 동거하지도 않고 각자 집에서 살면서도 지금까지 관계가 완전히 멀어진 적이 없었다.

 

오늘 아침도 바짝 마른 햄 한 조각을 잘라 그녀에게 주려다가 칼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 욕실 수납장에서 반창고를 꺼내 오니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붙였다. 그는 벨빌 지하철역 교차로 앞 밤나무 그늘에 섰다. 여자 친구는 이미 '라 베외즈' 카페 앞 의자에 앉자 있었다. 두 사람은 몇 년 전부터 매일 오전 그곳에서 만났다.

 

"손에 든 봉투는 뭐예요?"

"햄 한 조각, 당신에게 주려고"

 

같은 날 이른 저녁 호프만은 집에서 나와 빈 택시를 잡았다. 파리 북쪽에서 남서쪽 끝 이시 방향으로 향하는 긴 여정, 즉 아르테 방송국으로 가는 길이었다. 택시 기사는 못 미더운 시선으로 그를 훑어봤다. 과연 비싼 장거리 택시 요금을 낼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타라는 신호를 보냈다. 한 시간 가량 지나 무사히 도착했다. 곧 발레리가 다가와 그를 안내했다. 그의 솔직하고 공감 가는 고백에 방송국 스튜디오는 적잖이 놀란다. 독일인, 유대인, 그의 부모 등 그동안 감추고 있었던 신상을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방송을 마치고 가는 그를 수위가 불러 세웠다. 크리스틴 들로네라는 부인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내용인 즉 전할 편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발레리가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부인이 말한 주소는 파리 서쪽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사비니 지역이었다. 마을 끝나는 곳에 호수가 있고 막다른 길에서 숲길로 접어드니 마치 성城같은 부인의 저택이 있었다. 부인은 60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호프만이 레뷔 극장을 정말로 운영했는지 당시 활약했던 인물들을 거론하면서 그를 통해 확인하는 듯했다. 확신이 들자 이제 부인은 방송 팀을 거의 무시했다.

 

아우슈비츠에서 노부인의 아버지와 호프만의 아버지는 서로 알게 되었고 당시 병원에서 일하던 호프만의 아버지는 환자로부터 감염되어 고열과 설사로 고통받다가 사망햇다는 사실과 언젠가 아들을 만나게 된다면 전해달라는 두꺼운 봉투를 현재까지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노부인의 아버지도 이미 작고한 인물이다. 전달받은 갈색 봉투의 개봉은 호프만의 요청으로 발레리가 했다. 악보였던 것이다.

 

 

발레리가 납치되다

 

아르테 방송국에서 발레리팀이 들로네 부인 집에서 촬영햇던 영상을 특집 방송으로 내보내자 편집국 전화에 불이 났다. 공연 관계자, 음악 출판사 등에서 저작권에 관심을 보인 탓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호프만 씨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악보의 저작권 계약을 위해 발레리가 대리인으로 나섰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독일 음악 출판사와 약속을 잡았다.

 

'2005년 6월 3일 금요일 5시 7분, 운터마인 다리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배, 술탄 레스토랑, 절반 정도 찬 유리잔과 먹고난 접시가 보인다. 눈앞에 다섯 명이 있는데, 의사 말로는 모두 사망이라고 진단했다', 로버트 마탈러는 보이스 펜을 꺼내 이렇게 녹음하고 있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경찰청 소속 강력계 팀장이었다.

 

마탈러는 배 문을 열고 좀 더 주목할 게 있는지 살펴보려 했다. 그런데 발터 쉴링과 감식팀원들이 더 이상 참아주지 않았다. "일단 여기까지" 그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사망자 다섯 명, 모두 총상 입음. 지금까지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음. 사망자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아직 불분명. 아직 범인이 누군지 모름. 범행에 사용된 무기도 모름. 살해 동기 모름. 강도 살인으로 보이진 않음. 이 모든 게...." 말을 하다 말고 그는 녹음기를 껐다. 아직 결론을 내리기엔 너무 이르기 때문이다.

 

한편, 발레리는 깨어나려 했지만 눈이 떠지질 않았다. 깊은 바닷물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수면 위로 나가려 해도 무언가로 자신을 계속 내리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게 무거웠다. 는꺼풀도 머리도 몸도 다리도, 너무 무겁고 둔했다. 겨우 눈을 떴지만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주변은 완전 깜깜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은 처음이었다. 

 

선상 레스토랑에서 잔인한 총격 살인 사건이 발생한 후, 본격적으로 수사에 들어가지만 좀처럼 범행의 목적도 과정도 쉽사리 파악되지 않는다. 피해자의 주변 인물을 용의선상에 두고 탐색을 벌여가지만 뚜렷한 실마리를 찾지 못하던 가운데, 유력한 단서로 떠오른 것은 사건 현장에서 프랑스 여기자와 함께 사라진 오펜바흐의 친필 악보. 그러나 악보의 저작권을 차지하기 위한 범죄라고 하기엔 설명되지 않는 점들이 너무 많고, 새로운 살인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금품을 노린 것도, 원한에 의한 것도 아닌 살인. 대체 범인은 무엇을 얻기 위해 이처럼 잔악한 범죄를 저지른 것일까. 작가가 깔아놓은 온갖 복선들을 단서로 범인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유추해나가는 과정에서 놀라운 비밀들이 하나둘 밝혀진다. 악보에 얽힌 진실과 괴물이 되어버린 범인의 정체 등이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 속에서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다 

아우슈비츠의 만행을 기록한 아버지의 유품, 자신의 만행이 드러나길 두려워하는 전범, 그로인해 일어나는 연쇄 살인들을 보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범죄의 속성을 보게 된다. 이 소설의 진짜 질문은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누가 무엇을 위해 살인을 선택했는가'다. 인간성의 결함이라는 날카로운 주제를 환기시킨다.

 

현재 호프만이 프랑크푸르트 서류 보관소에서 아우슈비츠 재판 프로토콜을 찾아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 관리 전문가가 알려주었다. 급히 마탈러는 7층 서류 보관소로 갔지만 이미 그는 떠난 뒤였다. 책상 위엔 서류철이 펼쳐진 채로 놓여 있었다. 기록 관리 전문가의 말로는 1964년 3월 19일 이우슈비츠 재판 중 증인 심문 부분이라고 했다.   

 

수석 판사: 그가 페놀 주사로 다른 포로들을 죽이는 것도 보셨습니까?

증인 브란트슈태터: 그는 프랑크푸르트 출신 유대인으로, 이름은 아르투어 호프만이었습니다. 그가 제게 말하기를, 몰래 일기를 쓰고 잇다더군요. 오래도니 악보 뒷면에 암호로 가록을 했다고요. 니호프가 저지른 짓을 빠짐없이 적어두었다고 했습니다.

 

마인 강변의 살인 사건은 이와 깊은 관련이 있고, 아마도 나치 시절의 만행을 은닉하려는 니호프 박사의 범행일 수도 있다는 가설에 도달한다. 그리고 부인의 증언과 달리 니호프는 현재 생존하고 있으며 그가 노리는 것이 바로 아르투어 호프만의 일기임이 자명해졌다. 수용소 군의관으로서 아우슈비츠에서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기에 이런 사실이 세상에 공개되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니호프는 사망한 것으로 위장하고 하인리히 슈미트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1958년 한 유대인 포로에게 목격되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그냥 넘어간 사실이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2005년 봄 TV 보도로 우편 봉투 속에 이르투어 호프만의 오펜바흐 오페레타 악보가 발견되었다고 전파를 타자 그는 이를 사전에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자 발레리 로샤르도 무사히 구출되고, 주범인 니호프 박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소설의 마지막은 피아노 연주로 자크 오펜바흐의 녹탄 중에서 <한여름 밤의 비밀>의 선율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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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40대 중반의 백화점 여성복 제1과 과장이자 띠동갑인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둔 쓰바키야마 과장, 그는 '초여름 대 바겐세일'의 첫날에 거래처 사람들과 만난 자리에서 갑작스러운 뇌일혈로 숨을 거둔다. 그의 영혼은 사후 7일간 중유中有에 머물게 된다. 얼마 전에 구입한 집의 대출금, 열두 살이나 어린 아내, 일곱 살짜리 아들, 치매에 걸린 아버지 등등 저승으로 가기에는 너무나도 미련이 많다. 그런 그에게 중유의 공무원들은 '음행의 죄'라는 믿기지 않는 판결마저 내린다.

 

 

인생의 의미를 다시 조명하다

 

비록 죽더라도 현세現世에 남겨놓은 일이 너무 많다면 저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당연히 무거울 것이다. 쓰바키야마 과장이 그랬다. 그런 그를 어여삐 여긴 탓인지 하늘의 공무원들은 그에게 현세로 돌아갈 기회를 준다. 현세로 다시 넘어가 남은 일을 처리하고 저승의 세계로 복귀하라는 것이다. 다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사흘이고 세 가지 조건이 붙어 있다. 즉 제한시간 엄수, 복수 금지, 정체의 비밀 유지 등이다. 만약 이를 어긴다면 무서운 일을 당한다고 엄포를 놓는다.

 

이리하여 쓰바키야마 과장은 현세로 돌아온다. 하지만 생전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현세로 돌아온 그는 혼란의 세계에 휘말리게 된다. 살았을 때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과는 정반대의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자신의 인생이 생각해왔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중유의 원칙에 따라 원래 인격의 정반대 모습으로 되돌아온 그는 본인조차 낯선 모습으로 회사와 집 근처를 배회하며 회사 사람과 가족들을 만나 여태껏 자신만 몰랐던 진실에 부딪히게 된다. 믿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한없이 행복하다고만 생각했던 자신의 가정에 대해 뿌리부터 흔들리며 슬픔이 북바쳐오른다. 돌이켜보면 우리네 인생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누구보다 가깝지만 오히려 가족에게서 더 큰 상처를 받기도 하고, 항상 최선을 다했지만 주위에서 인정받지 못한 때도 있으며,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그래도 힘든 순간에 자신의 어깨를 도닥여주는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쓰바키야마 과장인지도 모른 채 울고 있는 그를 오랜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도모코가 위로해 준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책의 저자 아사다 지로 스타일의 휴머니티인 셈이다. 그는 우리 모두의 쓰라린 인생사, 그저 그런 이야기에 불과한 평범한 삶을 이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어 줄 줄 아는 작가다. 그는 도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9살에 집안이 몰락 한 후 야쿠자 생활을 한 특이한 경력을 가졌다. 이후 자위대 입대, 패션 부티끄 운영, 다단계 판매 등 다채로운 직업에 종사하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글을 읽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 1991년 36세의 늦은 나이에 야쿠자 시절의 체험을 그린 <빼앗기고 참는가>로 데뷔했다. 많은 독자층을 확보했던 유명 소설 <철도원>도 그의 작품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라. 비록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할지라도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작가 아사다 지로는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는 듯하다.

 

 

"26번 강의실은 음행을 저지른 사람들을 교육하는 곳입니다"

 

불교에선 사람이 죽으면 다음 생을 부여받기까지 49일간 중유中有에 머문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다음 삶에서의 과보果報가 결정된다는 것다. 현생에서 일종의 과로사로 사망한 소설의 주인공 쓰바키야마 과장이 머물게 된 곳도 바로 여기다. 철저하게 샐러리맨인 그는 죽는 순간에도 "1만 엔짜리 정장..... 부탁해. 있는 대로 몽땅...."이라는 말로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다.

 

몸에서 힘이 빠지고 순간 아내와 아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 후 무거운 어둠이 그의 온몸을 내리눌렀다. 눈 앞에 새하얀 건물이 펼쳐졌다. 마치 관공서나 학교처럼 보이는 청결한 느낌의 건물이었다. 자동차와 사람들 모두 빨려들어가듯, 이 건물 안으로 속속 들어가고 있었다. 스바키야마 과장의 발거음이 이처럼 가벼운 적이 없었다. 어린아이로 돌아간 느낌이다. 건물 옥상 스피커에선 담당자의 지시대로 지정 화살표를 따라 질서를 지켜달라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건물 안은 노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신청'이라는 아크릴판이 보였다. 불교는 하얀색 종이, 기독교는 노란색 종이, 일본의 고유신앙인 신토神道는 분홍색 종이, 다른 종교 또는 무교는 파란색 종이에 기재사항을 기록하라고 제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안내를 했다. 법명法名을 기재하는 란이 있어 문의했더니 그의 법명은 '소광도성거사昭光道成居士'라고 알려줬다. 바닥에 표시된 초록색 화살표를 따라 '사진 촬영'이라는 아크릴판을 향했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계속 화살표를 따라가자 밝은 빛이 비치는 넓은 홀에 도착했다.

 

자살한 사람은 3번 방으로 가서 심사를 받으라고 했고, 한 노파는 강습 면제이므로 4번 에스컬레이터를 탑승하라는 안내와 함께 하늘나라 공무원들이 일제히 이 노파에게 박수를 쳤다. 강습이 필요 없을 만큼 훌륭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란다. 엉겁결에 함께 박수를 친 쓰바키야마를 호출한 공무원은 그에게 2층의 '26번 강의실'에서 강습을 받으라고 말했다.

 

에스컬레이터 끝을 올려다보니 하늘 위에서 눈이 시리도록 환한 빛이 비추었다. 노파는 쓰바키야마의 손을 잡으며 강습을 마치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그는 이대로 왕생往生(이승을 떠나 저승에서 다시 태어남)할 순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직도 남겨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랑스런 아들은 이제 겨우 초등학생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내도 끔찍하게 사랑하고 있다. 노인병원에 계신 아버지는 누가 돌볼 것이며, 겨우 마련한 집의 대금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서재의 서랍에는 아무도 모르게 야한 책과 에로 비디오를 숨겨 놓았다. 따로 숨겨놓은 비상금은 없지만 그 대신 아내 몰래 소비자금융에서 빌린 돈도 있다.

 

아무튼 26번 강의실로 안내받은 쓰바키야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음행淫行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여자들에게 인기 없는 외모와 체구였고, 퇴폐 이발소나 사창가엔 발길을 한 적도 없었던 그였다. 혹시 마스타베이션이 음행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그에게 어쨌든 강습을 받으면 희망자에겐 재심사 기회가 있다고 했다.

 

중년의 남성이 교단에 등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정한 심사 결과, 교육대상자들은 현세에서 음행을 저질렀다고 판정받았으며 과거엔 인정사정 없이 바로 지옥행이었지만 최근엔 시스템이 다소 너그러워져 일단 강습을 받은 후 '반성 버튼'를 누르면 대부분의 죄가 면제된다는 설명이었다. 이어서 수강자들의 전력들이 공개되었다. 많은 여성들과 외도한 노인, 독거노인들을 상대로 이혼 경력이 화려한 예순일곱살의 여성 등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쓰바키야마의 케이스를 공개햇다.

 

언뜻 보면 품행이 방정한 인물 같지만 본인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악질적인 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같은 백화점에 근무하는 입사동기 사에키 도모코라고 공개했다. 주위 사람들은 아주 친한 동기생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둘은 18년 동안 친구 사이를 뛰어넘은 섹스 파트너였다고 폭로했다. 그리고 쓸쓸한 그의 장례식 장면을 보여주며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슬프하는 도모코의 모습에 앵글을 멈췄다.

 

"지난 18년간 한결같이 프로포즈를 기다렸는데...., 다른 사람과 연애한다는 얘기는 전부 그의 질투를 끌어내기 위해 꾸며낸 얘기였는데..... 그는 음행을 저지르고 결국 도모코 씨를 버렸지요"

 

이어서 음행이란 결코 불륜이나 이상한 성행위나 금전에 의한 육체의 매매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의해 상대방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으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상대의 진심을 이용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라며 수강자들의 반성을 촉구하듯이 더 이상 입을 다물었다. 결국 억울하다고 느낀 쓰바키야마는 '반성 버튼' 대신에 재심사를 청구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TV 드라마로 만들었다.

 

잘 들어요, 쓰바키 씨. 이 세상에 100가지 사랑이 있다고 했을 때, 그중 아흔아홉 가지는 가짜예요. 그것들은 모두 자신을 위한 사랑이니까요. 난 그 100가지 중에 하나밖에 없는 진짜 사랑을 했어요.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랑이에요.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필요 없어요. 돈도, 자존심도,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조차도 필요 없어요. -본문 309~310쪽

 

 

그럼에도 우리의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

 

소설은 인간사의 모든 문제들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떤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도 작가 특유의 재치 있는 문장으로 웃음을 이끌어냄으로써 덩달아 웃다 보면 다시 감동으로 가슴이 저며온다. 작가 아사다 지로는 인생의 고비마다 찾아오는 상처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면서 인생은 살아볼 만한 것이며 희망을 가져야만 한다고 현재를 살고잇는 우리 모두에게 화두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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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인 1
최지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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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조선시대,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한 역사적 팩트에다 서양 뱀파이어를 절묘하게 엮는 기발한 창작 능력을 발휘했다. 이미 KBS 드라마 <추노>와 <공주의 남자> 등 사극 드라마를 책임 프로듀싱했던 작가의 경험이 이 소설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조선의 역사에 흡혈귀 고지인高地人이 살았다면 믿겨 지는가?

 

 

제주도에 뱀파이어가 살았다

 

작가 최지영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서 동양사학을 전공했다. 그는 2012년 대한민국 스토리공모대전에서 <트랜스포터, 표사>로 최우수상을, <북의>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드라마 PD로서 2010년 대한민국 콘텐츠어워드에서 미니시리즈 <추노>의 기획 및 제작자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이밖에 <아이리스>, <공주의 남자> 등

 

1654년 조선 효종 시절, 하멜 일행이 표착한 제주도에서 피가 모두 빠져나간 의문의 변사체가 연이어 발견된다. 이에 조정은 연쇄 살변살변의 조사담당자로 시구문 말단 군관이던 염일규를 종5품 종사관종사관으로 승진 발령해 제주도로 급파한다. 염불보다는 잿밥이라고 그는 섬처녀들과의 육체적 쾌락에 더 관심이 크다. 

 

아무튼 그는 하멜 일행에 사람의 피를 마실수록 강해지는 불로불사의 존재인 고지인이 섞여 있었고, 그 고지인이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낸다. 범인인 서양 고지인 이고르를 추격하던 중 그는 이고르에게 물려 자신도 고지인의 신세가 되고 만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을까?

 

그의 앞에 가족의 원수인 효종을 죽이기 위해 더 큰 힘을 갈망하는 또 다른 고지인 흑도가 나타난다. 염일규의 내공을 노리는 흑도는 염일규를 유인하기 위해 염일규의 아내를 납치하고, 염일규는 아내를 되찾고자 흑도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흑도를 이용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서인의 계략에 휘말린다.

 

 

 

 

소설은 역사적 팩트인 하멜 일행의 제주도 표착, 북벌론을 놓고 효종과 서인 간의 정치적 갈등에다가 불로불사의 서양 흡혈귀가 하멜 일행에 섞여 들어왔다는 픽션을 가미한 판타지 팩션이다. 효종의 북벌론을 포기시키려는 인물로 서인의 우두머리 송기문을 설정, '기해독대'와 '정유봉사' 등 역사적 실제 사건에 활약하는 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렸다.

 

또한, 서양 하일랜더 전설에서 차용한 불로불사의 뱀파이어 설정과 내공을 쌓고 검술을 연마하는 한국형 무협 장르를 결합해 독창적인 조선의 흡혈귀 고지인을 만들어 냈다. 효종 시대를 배경으로 검 하나에 자신의 운명을 걸 수밖에 없는 고지인의 장렬하고도 섬세한 대결을 다룬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서기 원년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 예수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위에 못 박히던 당시, 형벌을 집행하던 로마 병사는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옆규리를 찬으로 찔렀다고 한다. 그대 예수의 몸에서 쏟아져 내린 선혈을 온몸에 뒤집어쓴 그 병사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여호와의 저주를 받고 말았다. - '프롤로그2' 중에서

 

비록 천형을 받았지만 혜택도 주어졌다. 영원불사永遠不死, 불상불사不傷不死의 운명이었다. 병사는 피의 해갈을 위해 살인을 통해 피를 보충해야만 했다. 목덜미를 물려 피를 빨린 희생자들 중 살아남은 이들도 흡혈 갈증과 영원불사의 운명을 함께 물려받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흡혈인의 숫자는 증가했다. 급기야 로마제국은 흡혈인 소탕 작전에 돌입했다. 공교롭게도 기독교 박해와 맞물려 있었다. 로마의 추적을 따돌리고 하일랜드, 즉 스코틀랜드로 숨어들어 점차 세를 불렸다. 이들이 바로 고지인高地人이다.

 

 

"이빨에 물린 자국입니다, 나리"

 

염일규는 제주도에 도착하자 마자 살변의 희생자인 공분의 사체를 조사하기로 작정했다. 이미 매장한 상태라 가족의 동의가 문제였다. 워낙 육지인에 대한 텃세가 심한 곳이 제주아닌가 말이다. 이때 관비인 아리가 나서면서 자신이 돕겠다고 나섰다. 그녀는 의원인 아비의 첩비妾婢가 낳은 얼녀 출신이었지만 제주의 풍토뿐만 아니라 의술까지 겸비했으니 안성맞춤인 조력자인 셈이다.

 

아리는 염일규를 조그만 주가酒家로 안내했다. 무덤에서 딸의 시신을 파낸다고 하니까 주모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발을 돌리려는데, 아리는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면서 주모를 설득하기 시작햇다. 혈육을 잃은 슬픔을 염일규는 잘안다. 하루 아침에 역모에 몰린 형이 자살하고 부모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짐으로써 집안이 몰락하는 고통을 겪었던 터라 주모의 아픔을 충분히 이해알 수 있어 그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이에 주모는 염일규의 표정을 보고 마음이 동해 파묘를 허락하며 딸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한다.

 

놀랍게도 공분의 시신은 마치 미이라처럼 온전했다. 시신을 살피던 아리가 목 언저리의 물린 자국을 가리켰다. 분명히 물린 자국이었다. 두 개의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마치 짐승의 날카로운 송곳니에 물린 자국 같았다. 이미 한양에서 수많은 시체를 관리했던 그였기에 더 찬찬히 시체를 살펴봤다. 늑대보다 주둥이가 작은 무언가에 당한 것이 분명했다. 일단 동행한 화공畵工에게 시신의 모양새와 상흔의 위치를 자세히 그리라고 지시했다.

 

나머지 시신들의 검시가 계속 이어지면서 아리의 역할도 계속됐다. 사고 당일 홍모이들에게 갔다가 변고를 당했으므로 홍모이들과의 면담이 필요햇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몰라 그는 한양 조정에 박연(조선에 귀화한 네델란드인)을 파견해달라고 장궤를 올렸다. 검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얼음골 계곡에서 아리가 실족하고, 이를 구출하면서 두 사람을 살을 섞게 되고 이후 관계는 급진전한다. 제주 관아를 중심으로 둘의 스캔들은 소문으로 퍼져나갔다.

 

 

아란타 홍모이, 탈옥하다

 

제주 관아에서 큰 사건이 발생했다. 아란타 홍모이들 중 한 명이 옥을 부수고 탈옥을 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염일규는 급히 관아로 갔다. 제주목사는 나루터 검문검색만 강화하면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으므로 체포는 시간 문제라고 호언장담했다. 으래서인지 홍모이들을 가둔 옥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도망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이고르란 늙은 놈일세. 의원 노릇하던 수염 텁수룩하던 나선인이지"

 

이고르는 홍모이들이 왜를 향해 가던 중 우연히 태운 늙은이였다. 조정에서 홍모이들을 모두 한양으로 압송하라는 명이 떨어진 상태인데 탈옥이 발생했으므로 제주목사 입장에선 고약한 일이 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이고르의 탈옥 이후 연이었던 살변이 감쪽같이 그쳤다. 덩달아 흉흉하던 민심도 안정되어 갔다. 이에 제주 연쇄 살변의 범인은 이고르로 확정되는 분위기였다.

 

한양으로의 압송일이 가까워오자 머릿수를 채울 수 없은 현실을 개달은 제주목사는 염 종사관에게 한 명은 고을 백성들에게 얻어맞고 수장된 걸로 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망설이던 종사관은 나중에 자신의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한다. 이후 종사관은 돈궤를 챙겨 제주목사를 찾아 아리의 신분을 노비문서에서 빼달라고 청한다. 이미 아리의 뱃속엔 종사관의 씨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제주목사로부터 아리 집안과 자신의 형과의 기묘한 인연을 듣게 된다. 아리의 생부가 소현세자를 시해한 어의 이형익이며, 종사관의 형은 소현세자를 왕위에 올리려다 탄로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로 인해 가문이 몰락했던 것이다. 그래서 제주목사는 둘의 혼인에는 쌍수를 들고 반대했다.

 

하지만 제주목사의 아킬레스건을 잡고 있는 종사관이 쉽게 포기할리 없다. 결국 홍모이들을 압송하는 배편에 종사관과 아리는 함께 승선한다. 한편, 아리와 종사관의 대화를 듣던 하멜이 자신들의 조난 사고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고백한다. 즉 자바섬에서 출항에 왜로 향하던 상선의 선원들이 일본 해역을 눈 앞에 두고 하나둘 의문사함에 따라 배에 악령이 붙었다고 생각하고 어절 수 없이 배를 버렸다는 것이다. 또한 희생자의 시체가 핏기 한 점 없이 백짓장 같앗던 게 제주섬의 희생자 시체와 동일했다는 것이다. 풍랑은 핑계였고 모든 일은 불청객 이고르를 태운 뒤에 벌어진 사태였던 것이다.

 

제주항을 떠난지 닷새, 압송선은 하동과 구례를 거쳐 섬진강의 곡성 포구에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육상으로 한양까지 이동해야 한다. 제주목사와의 약속을 지키자면 아리를 다시 압송선 편에 제주로 돌려보내야 한다. 때문에 종사관은 아리를 뭍에 남겨둘 궁리를 찾고 있었다. 잠은 오지 않고 그는 강바람을 쇠려고 군영을 잠시 벗어났다. 달이 없는 밤이라 하늘엔 별이 평소보다 많았다. 생각에 몰두한 터라 종사관은 자신을 뒤따르는 인기척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인기척을 느낀 순간 이미 늦었다. 송곳니가 자신의 목덜미를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이 괴물은 바로 양이洋夷 이고르였다. 종사관은 무관 출신이다. 두 사람 간에 공방전이 벌어졌다.

 

놈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짐승도 아니었다. 날카롭게 벼른 길고 단단한 손톱, 빠른 몸놀림, 게다가 인간의 완력이라고 할 수 없는 괴력, 합에 합을 더할수록 염일규의 뇌리에는 공포가 엄습했다. 게다가 이미 목에 큰 상처를 입은지라 힘이 차츰 부쳐갔다.

 
반면 놈은 싸움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기세가 오르는 듯했다. 이제껏 막아내거나 피하기만 하던 칼날을 두 손아귀로 덥석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상대를 한껏 뒤로 밀어붙였다. 땅을 디딘 종사관의 두 발이 놈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죽 미끄러졌다. 종사관은 놈의 손아귀로부터 칼날을 비틀어 빼기 위해 칼자루를 쥔 손으로 남은 힘을 모두 끌어올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놈의 손바닥을 아예 베어낼 심산이었다. 그런데 분명 흘러야 할 피가 놈의 손에서 보이지 않았다. 베어지기는커녕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오히려 출혈은 종사관이 더 문제였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종사관을 구해준 이는 왜인 사무라이 사나다였다. 사나다는 이고르를 제압하고 그의 영기를 모두 흡입함으로써 한동안 흡혈 갈증을 피할 수 있다고 했다.

 

 

종사관과 아리의 사랑은 해피엔딩으로 마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고르에게 목덜미를 물린 종사관도 이미 고지인 신세가 되고 말았는데 과연 그는 흡혈 갈증을 이겨낼 수 있을까? 또 다른 고지인인 흑도 강무웅과 종사관 사이엔 어떤 인연이 펼쳐지며, 효종의 북벌계획과 이에 맞서려는 서인들 간의 갈등은 어떻게 전개될지 소설의 후반부의 전개가 더욱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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