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통주로 빚은 인문학
박운석 지음 / 학이사(이상사) / 2025년 9월
평점 :
책에서는 우리 전통주의 맛과 멋을 알리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이미 잘 알려진 매력 외에도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전통주가 지닌 인문학적 가치를 발굴하고 알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우리 전통주가 같은 발효주인 와인이나 맥주와 비교해 더 뛰어난 술임을 실제 사례를 통해 알려준다. - 머리말' 중에서

(사진, 책표지)
책의 저자 박운석은 한국발효술연구원 원장이다. 우리 술의 대중화와 교육에 힘쓰는 전문가로 활발한 저술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현재 대구일보에 '박운석의 우리 술 이야기'를 연재 중이며, 매일신문에 '박운석의 전통주 인문학', '박운석의 수제맥주 이야기'등을 연재하기도 했다.
총 4부로 구성된 책은 선조들의 술 문화(1부), 이야기의 보고, 전통주(2부), 고문헌 속 전통주 이야기(3부), 전통주의 오늘과 내일(4부) 등을 통해 최근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K-푸드 발전을 위해선 K-술과의 결합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우리 전통주가 세계에 널리 알려질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술자리에서 풍류를 배운다
술은 그 나라의 정치 수준까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척도라 했다. 옛 선조들은 술을 마시는 데도 불문율을 지켜 왔다. 일종의 주도酒道인 풍류風流였다. 풍류는 함부로 웃통 벗어 제끼고 박장대소하며 소란을 떨면서 노는 게 아니라 멋스럽고 풍치 있게 노는 일이다.
그렇다고 잘 노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문과 예술적 소양까지 갖추어야 풍류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엔 풍류가 생활의 주요 영역이었다. 자연 속에서 술을 마시며 시詩, 서書, 금琴을 즐겼다. 이때는 당연히 선비들의 술 문화가 음악과 그림이라는 문화를 생산하는 모태가 되었다.
윤선도는 “술을 마시되 덕이 없으면 난亂하고, 주흥을 즐기되 예를 지키지 않으면 잡雜되기 쉬워 술을 마실 때에는 덕과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고, 조지훈은 “술에 취하지 않고 흥興에 취하기를 즐긴다. 오욕칠정의 잠재된 모든 감정을 술로 풀려는 것은 술의 사도邪道”라고 했다.
이처럼 술 때문에 생기는 폐해를 막고 예를 바로 세우기 위한 방안도 있었다. 향촌의 선비와 유생들이 향교, 서원에 모여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주빈으로 모시고 술을 마시는 행사인 향음주례鄕飮酒禮였다. 하지만 향음주례는 1905년 일제에 의해 사라졌다. 1895년, 조선을 되살리기 위해 전국의 유생들이 향음주례를 핑계로 세 규합에 나섰고, 이는 의병 활동으로 이어졌다. 결국 일제는 이를 금지시켜 버렸다.
금주령의 두 얼굴
영조는 말년에 다리가 아파서 고생을 했다. 이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송절차松節茶 덕분이었다. <영조실록>엔 송절차를 마시고 나서부터 걸어다닐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송절차는 송절주다. 소나무 가지 마디를 채취해 말린 다음 빚은 술이다. 송절은 관절통, 신경통을 완화시켜 준다고 알려져 있다.
송절주를 굳이 송절차로 부른 것은 이유가 있었다. 영조는 재위 기간 대부분 금주령을 내렸다. 쌀을 주원료로 술을 빚다 보니 백성들이 먹을 식량도 부족한데 술을 마신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영조는 술을 ‘사람을 미치게 하는 광약’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대신들이 술을 마시는 것을 경계하도록 했다.
강력한 금주령을 발동했던 영조도 재위 후반부엔 조금씩 느슨해졌다. 1767년 종묘제례에 감주가 아닌 술을 사용토록 허용했다. 이런 조치 배경엔 스스로 금주를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송절주를 송절차로 위장하기보다 대놓고 맘 편하게 들이키고 싶었을 것이다.
전통주는 이야기의 보고寶庫
<고려대규합총서>엔 술맛이 아름답고 사나움으로써 주인의 길흉을 안다고 하였고, 술맛이 시고 나쁘면 주인집에 근심이 생긴다고 했다. 예전엔 양반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시고,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었다.
중국 전국시대의 맹상군, 평원군, 신릉군, 춘신군 등 네 공자公子(군자)도 별채에 食客들을 불러모아 이들에게 술과 음식을 제공하는 한편 이들이 보유한 기술과 정보를 활용했음이 사마천의 <사기>에도 수록되어 있다.
당시엔 곳곳에서 모여드는 손님들이 중요한 소식통이자 돈 되는 최신 정보를 가진 정보원이었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접하다 보니 항상 앞서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당연히 술맛이 나빠지면 과객이 줄고, 최신 정보도 얻을 수 없으니 주인집엔 근심이 생기는 것이다.
술 빚기는 과학이다
우리 전통주는 발효주이다. 발효를 잘 시켜야 맛 좋은 술이 되고 잘못 되면 시큼해서 쉰 내가 풍긴다. 여기에 바로 과학이 숨어 있다. 전통주 빚기에 물누룩인 수국水麴을 만드는 과정엔 과학이 들어 있다. 단양주單釀酒를 빚을 때 사용하는 수국은 누룩을 사용하기 전에 물속에 3~5시간 담가 둔다. 바짝 말라 있는 누룩 속 미생물을 미리 활성화하기 위해서다.
알코올을 만들어 내는 누룩 속의 효모는 본격 활동에 앞서 8시간 정도의 잠복기를 거친다. 이 시기가 술 빚기에서 외부 잡균에 노출될 수 있는 가장 취약한 시기다. 결국 수국을 만드는 이유도 이 잠복기를 줄여 효모가 더 빠르게 알코올을 만들어 내게 하기 위해서다.
쌀을 다양한 방법으로 가공해서 술을 빚는 것도 술의 맛과 향을 다양화하고 좋게 하는 방법이다. 밑술을 죽이나 범벅, 떡 등의 방법으로 빚어 술의 맛과 향을 살려 놓고, 마지막 덧술에 고두밥을 넣어 주어 알코올 도수를 올려 준다. 하나의 술을 만드는 과정에 여러 가지 쌀의 가공 방법을 써서 다양한 풍미를 내는 것이 우리 전통주의 매력이다.
전통주의 적정음주량?
국립청주박물관에는 조선 선조 대의 정치가이자 문인이었던 송강 정철(1536~1593)이 선조에게 하사받은 은술잔이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은술잔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는 술을 너무나 좋아했고, 술 때문에 구설이 잦아 반대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많이 받았다. 이에 선조는 그에게 은술잔을 하사하면서 하루 석 잔만 마시라고 명했다. 그러나 어명을 어길 수 없었던 그는 술잔을 두드려 크기를 늘린 후 사용했다고 한다. 가히 술꾼다운 발상이다.
당시 식사 때 반주로 마시는 술도 한두 잔이었다. <동의보감>에 전하는 적정 음주량 석 잔, 선조의 어명인 하루 석 잔, 반주로 마셨던 한두 잔도 정확한 측정치는 없지만 아마도 세계보건기구가 권장하는 하루 적정 음주량 이내였지 않을까 싶다.
혼자 마시는 술, 동정춘
책에 수록된 동정춘 빚는 법을 보면 쌀 11㎏에 물은 불과 1L만 쓴다. 물을 거의 넣지 않고 단맛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술을 빚기 때문에 술맛은 많이 달다. 실제 ‘꿀보다 달다’고 기록해 뒀을 정도다. 워낙 단맛이 강해 전통주 강의 교육 과정에서 동정춘 빚기를 실습할 때는 『임원경제지』 레시피 절반의 쌀을 사용한다. 쌀 6㎏에 물 1L를 쓴다는 뜻이다. 쌀의 양을 절반 정도 줄였지만 발효가 끝난 이후 술의 단맛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단맛만 강하다면 좋은 술이 아니다. 동정춘은 쌀과 누룩, 그리고 극히 적은 양의 물만으로 빚는 술이지만 완성된 술은 다양한 과일 향과 꽃 향도 품고 있다. 그래서인지 전통주 교육을 받은 분들이 수시로 교육원에 와서 동정춘을 빚는다. 수업 중 실습으로 만들었던 동정춘의 맛과 향이 너무 강렬해서다. 발효실에선 또 다른 팀이 빚은 동정춘이 익어 가고 있다. 3개월 교육 과정 중 매주 여러 종류의 술을 빚었으면서도 유독 동정춘에 끌리는 모양이다.
따뜻하게 데워 마시는 우리 술
요즘은 냉장고에 보관하던 술을 꺼내서 차게 마신다. 맥주도, 와인도, 막걸리도, 증류 소주도 그렇게 한다. 그런데, 술의 온도가 너무 차가우면 그 술의 향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다. 술맛도 날카롭다. 사실상 이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맥주는 알코올 도수가 10%~14%로 높고 단맛이 강한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온도가 15℃ 정도일 때 마셔야 향과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차가울 땐 맥주의 향을 전혀 알 수 없을뿐더러 맛이 날카로운데, 온도가 올라갈수록 향이 살아나고 맛도 부드러워진다. 냉장고에서 금방 꺼내서 마실 때와 한 시간쯤 지나고 맥주 자체의 온도가 올라갔을 때 맛과 향은 천지차이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증류식 소주는 술의 온도가 상온에 가까울 때 마시는 게 좋다. 그래야 높은 도수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알코올 향을 부드럽게 느낄 수 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들은 밥을 담은 식기의 뚜껑에 증류 소주를 따라 마시던 추억을 가끔 이야기한다. 뜨거운 밥을 담았던 식기의 뚜껑에 차가운 소주를 부으면 적당하게 따뜻한 상태로 온도가 올라가 소주의 향과 맛이 확 살아나게 된다. 맛과 향이 좋아질뿐더러 추운 날 혈액 순환을 돕는다. 콩나물 해장국과 함께 마시던 모주도 그렇고, 퇴근 때 오뎅을 안주 삼아 마시던 히레사케도 그러했다.

#전통주 #우리술 #전통주로빚은인문학 #박운석 #학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