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 <현문우답> 백성호의 이스라엘 마음순례 백성호의 현문우답
백성호 글.사진 / arte(아르테)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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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본적으로 예수의 생애를 따라간다. 신자와 비신자를 가려 따지지 않는다. 대신 인간을 따진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를 따진다. 한마디로 모든 이에게 건네는 예수 이야기다. 신을 품은 인간, 인간을 품은 신, 예수에 대한 이야기다. - '프롤로그' 중에서

 

 

예수에게 가는 길

 

책의 저자 백성호는 <중앙일보>의 종교담당기자이다. 2007년부터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 '현문우답'을 통해 종교의 벽을 관통하며 독자들과 소통해오고 있다. 제1회 한국기독언론대상(2008년)에서 '그리스도교 성지 순례기 - 예수의 숨결을 찾아서'로 대상을 수상했다. 제19회 불교언론문화상(2011년)에서 '현문우답'으로 특별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현문우답>, <이제, 마음이 보이네>,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생각의 씨앗을 심다>,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등이 있다.

 

저자는 겨울휴가 때 이스라앨을 갔다. 세 번째 순례였다. 단체 일정에 쫓기지 않고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 동안 마음껏 머물고 싶었기에 자동차를 빌려 혼자 운전하며 다녔다. 예수살렘에서 나사렛으로, 다시 갈릴리로, 광야와 사해를 거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올리브 산과 십자가의 길을 몇 번이나 오르내리며 묵상에 잠겼다. 예수를 만나고 싶었기에.

 

그는 2천년 전 예수가 몸을 적셨던 갈릴리 호수에 몸을 담그고, 악마를 물리치며 기도했을 광야에서 눈을 감아 보았다. 또 그는 유년의 예수가 동네 친구들과 뛰어놀았을 나사렛 골목에서 뛰어도 보았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걷다가 쓰러졌던 그 장소에서 주저앉아도 보았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걸었고 또 성경 속을 걸었다. 이는 자신의 눈을 부수고, 이끼를 걷어내고, 성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살아있는 예수'를 만나는 여정이었다. 이 책은 그 여정의 기록이자 그 길에서 만난 예수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이다. 성경 본문의 인용은 가톨릭 성경을 따랐다. 이는 요즈음 보편적으로 쓰는 쉬운 말로 번역돼 있기 때문이다.

 

 

 

 

겟세마니 바위

 

예루살렘 동편엔 야트막한 산이 하나 있다. 성경에도 등장하는 올리브 산이다. 이 산엔 옛날부터 올리브 밭과 공동묘지가 있었다. 지금도 여전했다. 오래된 묘비와 석관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그곳에 조그만 동산이 잇었다. '올리브유를 짜는 곳'이란 뜻을 지닌 겟세마니(겟세마네)다.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전날 밤 예수는 이곳으로 와 땀을 흘리며 기도한 장소이다.

 

이스라엘은 사막 기후다. 낮엔 뜨겁고 밤엔 기온이 뚝 떨어진다. 예수가 제자와 함께 이곳을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로 낮보다 10도 이상 떨어지는 차가운 밤이었을 것이다. 당시 예수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틀이 지나면 파스카(유월절)인데,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음만 먹었다면 예수는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이곳 겟세마니로 왔다. 올리브 산 언덕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빤히 보이는 거리였다. 예수는 도망 대신 기도를 택했다. 신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그 뜻과 하나로 되려는 목숨을 건 선택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겟세마니 동산의 올리브 나무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우리도 그렇게 흔들린다. 수시로 기로에 선다. 살다 보면 각박한 일상의 전쟁터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는 몸소 보여줬다. 도망가지 말라고. 마주하라고.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기도하라고. 묵상 속에서, 명상 속에서, 기도 속에서 답을 찾으라고. 지금도 예수는 그렇게 역설한다. 

예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이 고통이, 이 슬픔 이, 이 불행이 비켜 가게 해주십시오." 그건 우리가 수시로 올리는 기도와 닮았다. 그런데 예수의 기도는 달랐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갔다. 그는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며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떨어질 줄 뻔히 알면서도 한 발짝 앞으로 내딛는다. 그때 에고가 부서져 내린다. 남들이 멈추는 곳, 모두가 겁먹고 뒷걸음질 치는 곳에서 예수는 한발 더 앞으로 내디뎠다. 곤두박질칠 줄 뻔히 알면서, 십자가에 못 박힐 줄 뻔히 알면서 말이다. 그래서 예수의 기도는 각별했다. 그렇게 '나'를 파괴해버린 예수는 우주의 거대한 흐름 속으로, 신의 뜻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기도하는 예수의 모습이 겟세마니 바위에 새겨져 있다.

예수는 기도하며 땀을 피처럼 흘렸다고 한다.

 

 

혼인잔치 교회

 

예수는 어떻게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을까? 예수는 이곳에서 첫 번째 기이한 행적을 보였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이곳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왔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참석했다. 미루어 보건대 친척쯤 되는 사람의 결혼식이었던 것 같다. 성서에는 결혼식 당사자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당시 잔치가 열리고 있는데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유대 사회에서 하객들에게 포도주를 대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마리아가 예수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예수 앞에는 유대인들이 식사에 앞서 손을 씻는 데 사용하는 물독이 여섯 개 놓여 있었다. 예수는 일꾼들에게 물독을 채운 후 이를 잔치를 주관하는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라고 말했다. 과방장은 물로 만든 포도주를 맛보았다.   

 

그럼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만 신비일까. 내 안에서 길어 올린 두레박의 물이 온갖 마음으로 바뀌는 것도 신비다. 예수가 보여준 첫 이적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마음을 어떻게 쓸지를 보여준다. 카나에서는 혼인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객들은 아쉬워하고 혼주는 난감한 상황이었으리라. 그때 예수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 그것을 만들었다. 저자는 거기서 '예수의 마음 사용 설명서'를 읽는다.

 

"네 안에 신의 속성이 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처럼 너는 온갖 마음을 창조할 수 있다. 마치 물을 포도주로 바꾸듯이 말이다. 필요한 때,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이에게, 필요한 마음을 창조해서 써라"

 

 

팔복 교회

 

예수의 영성도 마찬가지다. 안으로 들이마신 다음에는 바깥으로 내쉬어야 한다. 일상을 향해, 현실을 향해, 사회를 향해 내쉬어야 한다. 가난한 마음을 찾고, 그 마음으로 하루를 살고, 다시 가난한 마음을 찾고, 그 마음으로 우리 사회에서 사는 거다. 가난한 마음을 찾는 게 '들숨'이고, 그 마음으로 하루를 사는 게 '날숨'이다. 그게 그리스도교의 영성이자 사회적 실천이다. 우리는 그런 행위를 '수도修道'라고 부른다. 그 와중에 '에고의 눈'이 '예수의 눈'을 점점 닮아간다.

 

'산상설교''평지설교'로 나누는 루카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의 메시지는 둘로 갈라진 게 아니다. 이는 편을 가르는 데 익숙한 '에고의 눈' 때문이다. '예수의 눈'에서는 그렇게 쪼개질 수가 없다. 들숨과 날숨은 두 가지 숨이 아니다. 그저 하나의 숨일 뿐이다. 그럼에도 진보와 보수를 고집하는 이들은 스스로 '반쪽'임을 자처한다. 그러나 예수는 '반쪽'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였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요한 묵시록 22장 13절)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라는 뜻이다. 왼쪽이나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면서 동시에 오른쪽'이고, '시작이면서 동시에 끝'이며, 좌파 와 우파를 모두 품는다는 뜻이다. 바로 '거대한 중도中道'다. 그게 예수의 정체성이다. 다름 아닌 신의 속성이다. 예수의 칼집에는 좌파의 칼도 있고 우파의 칼도 있다.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칼을 꺼낼 뿐이다. 이것이 '예수의 지혜'다. 그래서 전능全能이다. 어느 한쪽의 칼만 쓰는 건 전능이 아니다.

 

팔복 교회 주위로 풍요로운 자연이 펼쳐져 있다.

예수는 이런 풍경 속에서 산상설교를 했다.

 

 

예수는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라고 했다. 마음의 창고를 비우라는 말이다. 우리의 창고는 늘 무언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창고를 채우고 있는 것, 그건 바로 '집착attatchment'이다 . 접착제처럼 끈적이면서 내 마음의 창고를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집착이다. 집착할 때 마음의 창고가 가득 찬다. 집착을 비울 때면 창고도 빈다.

 

그 이치를 꿰뚫은 예수가 말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 불교에서는 이를 "마음을 내려놓으라"라고 표현한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나라의 문턱을 넘는다. 불교는 불국토(佛國土, 부처님 나라)의 문턱을 넘는다. 그 문턱을 넘어가는 첫 번째 징검다리가 서로 닮았다. '마음의 창고를 비워라'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는 왜 생겨날까. 그것은 잣대 때문이다. 잣대의 왼쪽은 선, 오른쪽은 악이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원수가 된다. 예수의 말처럼 그 원수를 사랑하면 어찌 될까. 선악을 가르던 잣대가 무너진다. 그 잣대가 무너지면 어찌 될까. 우리는 돌아간다. '선악과善惡果 이전'으로 돌아간다.

 

중국의 혜능 대사는 늦은 나이에 출가해 정식 승려가 되기도 전에 행자(수련생) 신분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스승인 홍인 대사는 그가 다른 수행자로부터 시기를 받을까 무척 걱정되었다. 달마로부터 내려오는 깨달음의 징표인 가사와 발우를 주며 멀리 도망가라고 했다. 혜능은 밤에 남쪽으로 달아났다.

 

뒤늦게 이를 안 수행자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고 행자 따위가 스승의 법맥을 잇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로 뒤를 쫓아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 했다. 다들 지쳐 중간에서 돌아가고 말았지만 유독 장수 출신인 혜명은 대유령이라는 큰 고개까지 혜능을 쫓아왔다. 이에 혜능은 가사와 발우를 바위 위에 놓았다. 그런데, 혜명은 이를 도저히 들어올릴 수 없자 이렇게 말했다.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함이지 가사를 빼앗기 위함이 아닙니다. 제게 불법을 보여주시오"

 

이에 혜능은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그때 어던 것이 당신의 본래면목(본성)인가"라고 답했다고 한다. 불가의 혜능이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라"라고 한 이유도 그렇다. 그럴 때 우리는 선과 악 이전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게 '완전함'이다. 그래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했다.

 

 

갈릴리(갈릴래아) 호수

 

갈릴래아 호수의 선착장, 갈매기들이 이리저리 끼룩거리며 날아다녔다. 당시의 예수는 말했다.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 거기서 그물을 내려라" 예수가 말한 '깊은 곳'은 갈릴래아 호수의 어딘가가 아니었다. 저 푸른 파도의 어디쯤이 아니었다. 그곳은 신의 속성이 잠들어 있는 우리 내면의 심연이다. 그 깊은 마음의 골짜기다. 우리가 다시 돌아갈 고향이다.

 

거기서 그물을 내려야 한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런데 심연이 어디 인가? 그걸 알아야 갈 게 아닌가" 답은 어렵지 않다. 나의 고집이 무너지는 곳. 거기가 바로 심연이다. 고집에 가려서, 에고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내 안의 깊은 곳이다. 거기서 치유의 비가 내린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낚던 제자들에게 예수는 사람을 낚으라고 말했다.

인생에서 내가 낚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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