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 만화, 가능성을 사유하다
닉 수재니스 지음, 배충효 옮김, 송요한 감수 / 책세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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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철학자가 쓰고 그린 이 만화 형식의 철학 논문의 백미는 예술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극찬한 고도의 추상성이 아니라 에드윈 애벗의 소설 <플랫랜드>에 등장하는 플랫랜드인들의 답답하고 안타까운 사정을 누구보다 훌륭하게 표현했다는 데 있다. 소설 속 플랫랜드인들은 즉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인식을 발전시키지 못한다. 수재니스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시각적 요소, 특히 그림을 언어의 지적 영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만화라는 형태로 완성된다. - <뉴욕 타임스>

 

 

입체적 사고를 추구하라

 

이 만화는 놀랍게도 세계적인 명문 교육기관인 하버드대학교에서 출간한 책이다. 하버드에서 최초로 발간한 이유는 그간 만화를 경시했다는 자기 고백이자 그렇다고 만화를 가볍게 보지 말라는 그런 의미를 담음과 동시에 저자의 놀라운 창조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책이 전하려는 메세지는 현대인들 역시 과거의 플랫랜드에 살았던 주민들과 다름 없다는 풍자이다.

 

저자 닉 수재니스는 교육학자이자 만화가, 예술비평가이다. 그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에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최초로 만화 형식으로 제출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가볍게만 여기는 만화의 그림이 뛰어난 문장 못지 않게 사고와 표현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아마도 당시 논문 심사위원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책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제한된 프레임을 만들어 좁은 그 곳에 가두는 존재가 되었다고 경고한다.

 

 

 

 

아이들은 글을 깨우치기 전에 먼저 그림을 그린다. 그림은 사물을 지각하고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이처럼 그림은 인간의 가장 오랜된 의사소통의 툴이었다. 동굴벽화나 암각화가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그런데 글의 출현으로 시각적인 볼거리와 예술적 표현으로 밀려난 그림은 글 위주의 소통에 삽화 형식으로 참여할 뿐이다. 만화 역시 그림으로 소통하지만 이 책을 읽는 순간, 결코 가볍지 않음에 놀라고 말 것이다. 책은 2차원 평면세계를 표현하는 소설 <플랫랜드>를 인용하고 있다.

 

 

소설 <플랫랜드>에는 미치광이 정사각형이 나온다. 모든 것이 납작한 2차원의 세계인 플랫랜드를 떠나 여러 차원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점, 선, 3차원, 이후의 고차원까지 경험하고서 플랫랜드로 돌아와 주민들에게 다른 차원의 존재 사실을 알리는 데 시간을 바친다. 책이 출간된 당시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로, 사람들은 판에 박힌 듯 단조로운 세상살이를 하고 있었다.

 

1884년, 영국의 신학자이자 교육자였던 에드윈 애벗(1838-1926년)이 지은 이 책(사진은 6차 개정판의 책표지)은 수학 소설인 동시에 최초의 SF 소설이다. 신선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로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는데, 이 책은 2차원 세계의 기하개념을 다룬 독특한 작품인 동시에 빅토리아 시대 당시의 계급제도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풍자문학이기도 하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미국판 서문에서 이렇게 평했다. "우리가 아는 한, 공간의 여러 차원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서 가장 잘 소개한 작품", "단순히 기하학의 지식을 재치있고 재미있게 다룬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우주와 우리 자신에 대해서 깊이 있는 사색을 담고 있는, 한편의 학위논문 같은 소설"이라고 말이다. 한국어 번역판은 <플랫랜드>(윤태일 역, 늘봄 출판사)와 <이상한 나라의 사각형>(신경희 역, 경문사)의 두 종류가 나와 있다.

 

 

 

 

단조로움Flatness

 

천 근의 무게를 짊어진 듯, 숨 막힐 듯 경직된 채, 단조로움으로 가득판 풍경이다. 단조로움은 하이퍼 리얼한 외관 안에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숨기고 있다. 이는 시야의 단조로움이다. 이곳에 사는 거주민들은 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말한 '일차원적 사고와 행동'을 따른다. 그들은 현 상태를 초월하게 할 '비판적 차원'이 결여된 채, 모두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이곳에서는 다양해 보이는 선택지조차 미리 정해진다. '가능성의 신비'는 잊힌 채 제자리에서 같은 목소리를 낼 뿐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감옥 같은 틀이 너무 많아서 이들은 이 틀을 보지도 못하고 그 틀을 존속시키는 데 자신이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걸음마를 떼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런 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스템의 기준대로 분류되고, 이미 방향이 정해진 트랙 위에 놓여 지정된 경로를 따라 앞으로 이동해 지시를 받는다.

 

정교하게 구성된 수많은 과정을 통과하며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정보를 주입받는다. 이 모든 과정은 적절한 결과를 내기 위해 철저하게 기획된 것이다. 모든 일은 상자에서 일어난다. 네모난 상자 안에서. 공간뿐 아니라 시간과 경험도 상자 안에 넣어진다. 이것들은 각각 개별 단위로 분류되어 깨끗하게 포장되고, 효율적인 의사전달을 위해 말하는 자는 듣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 새겨진 수많은 틀은 내재화된다. 외부에서 주입된 내용이 내면에 그대로 흡수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은 정기적으로 시스템이 시행하는 검사를 받는다. 갖가지 다양한 도구를 동원해 인간을 계량화하고 데이터로 전환해 더 많은 상자를 만들어낸다. 스스로 보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동떨어진 힘에 의해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는다. 모두가 좁디좁은 틀에 끼워 맞춰져 누구나 대체 가능한 인간으로 규격화된다.

 

한때 인간이라는 창조물은 자신의 신체 비율로 우주를 가늠하려 했고, 소우주인 자신의 신체를 통해 더 웅장한 천체들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은 스스로 제한된 틀을 만들어, 좁디좁은 비눗방울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을 따라, 단일한 차원에 줄 세워진 '생각과 행동'. 정확하게 같은 발걸음으로 열을 맞춰 줄지어 걷다가 똑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한때 넓은 안목으로 춤추듯 줄달음치며 수많은 가능성으로 확기 넘치던 시야의 문은 완전히 닫혀버렸고, 범위는 협소해졌다. 역동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잠재적 에너지는 감소되고 그 활기를 잃었다. 대신 단조로움만 덩그러니 남았다. 닫히고 협소하고 감소되고 활기를 잃고 단조로운 존재가 되어 버린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넓은 안목으로 춤추듯 줄달음질치며 수많은 가능성으로 활기 넘치던 시야를 되찾을 수 있을까?

 

 

 

다양한 관점

 

확 트인 공간으로 나가 수많은 가능성을 깨닫는 데 필요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찾기 위해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살펴보자. 우리의 두 눈 사이엔 공간이 있다. 이는 각각의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직 하나의 '올바른' 시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쪽 눈을 번갈아 감고서 실험해보라. 이 사실은 분명해진다. 즉 두 관점의 통합이 입체적 시각을 창조한다.

 

약 2천년 전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에라토스테네스는 태양과 지구가 멀리 떨어져 있고 태양 광선이 지구 표면을 평행하게 비추고 잇다는사실을 알았다. 알렉산드리아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한 시에네의 기록에 따르면 하지의 정오가 되면 태양의 빛이 깊은 우물의 바닥까지  닿고 기둥엔 그림자가 조금도 지지 않았지만, 같은 시각 알렉산드리아에선 여전히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햇빛이 수직으로 내리쬐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지구의 표면이 오직 곡선 형태일 경우에만 두 지역의 그림자가 다를 수 있다. 에라토스테네스의 탐구는 계속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둥의 높이와 그림자의 길이를 측정함으로써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 사이의 변위각을 알아냈다. 그런 다음, 걸음으로 두 도시의 거리를 측정하고 거리와 변위각을 이용해 지구의 둘레를 정확하게 계산해냈다. 이처럼 '입체화'란 다양한 관점을 동원해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행위이다. 

 

 

3차원 입체공간의 사각형은 2차원에선 직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사고의 폭도 사유 수단에 따라 규정된다. 인간은 오랫동안 언어를 사유의 주된 도구로 사용했고 이미지는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저자는 그러나 언어와 이미지를 동등한 위치에 놓은 다음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각적 사고'를 실험한다. 문자와 이미지의 결합, 즉 만화를 철학의 도구로 삼은 셈이다.

 

 

단조로움에서 벗어나라

 

낯설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게 바로 다양한 사고를 위한 방법이다. 책의 저자는 이를 추구하기 위해 만화를 활용했다. 문자와 이미지를 동등하게 대접했다. 여기서 말하는 문자란 단순한 글이 아니라 철학 등의 지식 총체를 의미한다. 박사 학위를 위한 논문으로 저자가 만화를 활용했다는 자체가 평면적 사고를 깨드린 시도였으며 이를 논문 대상으로 심사했던 하버드대학도 정말 대단한 교육기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창조성을 배양하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단조로움은 창살 없는 감옥이다. 이곳을 벗어나야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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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인생을 바꾸는가 - 타고난 운명에서 원하는 삶으로
조한규 지음 / 스노우폭스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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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확신한다.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팔자를 고칠 수 있다'고,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말이다. 흔히 '운칠기삼運七氣三'이라며 운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운은 변하지 않는 게 아니다. 역易이요,변화다. 정적靜的이지 않고 동적動的이다. 다만 우리는 그 운명 개조의 방편을 모를 뿐이다. 그래서 방편方便이 필요하다. '인생을 바꾸는 일곱 가지 방편'을 정리해보았다. - '프롤로그' 중에서

 

 

인생을 바꾸는 일곱 가지 방편

 

저자 조한규는 정치부 기자 출신으로 <세계일보> 사장을 지냈던 칼럼니스트이다. 그는 <세계일보> 정치부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투신하여 <스포츠월드> 총괄본부장, MBN 해설위원, 방송위원회/방송통신심의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경희대학교 겸임교수와 호서대학교 벤처대학원 강사로 '기업홍보론' 등을 강의했다.

 
현재 <매일경제> 프리미엄 정치뉴

 

 

 

 

 

 

 

 

사주팔자는 단지 참고서일 뿐이다. 인간은 대자연에서 다양한 에너지를 흡수하며 살아간다. 해, 달, 별로부터 빛을 통해 생명에너지를 공급받고, 코와 폐로 들이마시는 공기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기氣를 받고, 발을 디디는 땅으로부터 역시 생명에너지를 받는다. 이처럼 우주와 지구의 자기장으로부터 기를 받고 자연에서 나는 물과 음식물을 섭취해 생명에너지를 보충하고 있다. 이런 모든 요소들이 인간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생활 속에서 타고난 운명을 바꾸는 방법에 대해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우주와 대자연의 초월적인 '보이지 않는 힘'이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우리 인간은 그 힘을 어떻게 수용, 적용,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해 깊은 사색을 했다. 또한 과거 선인들이 남긴 경전과 서적을 공부하며 해법을 강구했다. 그 결과로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독서 때문에 왕위에 오르다

 

"충녕대군이 천성이 총민히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비록 몹시 춥고 더운 날씨라도 밤을 세워 글을 읽고, 또 정치에 대한 큰 흐름을 알아, 매양 국가에 큰일이 생겼을 때에는 의견을 냈는데, 그것이 모두 범상한 소견이었으며, 또 그 아들 중에 장차 크게 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자가 있으니, 내 지금부터 충녕을 세자로 삼고자 하노라" 

 

위는 <세종실록>에 나오는 태종의 말이다. 세종이 조선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를 말해준다. 셋째 아들인 세종은 원래 왕위에 오를 수 없었음에도 세자로 책봉되었다. <실록>에 기록됐듯이 '독서'의 힘이 크다. 세종은 뛰어난 머리를 지녔음에도 같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서거정<필원잡기>에 따르면 충녕은 <좌전>과 <초사>를 100번 이상 읽었고, 소동파의 서간문집인 <구소수간>은 1,100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그는 이와같은 백독백습百讀百習이 창조성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이 대학자가 된 비결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하늘의 도움을 받아 <주역사전>을 집필했다고 밝힌다. 이는 절대로 인력으로 통할 수 있고 이룰 수 있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독서와 글쓰기로 입신의 경지에 올랐음을 말해준다. 즉 독서와 글쓰기가 뇌의 시냅스를 활성화하고, 대자연의 기운과 소통해 성리학의 한게를 극복하고 실학實學을 정립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것이다.

 

당시의 여러 여건으로 볼 때 18년간의 유배를 견딘다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산의 유배생활지인 강진 다산초당은 만덕산 기슭에 있었는데, 외증조부 윤두서의 손자인 윤단이 세웠다. 지금도 다산초당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다. 8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백련사 이외에는 인가도 드물다.

 

다산은 윤단의 아들 윤규로의 도움을 받아 1,000여 권의 서적을 구입해 도서와 글쓰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산속에서 그것도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면서 18년을 버티었다는 것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다산이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독서와 글쓰기를 중단하지 않은 것은 자신과 후손이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 전략이었다.

 

 

 

 

산책명상은 영감의 원천이다

 

산책명상은 걷기명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걸으면서 발의 동작과 느낌을 관찰해 알아차림으로써 집중력과 깨어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수행법이다. 이를 위파사나에서는 경행經行, 간화선에서는 행선行禪이라고 일컫는다. 산책은 휴식을 위해 천천히 걷는 일이기에 명상과 잘 어울린다.

 

이는 세계적인 평화운동가 틱낫한 스님이 프랑스 남부 보르도 지방에서 수행공동체 플럼빌리지를 이끌면서 유명해졌다. 스님의 산책명상은 위파사나의 현재적 변형이다. 그는 들숨과 날숨의 호흡을 관찰하거나 걷는 것만으로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 사찰에서 시행하는 템플스테이 과정에도 산책명상이 포함되어 있다.  

 

호흡을 하면서 산책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숲속에서 산책명상을 하면 더없이 좋지만, 대도시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가능하다. 출퇴근길에서, 쇼핑을 하면서, 얼마든지 산책명상을 할 수 있다. 자신의 현안을 단전으로 챙기면서 산책명상을 하게 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셰익스피어괴테는 식사 후 반드시 산책을 했다. 베토벤, 모차르트도 산책이 영감의 원천임을 강조했다. 장 자크 루소는 "생각의 발로는 '발'에서 나온다"라고 말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매일 오후 세 시에 산책을 했다. 그 산물이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상비판>. <판단력비판> 등을 비롯한 많은 저술들이다. 칸트는 어려서부터 허약 체질이었지만 규칙적인 산책과 건강관리로 80세까지 살았다. 다산 정약용도 매일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800미터를 산책했다. 500여 권의 저술도 산책명상의 산물이었다. 신문사 논설위원들에게만 전해지는 글쓰기 비결이 있다. '사설이 안 되면 방 안에서 걸어라!' 옥상도 올라가고 주차장에서도 걸으면 사설이나 칼럼이 쉽게 써진다.

 

한편, 구글을 비롯해 애플, 야후, 맥킨지, IBM 등 이 시대 최고의 기업들은 사내에서 명상 프로그램을 시행하거나 명상실을 운영한다. 명상이 행복감뿐 아니라 창의력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윌리엄 조지 교수는 "명상은 업무 효율성을 높여주고, 리더로서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데 유익하다"로 말했다.

 

 

소식小食, 장수長壽의 비결

 

1875년부터 1997년까지 122년을 살아 기네스북에 최장수 인물로 등재된 프랑스 여성 잔 루이즈 칼망. 그녀는 85세에 펜싱을 시작했고, 110세까지 자전거를 탔다. 그녀의 장수 비결은 음식에 있다. 그녀는 모든 음식에 올리브유를 발라 먹었고, 레드와인을 즐겨 마셨으며, 마늘과 채소를 자주 먹었다. TV를 켜면 '맛집', '먹방', '요리대결' 등의 프로그램이 대세일 정도로 음식에 치중하는 우리의 음식문화에 경종을 울린다.

 

부처님의 열반도 사실 음식과 관련이 있다. 기원전 544년에 80세의 나이로 열반에 든 부처는 제자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향하는 중, 빠바 마을의 대장장이가 공양한 음식물을 먹었다. 그런데 이 음식엔 상한 돼지고기가 들어 있었다. 결국 부처님은 식중독에 결렸고 열반에 들게 되었다.    

'식이 운명을 좌우한다'는 식사철학은 <주역>을 토대로 삼는다. 인생을 바꾸는 식사법은 자연과 어울리는 검소한 식사를 기본으로 한다. 사람 중심의 식사와는 거리가 멀다. 맛 중심의 식사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최근 우리 인간들이 갈수록 폭력화되고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이유는 자연과의 어울림을 배제한 식사에 있다. 자연에서 나오는 싱싱한 채소와 전통의 발효식품으로 식단을 꾸렸던 예전과 달리 패스트푸드, 탄산음료, 즉석요리 등 가공된 음식을 즐겨 먹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보다 훨씬 많이 먹고 있다. 자연과 거리가 먼 음식을 먹고, 또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어 우리 몸은 부대끼게 된다. 소화되지 못한 음식물 찌꺼기가 몸속에서 숙변과 독소를 양산한다. 그 숙변과 독소는 간을 지치게 만들고 위와 장을 힘들게 한다. 이에 따라 우리 뇌의 신경세포는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다. 뇌신경회로가 헝클어지고 전체 배선도가 뒤엉키게 된다. 그 결과 인생은 뒷걸음을 친다. 살인과 성추행 등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몸을 맑게 하지 않으면 절대로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

 

 

차로 흥하고 차로 망하다

 

3세기 중국의 동진東晉은 차茶를 통해 나라의 재건을 모색했다. 동진은 <삼국지> 마지막에 등장하는 사마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이다. 당시 동진의 지식인들은 서진西晉의 멸망 원인을 지배게급의 사치와 퇴폐에 있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를 치유할 목적으로 찾아낸 해결책이 바로 차茶였다.

 

"찻잎을 오래 마시면 생각이 깊어지고 졸음을 쫓고 몸이 가벼워지며 눈이 맑아진다"

- 화타, 후한 말의 전설적 명의名醫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목은 일본의 다도가 한국 상류사회에서 친일문화를 조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스승으로 일본 다도를 정립한 센노리큐의 후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 다도의 3대 유파인 오모테센케, 우라센케, 무샤노코지센케가 서울, 부산 등에서 자주 다회를 개최하고 있고, 우라센케, 오모테센케의 한국 지부는 서울과 부산에 있다. 특히, 우라센케 서울 지부는 신라호텔에서 한국 상류사회 부인들을 대상으로 다회를 열고 있다.

 

일본의 다도가 버젓이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차로 인해 두 번 다시 이 땅이 수난을 겪어서는 안 될 것이다. 차가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차가 역사적 대전환을 견인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부는 함께해야 한다

 

혼자서 공부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 그러나 토론이 없기 때문에 발전이 더디다. 혼자서 공부하는 것은 수행 그 자체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납자衲子들이 하안거와 동안거에서 함께 정진하는 것을 감자 씻기에 비유한다. 감자를 씻을 때 하나씩 껍질을 벗겨가며 씻으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도 든다. 그러나 감자를 모두 큰 그릇에 넣고 함께 비비면 껍질도 쉽게 벗겨지고 힘도 덜 든다. 그래서 공부는 함께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학교가 생긴 이유도 비슷하다. 직하학궁稷下學宮 이래로 동양에서는 함께 공부하는 교육기관이 생겨났다. 직하란 '직문의 아래'라는 뜻이다. 직문은 중국 제나라의 수도 린츠의 13개 성문 중 하나였다. 남문으로 추정으로 이 성문 밖에 직하학궁이 있었다. 제나라 위왕은 이곳에 많은 학자들을 유치, 안전을 보장하고 사회적 신분을 제공해 강의, 토론, 집필에 주력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 역사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국가의 공식 교육기관이 생겼다. 고려의 국자감, 조선의 성균관이 그 대표적인 교육기관이며, 민간에는 서당이 있었다.

 

 

수신修身, 몸과 마음에 불을 켠다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을 바꿔주는 한 방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실천 과정에서 실수를 하면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가 있다. 다이어트를 해 본 사람은 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실천하는 삶은 하루하루 긴장의 연속인 것이다. 깨어있지 않으면 실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선인先人들은 수신修身을 강조했다. 수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수신은 몸가짐과 정신자세를 일컫는 말이다. 예를 들어 밥상에선 몸을 바로 세우고 어른이 먼저 숟가락을 들고난 후 뒤따라 식사에 임하라고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은 <명신보감>에 잘 소개되어 있다. 

 

서당에서 수신을 익힌 저자는 중학생 시절 학교생활이 잘 적응되지 않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놀지도 못했다. 걸음걸이를 조심하고 말을 삼가고 자세를 바르게 하려다 보니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고, 시간이 나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다. 심지어 남학생과 여학생이 탁구장에 가는 것을 보면 "아, 저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사실 과거엔 남녀칠세부동석南女七歲不同席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처럼 수신은 뜻을 이루는 기틀을 만드는 작업이다.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일이다. 수신은 무엇보다 실수를 최소화해준다. 수신이 이뤄지지 않으면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할 수 없다. 수신이 이뤄져야 뜻이 이뤄지고 목표가 성취될 수 있다. 몸과 마음을 동시에 닦는 일은 바로 불을 켜는 일이라 하겠다. 목표를 달성하혀면 먼저 수신이 선행되어야 한다.

 

메디치가家 명문가로 태어나다

 

과거 못 살던 시절, 소위 보릿고개 때엔 길거리나 동네 골목에 걸인들이 정말 많았다. 길을 걷다가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한 푼만 적선합쇼"라고 말을 해왔다. 여기서 적선積善이란 선을 쌓는 것으로, 예로부터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특히, 동양생활권에서는 이것이 기본적인 생활철학이었던 것이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선한 일을 하는 자는 하늘이 복으로써 갚아주고, 불선하는 자는 하늘이 재앙으로써 갚아주느니라" - <명심보감>

 

불교에서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강조하는데, 이는 자신이 선행을 하면서도 이 행동 자체를 선행이라고 의식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즉 선행이란 의도적이거나 의식적이어서는 안 되며, 순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연말 정산 때 기부금은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으므로 절세의 수단으로 원치도 않는 유니세프 기부금을 납부하는 가식적인 행위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와 근대 유럽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가家를 꼽는다. 이 가문은 무려 7대에 걸쳐 350년 동안(1397~1737년) 피렌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3명의 교황과 프랑스 앙리 4세 왕비도 배출했다. 이럴 수 있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적선 때문이었다. 이 가문은 예술과 학문 분야에 막대한 자금을 후원함으로써 르네상스를 일으킨 주역이었다. 

 

메디치가의 주요 신조

 

유능함을 드러내지 말고 뒤로 물러설 것

온화하게 몸을 낮추며 조용히 처신할 것

언제나 대중의 편에 서서 옳을 일을 할 것 

 

메디치가는 원래 농사지었으나 피렌체로 가서 상업에 종사하면서부터 부를 축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수많은 예술가, 시인과 학자들을 식객으로 거느렸다. 이를테면, 미켈란젤로를 집안의 양자로 받아들여 최고의 예술가로 길러냈고, 갈릴레오를 후원해 천문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마키아벨리<군주론>을 쓴 것도 메디치가를 위해서였다. 오페라를 처음 탄생시킨 것도 메디치가이며, 이러한 예술과 학문에 대한 후원, 즉 적선이 보잘것없던 메디치가를 명문가로 만들었다.

 

 

내 인생은 내가 바꾼다

 

타고난 운명 때문에 스스로 가난하게 살고 있다고 신세 한탄을 하지 말자. 시선과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면 개천에서 용이된 개룡족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가진 것 별로 없이 오직 스스로의 노력과 실천으로 성공과 부를 거머쥔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 타고난 팔자는 없다. 저자가 우리들에게 전하려는 메세지이다. 독서, 명상, 소식, 차와 음악, 공부, 목표, 적선 등 일곱 가지의 좋은 습관으로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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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 <현문우답> 백성호의 이스라엘 마음순례 백성호의 현문우답
백성호 글.사진 / arte(아르테)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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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본적으로 예수의 생애를 따라간다. 신자와 비신자를 가려 따지지 않는다. 대신 인간을 따진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를 따진다. 한마디로 모든 이에게 건네는 예수 이야기다. 신을 품은 인간, 인간을 품은 신, 예수에 대한 이야기다. - '프롤로그' 중에서

 

 

예수에게 가는 길

 

책의 저자 백성호는 <중앙일보>의 종교담당기자이다. 2007년부터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 '현문우답'을 통해 종교의 벽을 관통하며 독자들과 소통해오고 있다. 제1회 한국기독언론대상(2008년)에서 '그리스도교 성지 순례기 - 예수의 숨결을 찾아서'로 대상을 수상했다. 제19회 불교언론문화상(2011년)에서 '현문우답'으로 특별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현문우답>, <이제, 마음이 보이네>,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생각의 씨앗을 심다>,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등이 있다.

 

저자는 겨울휴가 때 이스라앨을 갔다. 세 번째 순례였다. 단체 일정에 쫓기지 않고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 동안 마음껏 머물고 싶었기에 자동차를 빌려 혼자 운전하며 다녔다. 예수살렘에서 나사렛으로, 다시 갈릴리로, 광야와 사해를 거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올리브 산과 십자가의 길을 몇 번이나 오르내리며 묵상에 잠겼다. 예수를 만나고 싶었기에.

 

그는 2천년 전 예수가 몸을 적셨던 갈릴리 호수에 몸을 담그고, 악마를 물리치며 기도했을 광야에서 눈을 감아 보았다. 또 그는 유년의 예수가 동네 친구들과 뛰어놀았을 나사렛 골목에서 뛰어도 보았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걷다가 쓰러졌던 그 장소에서 주저앉아도 보았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걸었고 또 성경 속을 걸었다. 이는 자신의 눈을 부수고, 이끼를 걷어내고, 성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살아있는 예수'를 만나는 여정이었다. 이 책은 그 여정의 기록이자 그 길에서 만난 예수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이다. 성경 본문의 인용은 가톨릭 성경을 따랐다. 이는 요즈음 보편적으로 쓰는 쉬운 말로 번역돼 있기 때문이다.

 

 

 

 

겟세마니 바위

 

예루살렘 동편엔 야트막한 산이 하나 있다. 성경에도 등장하는 올리브 산이다. 이 산엔 옛날부터 올리브 밭과 공동묘지가 있었다. 지금도 여전했다. 오래된 묘비와 석관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그곳에 조그만 동산이 잇었다. '올리브유를 짜는 곳'이란 뜻을 지닌 겟세마니(겟세마네)다.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전날 밤 예수는 이곳으로 와 땀을 흘리며 기도한 장소이다.

 

이스라엘은 사막 기후다. 낮엔 뜨겁고 밤엔 기온이 뚝 떨어진다. 예수가 제자와 함께 이곳을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로 낮보다 10도 이상 떨어지는 차가운 밤이었을 것이다. 당시 예수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틀이 지나면 파스카(유월절)인데,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음만 먹었다면 예수는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이곳 겟세마니로 왔다. 올리브 산 언덕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빤히 보이는 거리였다. 예수는 도망 대신 기도를 택했다. 신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그 뜻과 하나로 되려는 목숨을 건 선택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겟세마니 동산의 올리브 나무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우리도 그렇게 흔들린다. 수시로 기로에 선다. 살다 보면 각박한 일상의 전쟁터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는 몸소 보여줬다. 도망가지 말라고. 마주하라고.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기도하라고. 묵상 속에서, 명상 속에서, 기도 속에서 답을 찾으라고. 지금도 예수는 그렇게 역설한다. 

예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이 고통이, 이 슬픔 이, 이 불행이 비켜 가게 해주십시오." 그건 우리가 수시로 올리는 기도와 닮았다. 그런데 예수의 기도는 달랐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갔다. 그는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며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떨어질 줄 뻔히 알면서도 한 발짝 앞으로 내딛는다. 그때 에고가 부서져 내린다. 남들이 멈추는 곳, 모두가 겁먹고 뒷걸음질 치는 곳에서 예수는 한발 더 앞으로 내디뎠다. 곤두박질칠 줄 뻔히 알면서, 십자가에 못 박힐 줄 뻔히 알면서 말이다. 그래서 예수의 기도는 각별했다. 그렇게 '나'를 파괴해버린 예수는 우주의 거대한 흐름 속으로, 신의 뜻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기도하는 예수의 모습이 겟세마니 바위에 새겨져 있다.

예수는 기도하며 땀을 피처럼 흘렸다고 한다.

 

 

혼인잔치 교회

 

예수는 어떻게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을까? 예수는 이곳에서 첫 번째 기이한 행적을 보였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이곳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왔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참석했다. 미루어 보건대 친척쯤 되는 사람의 결혼식이었던 것 같다. 성서에는 결혼식 당사자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당시 잔치가 열리고 있는데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유대 사회에서 하객들에게 포도주를 대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마리아가 예수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예수 앞에는 유대인들이 식사에 앞서 손을 씻는 데 사용하는 물독이 여섯 개 놓여 있었다. 예수는 일꾼들에게 물독을 채운 후 이를 잔치를 주관하는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라고 말했다. 과방장은 물로 만든 포도주를 맛보았다.   

 

그럼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만 신비일까. 내 안에서 길어 올린 두레박의 물이 온갖 마음으로 바뀌는 것도 신비다. 예수가 보여준 첫 이적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마음을 어떻게 쓸지를 보여준다. 카나에서는 혼인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객들은 아쉬워하고 혼주는 난감한 상황이었으리라. 그때 예수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 그것을 만들었다. 저자는 거기서 '예수의 마음 사용 설명서'를 읽는다.

 

"네 안에 신의 속성이 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처럼 너는 온갖 마음을 창조할 수 있다. 마치 물을 포도주로 바꾸듯이 말이다. 필요한 때,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이에게, 필요한 마음을 창조해서 써라"

 

 

팔복 교회

 

예수의 영성도 마찬가지다. 안으로 들이마신 다음에는 바깥으로 내쉬어야 한다. 일상을 향해, 현실을 향해, 사회를 향해 내쉬어야 한다. 가난한 마음을 찾고, 그 마음으로 하루를 살고, 다시 가난한 마음을 찾고, 그 마음으로 우리 사회에서 사는 거다. 가난한 마음을 찾는 게 '들숨'이고, 그 마음으로 하루를 사는 게 '날숨'이다. 그게 그리스도교의 영성이자 사회적 실천이다. 우리는 그런 행위를 '수도修道'라고 부른다. 그 와중에 '에고의 눈'이 '예수의 눈'을 점점 닮아간다.

 

'산상설교''평지설교'로 나누는 루카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의 메시지는 둘로 갈라진 게 아니다. 이는 편을 가르는 데 익숙한 '에고의 눈' 때문이다. '예수의 눈'에서는 그렇게 쪼개질 수가 없다. 들숨과 날숨은 두 가지 숨이 아니다. 그저 하나의 숨일 뿐이다. 그럼에도 진보와 보수를 고집하는 이들은 스스로 '반쪽'임을 자처한다. 그러나 예수는 '반쪽'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였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요한 묵시록 22장 13절)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라는 뜻이다. 왼쪽이나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면서 동시에 오른쪽'이고, '시작이면서 동시에 끝'이며, 좌파 와 우파를 모두 품는다는 뜻이다. 바로 '거대한 중도中道'다. 그게 예수의 정체성이다. 다름 아닌 신의 속성이다. 예수의 칼집에는 좌파의 칼도 있고 우파의 칼도 있다.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칼을 꺼낼 뿐이다. 이것이 '예수의 지혜'다. 그래서 전능全能이다. 어느 한쪽의 칼만 쓰는 건 전능이 아니다.

 

팔복 교회 주위로 풍요로운 자연이 펼쳐져 있다.

예수는 이런 풍경 속에서 산상설교를 했다.

 

 

예수는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라고 했다. 마음의 창고를 비우라는 말이다. 우리의 창고는 늘 무언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창고를 채우고 있는 것, 그건 바로 '집착attatchment'이다 . 접착제처럼 끈적이면서 내 마음의 창고를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집착이다. 집착할 때 마음의 창고가 가득 찬다. 집착을 비울 때면 창고도 빈다.

 

그 이치를 꿰뚫은 예수가 말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 불교에서는 이를 "마음을 내려놓으라"라고 표현한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나라의 문턱을 넘는다. 불교는 불국토(佛國土, 부처님 나라)의 문턱을 넘는다. 그 문턱을 넘어가는 첫 번째 징검다리가 서로 닮았다. '마음의 창고를 비워라'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는 왜 생겨날까. 그것은 잣대 때문이다. 잣대의 왼쪽은 선, 오른쪽은 악이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원수가 된다. 예수의 말처럼 그 원수를 사랑하면 어찌 될까. 선악을 가르던 잣대가 무너진다. 그 잣대가 무너지면 어찌 될까. 우리는 돌아간다. '선악과善惡果 이전'으로 돌아간다.

 

중국의 혜능 대사는 늦은 나이에 출가해 정식 승려가 되기도 전에 행자(수련생) 신분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스승인 홍인 대사는 그가 다른 수행자로부터 시기를 받을까 무척 걱정되었다. 달마로부터 내려오는 깨달음의 징표인 가사와 발우를 주며 멀리 도망가라고 했다. 혜능은 밤에 남쪽으로 달아났다.

 

뒤늦게 이를 안 수행자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고 행자 따위가 스승의 법맥을 잇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로 뒤를 쫓아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 했다. 다들 지쳐 중간에서 돌아가고 말았지만 유독 장수 출신인 혜명은 대유령이라는 큰 고개까지 혜능을 쫓아왔다. 이에 혜능은 가사와 발우를 바위 위에 놓았다. 그런데, 혜명은 이를 도저히 들어올릴 수 없자 이렇게 말했다.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함이지 가사를 빼앗기 위함이 아닙니다. 제게 불법을 보여주시오"

 

이에 혜능은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그때 어던 것이 당신의 본래면목(본성)인가"라고 답했다고 한다. 불가의 혜능이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라"라고 한 이유도 그렇다. 그럴 때 우리는 선과 악 이전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게 '완전함'이다. 그래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했다.

 

 

갈릴리(갈릴래아) 호수

 

갈릴래아 호수의 선착장, 갈매기들이 이리저리 끼룩거리며 날아다녔다. 당시의 예수는 말했다.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 거기서 그물을 내려라" 예수가 말한 '깊은 곳'은 갈릴래아 호수의 어딘가가 아니었다. 저 푸른 파도의 어디쯤이 아니었다. 그곳은 신의 속성이 잠들어 있는 우리 내면의 심연이다. 그 깊은 마음의 골짜기다. 우리가 다시 돌아갈 고향이다.

 

거기서 그물을 내려야 한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런데 심연이 어디 인가? 그걸 알아야 갈 게 아닌가" 답은 어렵지 않다. 나의 고집이 무너지는 곳. 거기가 바로 심연이다. 고집에 가려서, 에고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내 안의 깊은 곳이다. 거기서 치유의 비가 내린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낚던 제자들에게 예수는 사람을 낚으라고 말했다.

인생에서 내가 낚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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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손철주의 음악이 있는 옛 그림 강의
손철주 지음 / 김영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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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음악은 정이 깊습니다. 음악은 '소리가 그리는 그림'이요, 그림은 '붓이 퉁기는 음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림 속에 박자와 가락이 있고, 음악 속에 묘법과 추상이 있습니다. 게다가 둘 다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지요. 우리 옛 그림과 옛 소리는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다운 정서의 산물입니다. 서로 통해서 어울리고, 어울려서 신명을 빚어내지요. 붓질이 끝나도 이야기와 뜻은 이어지고, 소리가 멈춰도 여운은 남습니다. 모름지기 흥이 나야 신이 나지요. 막상 우리 옛 그림과 옛 소리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는 마당에서는 걱정이 앞섭니다. 그림과 음악이 서로 스며들어서 만드는 조화와 상생의 시너지를 제가 잘 짚어낼 수 있을지... 마음이 무거우면서 한편으로는 설렘으로 가슴이 뜁니다. - '강의를 시작하며' 중에서

 

 

옛 그림 속엔 흥이 있다

 

저자 손철주빼어난 해석과 문체, 해박한 식견과 다정한 입담으로 그림,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 옛 그림을 소개하는 데 탁월한 멋을 보여주는 미술평론가이자 명강사이다. 오랫동안 신문사에서 일하며 미술에 대한 글을 써왔고, 현재 사단법인 '우리문화사랑'의 운영위원으로 있다.

 
그의 저서로는 그림 속 옛 사람의 본새까지 읽어낸 <사람 보는 눈>, 옛 그림 68편을 사계절로 나누어 감상하는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인생에 대한 아쉬움과 정다운 사람들 그리고 사랑하는 예술에 대해 얘기하는 

 

 

 

 

 

 

 

 

조선시대엔 세상의 온갖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세 갈래 있었다. 봉건 전제 사회에도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인간은 있었을 것이다. 봉건적인 사회에서 그런 사람들은 일탈을 일삼는 이단아가 되거나 잘못하면 역적이 될 수도 있다. 답답한 봉건사회에서 사회적 통제를 뛰어넘고 시대적 검열에서 안전하게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 세 가지 방법을 저자는 '삼척'이라고 명명한다. 즉 첫째, 자는 척하기. 둘째, 숨은 척하기. 셋째, 미친 척하기.

 

은일隱逸, 이는 숨어 산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즐거움도 추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 숨어 산다는 것은 절연絶緣이다. 말그대로 속세의 인연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마치 중대한 범죄를 짓고서 체포되면 중형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에 아무도 모르게 꽁꽁 숨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얘기가 약간 옆길로 샌 것 같다. 아무튼 언제라도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남겨두다면 이는 숨어 사는 게 아니다. 옛 사람들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어떻게 숨어 지냈을까? 해답을 찾기 위해 저자는 옛 그림을 내놓는다.

 

아래의 그림은 조선 중기의 화가 이경윤(1545~1611년)의 <월하탄금月下彈琴>이란 작품이다. 그림 속에 둥근 보름달이 떠있고, 험한 절벽처럼 보이는 큰 바위도 보인다. 그리고 비스듬한 길에 도인 스타일의 선비가 무릎 위에 거문고를 올려놓고 앉아 있다. 한편, 차를 끓이는 시중을 드는 아이는 고개를 돌려 선비를 바라보는 풍경이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거문고에는 줄이 없다. 이를 무현금無絃琴이라고 한다. 뜯을 줄이 없지만 선비는 지금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다. 이에 차를 끓이던 다동茶童도 이제나저제나 연주 소리를 듣을까 하다가 아무 소리도 안나니까 이상하다 싶어서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왜 무현금을 타고 있을까? 옛 그림에서 무현금을 타는 주인공은 바로 도연명(365~427년)을 의미한다. 그는 중국 동진 사람으로 은일거사라고 불리던 시인이다. 유명한 작품이 바로 '귀거래사歸去來辭'다. 당시 지방의 현령으로 근무하다가 상급자가 위세를 부리며 부당한 지시와 요구를 일삼자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는 심정이 들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오두미五斗米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는 일화이다. 그는 고향에서 울타리에 국화를 심어 이로 담근 술을 마시고, 시를 쓰고, 거문고를 연주했다고 한다.

 

           

 

 

산수화의 의미

 

옛 선비나 은사隱士들이 속세를 떠나 숨은 이유는 "운산만첩雲山萬疊 고예독왕孤詣獨往"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자연을 즐기며 살았는지 살펴볼 차례다. 조선 때의 <악학궤범>에는 "음악은 하늘에서 나와서 사람에게 깃들고, 빈 것에서 발생해 자연에서 이루어진다"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음악의 근본을 자연에 두고 있다. 그래서 은자는 흔쾌히 유오산수遊娛山水를 받아들인다. 우리의 옛 그림에 나오는 산수화가 이를 대변한다. 서양에서 말하는 풍경화 말이다. 책에는 화가 최북(1712~1786년)의 <공산무인空山無人>을 소개한다. 빈 산에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가 깨달음을 칭송하는 <십팔대아라한송>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공산무인空山無人 수류화개水流花開"에서 인용한 말이다.

 

최북崔北은 천출이다보니 양반사회에 저항하는 조선 최고의 삐딱이 화가였다. 그는 '조선의 3대 기인화가' 중 한 명이다. 그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한다. 한 양반이 그에게 돈을 주고 그림을 부탁하길래 산수화를 그려주었더니 맘에 안 든다고 타박을 했다. 이 말에 그는 송곳으로 자신의 눈을 찔러버렸다. 그림도 모르는 양반이 자신의 작품을 갖고 평을 하는 걸 멈추려면 이 방법이 최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닮게 그리느냐 닮지 않게 그리느냐, 이것은 현대 미술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화두이다. 실물과 똑같이 그려놓으면 모든 사람이 다 신기해한다. '그림은 다 닮게 그리는 것'이라는 인식이 들게 된다. 닮았는지의 여부를 놓고 끊임없이 다투기도 하고, 또 그 속에서 조화를 찾아가기도 한다.

 

산수화란 자연의 다툼과 조화를 기록한 그림이다. 그 시대의 산수화란 그 다툼과 조화의 판정을 알아보게 하는 시대적 증거물인 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원래 인간의 인위와 아무 상관 없이 그 자체로 자족하다"는 선언, 이것이 말하자면 자연을 이해하는 화가의 가장 심오한 통찰인 것이다.

 

 

 

절친은 지음知音이다 

아집아집은 우아한 모임을 의미하는 커뮤니티를 말한다. 즉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의 친목 모임인 셈이다. 그 목적은 재물을 탐하거나 음란한 짓을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갖춰야 할 아름답고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모임에 필수적으로 뒤따르는 것이 시시, 서서, 화화, 금금, 기기, 다다, 주주 등이다. 시가 필요하고, 붓글씨를 쓰고, 그림을 직접 그리거나 남의 작품을 이야기하고, 거문고를 뜯고, 바둑이나 장기를 즐기며, 차를 함께 나누는데 여기엔 반드시 음악이 있었다.

 

중국 춘추시대에 백아伯牙종자기鐘子期라는 베스트 프렌드가 있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절친이 되었냐 하면 거문고를 연주하는 백아의 생각을 종자기가 정확하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즉 백아가 머리로는 산을 생각하면서 거문고를 연주하면, 종자기는 "우뚝한 산이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하는 생각, 꿈꾸는 삶, 하고자 하는 이야기, 허고 싶은 놀이 등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친구를 지음知音이라고 한다.

 

눈 내리는 겨울을 그린 그림을 살펴보자. 이는 이인문의 <설중방우雪中訪友>라는 작품이다. 지붕에 눈이 소복하고, 소나무와 다른 나무의 가지에도 눈꽃이 피었다. 집 우측의 작은 계곡엔 물이 흐르고 두 사람은 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왼쪽은 주인, 오른쪽은 손님인 것 같다. 소를 타고 친구가 온 모양인데, 그림 하단에 소를 끌고 온 시동이 보인다.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이 그림을 바라보도록 하자. 이 집엔 닫혀 있는 문이 하나도 없다. 문은 죄다 열려 있다. 안과 밖이 다 통한다. 키 낮은 담장은 겨우 안팎을 구분하는 경계 정도이다. 이 집에 사는 아이도 소에 태워 손님을 모시고 온 시동에게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추운데 집 안에 들어와 몸을 녹이라는 소리가 귀에 들린다. 이에 저자는 소통에 관해 한마디한다.        

 

"요즘 참 많은 사람이 소통을 얘기하지만, 좀 갑갑합니다. 네가 나를 알게 하는 것이 소통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이런 마음으로는 절대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네가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게 소통이 아니라, 내가 너를 알 수 없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곧 소통입니다. 이 그림에서처럼 문을 활짝 열고 수평적인 관계에서 대화를 나누고, 바깥에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안으로 맞아들여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나를 알리려고 하지 않고, 내가 이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어쩌나 안타까워하다 보면 자연스레 소통이 되지 않겠습니까"

 

 

미술작품을 보는 안목과 취향

 

우리는 안목眼目취향趣向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취향이 축적되면 안목이 될까? 그렇지가 않다. 취향은 설명할 필요가 없고, 높고 낮음이나 옳고 그름이 없다. 내가 멘델스존을 좋아하는데 남이 쇼팽을 좋아한다고 해서 서로 삿대질하고 싸울 이유가 없다. 그야말로 취향 따라 가는 것이다. 멸치젓보다는 엔초비anchovy가 낫다고 얘기하는 사람보고 "이 사람이 우리 것을 모르는구먼"이라고 탓해 봤자 아무 쓸모 없는 것이다. 이처럼 취향에는 시비를 걸면 안 된다.

 

반면에 안목은 시시비비가 가능하다. 옛 사람들은 음악이든 미술이든 큰 안목을 가지려면 금강안金剛眼과 혹리수酷吏手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금강안이란 옳고 그름과 미추미추를 단번에 알아보는 눈을 말하며, 혹리수란 혹독하게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의 손처럼 엄격한 기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18세기 선비들의 우아한 취향을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 바로 단원 김홍도<포의풍류布衣風流>다. 여기서 포의란 베옷이다. 당시 관리들의 복장은 비단옷이다. 따라서 포의란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그림 속에서 사방관四方冠을 쓴 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림 속에는 당비파, 술병, 청동기와 백색 도자기, 파초 잎, 생황, 칼 등이 보인다. 청동기는 제기용 잔인 중국 골동품의 모조품이며, 흰색 도자기도 빙열문氷裂紋이 선명한 중국 가마에서 빚은 도자기이다. 말하자면 고상한 취향을 가진 선비들의 애장품인 셈이다. 주인공의 맨발을 보노라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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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후테후장에 어서 오세요
이누이 루카 지음, 김은모 옮김 / 콤마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그 집은 지형의 높낮이가 들쭉날쭉한 동네에 가면 눈에 띄는 고지대 꼭대기 부근에 있었다. 소개 자료에 적힌 버스 정류장에서 걸어서 십 분 정도 걸렸다. 주변에 인가가 별로 없었고, 몇 안 되는 집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갯바람을 맞아 함석지붕에 녹이 슬고 낡았다. 그래서인지 목조 건물 '테후테후장'은 오래된 유물 같았고, 그것이 주변 풍경과 잘 어울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 '1호실' 중에서

 

 

연립 주택에는 유령들이 같이 산다

 

연립 주택 테후테후장에 입주한 여섯 명의 세입자들은 각자 결핍된 뭔가가 있어서 다양한 형태의 좌절을 맛본다. 시험 울렁증으로 취업에 실패하고, 태생적으로 남상인 외모를 바꿀 수 없으며, 전과 기록은 지울 수도 없고, 자신이 원하는 직업의 결격 사유가 되는 난치병이 찾아온다거나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그런 사람들이다.

 

쉽게 풀리는 일 하나 없는 이들이 모든 건 세상 탓이라고 등을 돌려 버리는 모습마저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같은 방에 사는 유령들은 그들에게 위로는커녕 저마다 입바른 소리로 신경을 긁어 댄다. 이만한 정신력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느냐며 다친 마음에 오히려 소금을 뿌리고 질책한다. 누구에게나 나름의 자리가 있고, 그것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면 이루지 못할 바가 없다면서 말이다.

 

작가 이누이 루카는 홋카이도 삿포로 출생으로 대학에서 일본 문학을 전공하고, 은행과 관청에서 일하다 어머니의 권유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처녀작 <밤 산책>이 슈에이샤에서 주최하는 노벨대상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작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단편 <여름 빛>으로 제86회 올요미모노 신인상을 수상하며 정식 데뷔하였고, 이듬해 소설집 <여름 빛>을 발표했다. 2011년 연작 소설집 <메구루>로 제13회 오야부 하루히코 상 후보에 올랐

 

 

 

 

 

 

 

 

다카하시 신이치는 지금도 여전히 구직 활동 중이다. 그는 화장실 겸 욕실, 부엌이 딸려 있는 원룸에서 산다. 다다미 8장 짜리 작은 방(약 4평)이다. 인근에는 걸어서 3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지하철 역이 있다. 이 방은 월세 7만엔, 관리비 5,500엔인데, 벌써 졸업하고 거주한 지는 석 달이 좀 더 지났다.

 

그는 열심히 구직 활동을 했다. 하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다. 시험 울렁증이 심해서 필기시험 때마다 본래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 정도도 발휘하지 못했다. 운좋게 면접을 보러 가는 날이면 늘 손에 땀이 흥건했다. 졸업한 지 반년이나 지났건만,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다.

그는 지금까지 받은 불합격 통지서가 무려 세 자릿수를 넘겼다. 그는 이제 무기력에 빠져 봄부터 취직은접고 단기 아르바이트와 일용직 인력 시장에 나가 그날그날 먹고 살았다. 하루는 다녔던 대학의 학생부에 들러 하숙집이나 연립 주택을 소개하는 열람 자료를 살펴보았다. 방세가 싼 집을 찾던 중, 우연히 눈에 들어온 문구가 있었다.

 

월세:13,000엔

구조:방 2개와 부엌

보증금:없음

관리비:없음

 

비고란에 적힌 연락처를 등록한 후, 그 방을 찾아 나섰다. 동네 근처에서 바로 보이는 고지대 꼭대기 부근에 있었다.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다. 40대 후반의 남자가 나왔다. 관리 사무실로 안내했다. 여섯 장의 사진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남녀, 노인과 아이를 포함한 얼굴 사진이었다. 그리고는 누가 좋은지 취향을 물어왔다. 아가씨로 보이는 여자 사진을 택했다. 1호실로 향했다. 이 방의 유령은 시라사키 사야카다.

 

 

2호실의 이다 미쓰키는 삼십 년 가까이 남자 손 한 번 잡아 본 적이 없는 모태 솔로다. 그녀의 마음속에 한줄기 빛처럼 들어온 남자가 있다. 평생 해 본 적이 없는 화장도 하고 멋도 내 보지만, 어쩐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그녀는 슈퍼에서 선어鮮魚 매장을 담당하는 직원이다. 그녀는 이 방에 입주한지 1년 석달이 지났다.

 

그녀의 방에는 유령인 엔도 도미지 씨가 산다. 슈퍼에서 사 가지온 맥주를 함께 마셨다. 유령이 술을 마신다니 정말 신기하다. 아무튼 술을 좋아하는 유령이다. 그녀는 이사 온 다음 날 아침, 방한용 후드티를 입고 있는 엔도 아저씨를 만나고선 이틀 동안 고민했다. 유령임을 알고서 계약을 해지할 지를. 숫자 2를 행운으로 여기는 그녀이기에 둘이서 생활해보라는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이기로 했던 것이다.

 

 

3호실의 나가쿠보 게이스케는 사기 전과범, 여자 등쳐먹는 제비 등 그를 수식하는 단어가 많다. 이 방에도 유령이 산다. 이시구로 사치코는 빨간색 잠수복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다. 약 2년 전에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이곳에 입주했다. 가족도 없고, 가진 돈은 쥐꼬리만큼도 안 되면서, 심지어 전과 기록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8년 간의 형기를 마치고 막 출소한 때였다. 그는 집주인이 내민 사진 중 여대생으로 보이는 젊은 아가씨 대신에 이시구로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는 테후테후장에 입주한 이래 지금까지 취직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출소 후 발바닥이 닳도록 고용센터를 찾았다. 하지만 이력서 심사단계에서 모두 탈락했다. 이때 만난 감방동기가 대마 재배를 제안받았다. 받아주는 곳 없이 하루하루 벌어먹기 힘든 현실 속에서 예전처럼 쉽게 돈 버는 편법을 취하고 싶다. 그래, 사람을 죽이는 일도 아닌데라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유령의 반대로 그는 이를 포기했다.

 

 

4호실의 히라하라 아키노리(유령은 미나토야 가오루)하늘을 날아오르는 파일럿이 꿈이지만 유혹에도 약하고, 체력적으로도 이미 한계치다. 이번 생은 그럭저럭 끝내도 되지 않을까? 내게 더 이상 희망이 있을까? 고통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안 되었다. 5호실의 마키 마유미(유령은 마키 유타로)는 눈에 보이는 것, 실재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의 노파심도 딱히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일어나지 않는 일을 미리 고민해 봐야 손해 아닌가라는 생각이었다. 6호실의 요네쿠라 미치노리(유령은 야마자키 쇼타)는 걱정 자체를 딱 요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상처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테후테후장에 살고 있는 여섯 유령은 각양각색이다. 그럼에도 늘 점진적이고, 매사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미련이 남은 생을 보상받으려는 듯이 더 크게 웃고, 즐기면서 산다. 같은 방에서 사는 세입자들의 고민을 배부른 투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세입자들은 현실을 공감하지도 못하는 유령들과 당연히 다투기 일쑤다. 이에 유령들의 존재를 밀어내지만 유령들은 그마저도 웃어넘긴다.

 

 

 


다른 면으로는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청년에게는 위로에 말을 전하고, 겉모습에 치중하는 여성에게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또 범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는 중년의 남자에게는 호된 질책을, 인간관계에 대한 의심을 품는 젊은이에게는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알려 준다. 주어진 삶에서 바닥을 칠지언정 치열하게 살라고 다그친다.

 

 

"지금의 너, 있는 그대로를 믿어!"

 

길을 잃고 멈춰 선 사람들에게 다시 걸어갈 용기를 준다. 이런 월세방이 있다면 나도 꼭 한 번 살아보고 싶다. - '아마존 서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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