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 만화, 가능성을 사유하다
닉 수재니스 지음, 배충효 옮김, 송요한 감수 / 책세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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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철학자가 쓰고 그린 이 만화 형식의 철학 논문의 백미는 예술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극찬한 고도의 추상성이 아니라 에드윈 애벗의 소설 <플랫랜드>에 등장하는 플랫랜드인들의 답답하고 안타까운 사정을 누구보다 훌륭하게 표현했다는 데 있다. 소설 속 플랫랜드인들은 즉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인식을 발전시키지 못한다. 수재니스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시각적 요소, 특히 그림을 언어의 지적 영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만화라는 형태로 완성된다. - <뉴욕 타임스>

 

 

입체적 사고를 추구하라

 

이 만화는 놀랍게도 세계적인 명문 교육기관인 하버드대학교에서 출간한 책이다. 하버드에서 최초로 발간한 이유는 그간 만화를 경시했다는 자기 고백이자 그렇다고 만화를 가볍게 보지 말라는 그런 의미를 담음과 동시에 저자의 놀라운 창조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책이 전하려는 메세지는 현대인들 역시 과거의 플랫랜드에 살았던 주민들과 다름 없다는 풍자이다.

 

저자 닉 수재니스는 교육학자이자 만화가, 예술비평가이다. 그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에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최초로 만화 형식으로 제출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가볍게만 여기는 만화의 그림이 뛰어난 문장 못지 않게 사고와 표현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아마도 당시 논문 심사위원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책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제한된 프레임을 만들어 좁은 그 곳에 가두는 존재가 되었다고 경고한다.

 

 

 

 

아이들은 글을 깨우치기 전에 먼저 그림을 그린다. 그림은 사물을 지각하고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이처럼 그림은 인간의 가장 오랜된 의사소통의 툴이었다. 동굴벽화나 암각화가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그런데 글의 출현으로 시각적인 볼거리와 예술적 표현으로 밀려난 그림은 글 위주의 소통에 삽화 형식으로 참여할 뿐이다. 만화 역시 그림으로 소통하지만 이 책을 읽는 순간, 결코 가볍지 않음에 놀라고 말 것이다. 책은 2차원 평면세계를 표현하는 소설 <플랫랜드>를 인용하고 있다.

 

 

소설 <플랫랜드>에는 미치광이 정사각형이 나온다. 모든 것이 납작한 2차원의 세계인 플랫랜드를 떠나 여러 차원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점, 선, 3차원, 이후의 고차원까지 경험하고서 플랫랜드로 돌아와 주민들에게 다른 차원의 존재 사실을 알리는 데 시간을 바친다. 책이 출간된 당시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로, 사람들은 판에 박힌 듯 단조로운 세상살이를 하고 있었다.

 

1884년, 영국의 신학자이자 교육자였던 에드윈 애벗(1838-1926년)이 지은 이 책(사진은 6차 개정판의 책표지)은 수학 소설인 동시에 최초의 SF 소설이다. 신선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로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는데, 이 책은 2차원 세계의 기하개념을 다룬 독특한 작품인 동시에 빅토리아 시대 당시의 계급제도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풍자문학이기도 하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미국판 서문에서 이렇게 평했다. "우리가 아는 한, 공간의 여러 차원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서 가장 잘 소개한 작품", "단순히 기하학의 지식을 재치있고 재미있게 다룬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우주와 우리 자신에 대해서 깊이 있는 사색을 담고 있는, 한편의 학위논문 같은 소설"이라고 말이다. 한국어 번역판은 <플랫랜드>(윤태일 역, 늘봄 출판사)와 <이상한 나라의 사각형>(신경희 역, 경문사)의 두 종류가 나와 있다.

 

 

 

 

단조로움Flatness

 

천 근의 무게를 짊어진 듯, 숨 막힐 듯 경직된 채, 단조로움으로 가득판 풍경이다. 단조로움은 하이퍼 리얼한 외관 안에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숨기고 있다. 이는 시야의 단조로움이다. 이곳에 사는 거주민들은 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말한 '일차원적 사고와 행동'을 따른다. 그들은 현 상태를 초월하게 할 '비판적 차원'이 결여된 채, 모두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이곳에서는 다양해 보이는 선택지조차 미리 정해진다. '가능성의 신비'는 잊힌 채 제자리에서 같은 목소리를 낼 뿐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감옥 같은 틀이 너무 많아서 이들은 이 틀을 보지도 못하고 그 틀을 존속시키는 데 자신이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걸음마를 떼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런 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스템의 기준대로 분류되고, 이미 방향이 정해진 트랙 위에 놓여 지정된 경로를 따라 앞으로 이동해 지시를 받는다.

 

정교하게 구성된 수많은 과정을 통과하며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정보를 주입받는다. 이 모든 과정은 적절한 결과를 내기 위해 철저하게 기획된 것이다. 모든 일은 상자에서 일어난다. 네모난 상자 안에서. 공간뿐 아니라 시간과 경험도 상자 안에 넣어진다. 이것들은 각각 개별 단위로 분류되어 깨끗하게 포장되고, 효율적인 의사전달을 위해 말하는 자는 듣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 새겨진 수많은 틀은 내재화된다. 외부에서 주입된 내용이 내면에 그대로 흡수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은 정기적으로 시스템이 시행하는 검사를 받는다. 갖가지 다양한 도구를 동원해 인간을 계량화하고 데이터로 전환해 더 많은 상자를 만들어낸다. 스스로 보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동떨어진 힘에 의해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는다. 모두가 좁디좁은 틀에 끼워 맞춰져 누구나 대체 가능한 인간으로 규격화된다.

 

한때 인간이라는 창조물은 자신의 신체 비율로 우주를 가늠하려 했고, 소우주인 자신의 신체를 통해 더 웅장한 천체들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은 스스로 제한된 틀을 만들어, 좁디좁은 비눗방울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을 따라, 단일한 차원에 줄 세워진 '생각과 행동'. 정확하게 같은 발걸음으로 열을 맞춰 줄지어 걷다가 똑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한때 넓은 안목으로 춤추듯 줄달음치며 수많은 가능성으로 확기 넘치던 시야의 문은 완전히 닫혀버렸고, 범위는 협소해졌다. 역동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잠재적 에너지는 감소되고 그 활기를 잃었다. 대신 단조로움만 덩그러니 남았다. 닫히고 협소하고 감소되고 활기를 잃고 단조로운 존재가 되어 버린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넓은 안목으로 춤추듯 줄달음질치며 수많은 가능성으로 활기 넘치던 시야를 되찾을 수 있을까?

 

 

 

다양한 관점

 

확 트인 공간으로 나가 수많은 가능성을 깨닫는 데 필요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찾기 위해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살펴보자. 우리의 두 눈 사이엔 공간이 있다. 이는 각각의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직 하나의 '올바른' 시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쪽 눈을 번갈아 감고서 실험해보라. 이 사실은 분명해진다. 즉 두 관점의 통합이 입체적 시각을 창조한다.

 

약 2천년 전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에라토스테네스는 태양과 지구가 멀리 떨어져 있고 태양 광선이 지구 표면을 평행하게 비추고 잇다는사실을 알았다. 알렉산드리아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한 시에네의 기록에 따르면 하지의 정오가 되면 태양의 빛이 깊은 우물의 바닥까지  닿고 기둥엔 그림자가 조금도 지지 않았지만, 같은 시각 알렉산드리아에선 여전히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햇빛이 수직으로 내리쬐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지구의 표면이 오직 곡선 형태일 경우에만 두 지역의 그림자가 다를 수 있다. 에라토스테네스의 탐구는 계속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둥의 높이와 그림자의 길이를 측정함으로써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 사이의 변위각을 알아냈다. 그런 다음, 걸음으로 두 도시의 거리를 측정하고 거리와 변위각을 이용해 지구의 둘레를 정확하게 계산해냈다. 이처럼 '입체화'란 다양한 관점을 동원해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행위이다. 

 

 

3차원 입체공간의 사각형은 2차원에선 직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사고의 폭도 사유 수단에 따라 규정된다. 인간은 오랫동안 언어를 사유의 주된 도구로 사용했고 이미지는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저자는 그러나 언어와 이미지를 동등한 위치에 놓은 다음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각적 사고'를 실험한다. 문자와 이미지의 결합, 즉 만화를 철학의 도구로 삼은 셈이다.

 

 

단조로움에서 벗어나라

 

낯설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게 바로 다양한 사고를 위한 방법이다. 책의 저자는 이를 추구하기 위해 만화를 활용했다. 문자와 이미지를 동등하게 대접했다. 여기서 말하는 문자란 단순한 글이 아니라 철학 등의 지식 총체를 의미한다. 박사 학위를 위한 논문으로 저자가 만화를 활용했다는 자체가 평면적 사고를 깨드린 시도였으며 이를 논문 대상으로 심사했던 하버드대학도 정말 대단한 교육기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창조성을 배양하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단조로움은 창살 없는 감옥이다. 이곳을 벗어나야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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