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즐거운 그림책 읽기
엄혜숙 지음 / 창비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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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
이렇게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는 앞서 말한 미덕(함께 일하고 그 결과를 함께 누리는 공동체 생활상)이 있는 반면 아쉬운 점도 눈에 띈다. 우선, 사건이 모두 손큰 할머니의 성격과 의지에 따라 좌지우지된다. 주인공 손큰 할머니는 독자가 동일시하기보다는 감탄하고 놀라워하는 대상인데, 이로 인해 독자는 그림책 속에 흠씬 빠져들기 어렵다. 둘째, 글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서 상대적으로 그림의 역할이 작다. 셋째, 명절이 배경인 까닭도 있겠지만 음식에 접근하는 방식이 상투적이다. -13쪽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에서 글과 그림의 역할을 살펴보자. 이 그림책에서는 그림보다는 글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야기성이 강한 그림책은 말(문장)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때가 많다. 이런 경우에 그림책이라는 장르는 점차 삽화가 들어 있는 그림이야기책이라는 장르로 옮겨가게 된다.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에서는 글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글과 그림은 동시성을 지닌다. 글로 이야기한 내용이 다시 그림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19페이지
글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더라도 그림표현이 좀더 자유로웠다면 그림보는 재미가 더 컸을 것이다. (중략) 글이 표현하고 있지 않은 것을 상상하고 해석해서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일, 그것이 그림책에서 그림이 할 역할이라고 하겠다. -17쪽

어린이 그림책을 만드는 사람은 어른들이지만 독자는 어린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림책에서 어른의 입장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그림책을 즐겁게 보고 그림책 안에서 뛰놀 수 있어야 한다. 어린이 책은 어른이 어린이에게 건네는 말이고 어른이 어린이와 나누는 대화다. 따라서 '어떻게 말을 거느냐'가 중요하다. 독자인 어린이가 '네' '아니오'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지, 아니면 자유롭고 즐거운 대화가 될 것인지는 말을 건네는 어른의 자세에 달려 있다. 책을 만든 이가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19~20쪽

강아지똥은 골목길 담 밑에서 한겨울을 보낸다. 추운 겨울날 강아지 똥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난 더러운 똥인데,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을까? 아무짝에도 쓸 수 없을텐데..."(17면) <강아지똥>의 세계에서 '착하다'는 것은 바로 '쓸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이것은 우리 전통적 세계관과도 일치하는 대목인데, 예전에는 가장 심한 욕 중의 하나가 '저런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놈!'이란 말이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에 쓸 수 있어야 착한 것일까? <강아지똥>을 보면, 아름답게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2쪽

<강아지똥>에서 '똥'은 흔히 보는 똥이 아니다. 작가는 강아지똥을 통해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하찮은 강아지똥이 삶의 본질을 묻는 '관념의 똥'이 된 것이다. 아이들은 감각적으로 똥과 친숙하다. 그러나 이렇게 친숙한 똥을 소재로 철학과 교훈을 담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이런 쉽지 않은 일을 <강아지똥>이 해내고 있다. 관념과 철학의 세계를 아이들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28쪽

<갯벌이 좋아요>는 여러 생물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는 주제의식, 주인공 꽃발게를 내세운 허구적 기법, 다양하고 재미있는 시각적 표현, 신기한 모습을 한 갯벌생물 등으로 인해 독자의 눈을 끈다. (중략) 그러나 그림작가는 주관성이 앞서는 나머지 글과 그림의 어울림, 화면구성과 화면 전개의 개연성이라는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갯벌이 좋아요>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성과 정보를 함께 담으려는 이른바 '다큐드라마'식 그림책이 지닌 문제이기도 하다.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은 이렇게 따져가며 보지 않는다. 그림책에 나오는 갖가지 생물들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꼼꼼하게 따져보는 것이 우리 어른들의 몫이 아닐까. 우리 아이들이 더 나은 그림책을 보고 즐기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35~36쪽

<아씨방 일곱동무> 이영경 글,그림/비룡소/1998
원작(규중칠우쟁론기)에서는 바느질 도구인 '칠우'가 서로 공을 다투다가 주부인이 혼쭐을 내자 잠잠해진다는 데서 풍자성을 보여준다. 또 일하는 사람의 공, 손의 공이 가장 크다고 결말을 맺음으로써 노동의 귀중함을 부각하고 있다. <아씨방 일곱 동무>의 결말은 이와 다르다. 빨강 두건 아씨는 꿈속에서 일곱 동무가 없어지자 바느질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일곱 동무의 공을 깨닫게 되며 다함게 힘을 모아 즐겁게 바느질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런데 이러한 결말은 교훈적이며, 빨강 두건 아씨가 꿈이라는 계기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과정도 작위적이다. 함께 어울려 일하고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은 분명 미덕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이라 하더라도 풍자와 비판 정신을 담을 수 있고, 그것은 섣부른 교훈이나 화해보다 더욱 값질 수 있다. 우리나라 그림책은 갈등을 보여주다가도 '함께 살면 좋아요'라든가 '함께 하면 좋아요'식으로 끝맺는 경우가 많은데, 상투적인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아이의 세계에도 삶의 다양성과 진솔함이 있을 터인데,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어 풍자와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는 것도 아이의 눈을 넓혀줄 수 있는 방식이라고 하겠다.
-38~39쪽

몇가지 아쉬운 점을 짚었지만, 이 그림책은 고전의 패러디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우리 주변 어디에나 그림책거리는 있다. 문제는 상상력이고 해석력이다.' 이그림책을 보면서 내내 떠오른 생각이었다. -44쪽

놀이의 특징은 무엇일까?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른들도 아이들처럼 논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하곤 했다. 미끄럼틀을 타든, 모래놀이를 하든, 물고인 웅덩이에서 철벙거리든, 빈 병에 웅덩이 물을 담든, 어떤 놀이를 하든지 아이들은 완전히 몰두하여 논다. 놀고 있는 아이에게는 '지금, 여기'야말로 '영원한 순간'이다. 스스로 주인이 되어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순간, 그 순간 아이는 놀이와 하나가 되어, 놀이 속에, 놀이와 함께 있는 것이다. -45쪽

정보그림책은 정보를 제시하는 형식 자체가 중요하다. 같은 정보라도 어떻게 제시되느냐에 따라 정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정보 제시 형식이야말로 정보그림책에 차별성을 부여하는 요소라고 하겠다. -59쪽

아이에게는 상상이 현실만큼이나 생생하다고 한다. 그러나 상상세계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평소에 겪은 모든 일이 상상의 질료가 된다. 풍부하고 다양한 현실 경험이야말로 풍부한 상상세계를 창조하는 바탕이라는 것을 이 그림책(비가 오는 날에.../이혜리 글,그림/보림/2001)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81쪽

우리에게 사회학적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이다...-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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