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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여? ㅣ 사계절 중학년문고 17
전경남 지음, 윤정주 그림 / 사계절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큰딸이 고양이를 좋아한다. 개는 사람들한테 꼬리치며 지나치게 충성하는 꼬락서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단다. 도도하고 요염하고 영물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고양이가 훨씬 더 좋다나.. 집 안에서 짐승 키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 엄마 때문에 한 번도 고양이와의 동거를 해본 적이 없는 딸은 고양이 그림이 들어있는 필통, 양말, 머리고무줄, 핸드폰 고리 등등을 갖고 다니고 뮤지컬 캣츠를 무지 좋아한다. 그런 딸 덕분에 나는 어디 가서 고양이가 들어있는 물건만 보면 관심을 갖게 되는 편인데 책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요즘들어 고양이가 등장하는 책들이 많이 눈에 띈다. 개보다는 고양이가 주목받는 걸 보면 이것도 사회적 현상인가, 싶을 때도 있다. 음... 그러고 보면 직장에서든 사회조직에서든, 심지어 국가에 대해서도 개같은 충성심을 발휘하는 게 미덕인 시대는 지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이 책도 앞표지에 노란 줄무늬 고양이를 보고 끌렸던 거다. 재미있는 고양이 이야기 하나, 새로 알고 싶었다.
가시이빨은 세상이 '힘의 논리'에 의해 돌아간다고 믿는 고양이다. 고향마을에서는 힘깨나 쓰는 고양이였는데 어느 날 '각진 턱'이라는 고양이와의 맞장뜨기에서 참패한 후 '힘은 쓰는 것보다 조절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고 '지는 법도 배워야 한다'는 엄마가 미워서 고향을 등지고 떠돌이 고양이가 되어버렸다. 마음에 드는 동네를 찾아 정착하려고 하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다.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쌍발톱' 패거리들이 어디서 흘러든 건지도 모르는 뜨내기 고양이를 호락호락 받아주질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시이빨은 이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에 진저리가 난 고양이다. 힘의 논리로만 세상을 보는 가시이빨에게는 '누구 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 물론 내 밑에 누가 있는 것도 이젠 아주 귀찮고.'하는 생각이다. 힘의 위계질서, 그게 가시이빨 식의 관계맺기라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문장이다.
그런 가시이빨에게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백승호라는 아이의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 승호가 살아있을 때 승호를 지배했던 것은 '경쟁의 논리'였다. 승호네 엄마는 승호에게 늘 '공부하라'고 공격했고, 승호는 영어 대회 우승 트로피, 수학 영재 우승컵을 받는 경쟁의 우승자 대열에 끼는 아이였다. 그날도 승호네 엄마는 친구들과 축구하러 나가려는 승호를 방 안에 밀어넣고 한 달 후에 있을 일제고사 공부를 하라고 했고, 승호는 너무 화가 나서 방 안에서 축구공을 차다가 책장이 무너지는 바람에 깔려서 죽게 된 것이었다.
'힘의 논리'를 믿다가 떠돌이 고양이가 되어버린 가시이빨과 '경쟁의 논리'에 따라 살다가 죽어서 영혼이 되어버린 승호는 그래서 서로 비슷하게 닮아보인다. 가시이빨이 승호를 외면하지 못하는 것도 승호에게서 자기와 닮은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너무 어린 데다 갑작스럽게 죽었다'고 '이 세상에서 꼭 하고 싶은 거 한 가지만 더 하고 오라'며 저승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승호의 소원은 축구를 하는 것이다. 소원을 풀지 못하고 원망이 쌓여가면서 점점 정말 한을 품은 원귀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승호를 보면서 가시이빨은 '인간의 영혼과의 합체'를 시도하게 된다. 말하자면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패트릭 스웨이지와 우피 골드버그가 이뤄냈던 '빙의'를 하자는 건데, 그 빙의를 이루는 단계가 영화 <사랑과 영혼>보다 훨씬 더 어렵다.
털실을 다 풀고 감되 털실이 끊겨서는 안 되고, 생선가시에 붙은 살점을 발라내어 그릇에 가득하도록 모아야 하며, 밤이 될 때까지 풍선을 가지고 놀되 절대 풍선을 터뜨리지 않아야 하는 3단계의 시험은 가시이빨에게 '힘을 조절하는 법'과 '인내심'을 터득하게 하는 과정이다. 두 가지 모두 가시이빨의 엄마가 늘 걱정스럽게 당부하던 말씀이 아니었던가. (승호네 엄마의 눈물을 받아 마시는 단계도 있는데, 그건 아마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는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결말부분을 너무 서둘러 마무리 지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리고 '순간합체'라는 다소 엉뚱한 해결책이 좀 생뚱맞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지만 내가 어떤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 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때로는 나도 가시이빨처럼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지속하는 일이 '아주 귀찮다.'할 때가 있다.)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헤아려보는 것도 두고두고 즐거운 고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