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춤추는 생각학교 6~10>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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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영웅이 필요해 ㅣ 이어령의 춤추는 생각학교 7
이어령 지음, 홍정아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10월
평점 :
앞서 가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의 뒤를 따라 걸을 수 있다면 그것도 복이다. 앞서 가는 사람이 덕 있고 본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오딧세이가 트로이 전쟁에 나가 있는 10여 년의 세월동안 오딧세이의 아들 텔레마코스의 진정한 스승이자 친구가 되어주었다는 멘토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나를 비춰줄 거울 같은 사람, 가끔은 내가 꿈꾸듯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은 사람, 그래서 하루하루를 함부로 살지 않게 슬며시 잡아주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복받은 인생이다.
점점 세상은 험악해지고 삶은 각박해지고 사람은 쓸쓸하다. 멘토를 만나기는커녕 마음 나눌 친구나 이웃을 만나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그런데 이 책은 감히 영웅을 말한다. 멸망을 목전에 둔 지구를 구한다거나 망토를 두르고 하늘을 날지는 않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온전히 잘 살아낸 인물들이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 시대도 아니고 세계대전이 벌어지지도 않았지만 지금도 난세라면 난세다. 무엇보다 믿고 따를 사람이 없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여오는 걸 보면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당혹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삶의 이정표가 되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헤아린 걸까? 작가는 '앞마당' 글에서 "지금부터 네가 삶을 조각해 갈 때 '나도 저런 사람처럼 되어야지.'하고 본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줄게."라고 말하고는 아이들이 살아가는데 지침이 되어줄만한 인물들을 뽑아 이야기를 풀어간다. 덕과 관용으로 사람을 보듬어 큰 인물이 된 황희 정승과 유방, 책 속에서 자기의 세계를 찾았던 간서치 이덕무와 서경덕, 그리고 책으로 얻은 지식이 오만이 되는 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던 나폴레옹, 포기하지 않고 한 우물 파기에 열정을 쏟았던 바이올린 제작의 대가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와 황도를 재현해낸 도공 신정희, 돈을 버는 것보다 올바로 쓰는 일을 중요시했던 앤드류 카네기와 유일한 박사,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써서 노예해방의 역사를 이룬 비처 스토, 장애를 이기고 자기를 바쳐 세상에 빛을 건네준 루이 브라이와 스티븐 호킹 박사, 결과나 경쟁에서의 승리를 염두에 두지 않는 순수한 도전정신으로 빛나는 섀클턴과 라인홀트 메스너, 그리고 고정관념을 부수고 남다른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동서고금을 망라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게 펼쳐져서 어줍은 위인전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을 것 같다. 글의 초점이 인물들의 삶 자체에 있다고 하기보다 그 삶을 통해 생각하고 본받을 점을 강조하는 데 맞춰져 있어서 아이들이 받아들이기가 훨씬 편할 것 같다. 특히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비처 스토에 대한 이야기에서 “한 사람의 실천은 열 명을 눈 뜨게 하고, 백 명의 마음을 흔들고, 천 명의 생각을 바꾸게 한다.”는 글은 나에게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책도 필요하고 열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실천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던 것 같다. 가슴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도 그것이 하나의 행동으로 표출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장담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가만히 있으면 현상유지는 가능하다는 얄팍하고 비겁한 계산... 실천을 감행하기까지 앞을 가로막는 것들은 참 많다. 내 자신을 돌아보자면 ‘실천’ 자체가 하나의 ‘도전’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더욱 수동적인 것 같다. 누구의 말마따나 야망과 명예심은 사라지고 경쟁만 남은 이 세상에서 자식을 키우려다 보니 미리 챙겨주고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주려는 어른들이 많아진 탓일 것이다. 내가 안 해도 누군가 알아서 해준다는 게 버릇이 된 아이들은 스스로 움직일 줄을 모른다. 실천은 행동의 과잉이고 쓸데없는 오지랖이며 실패의 확률을 높이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혹시라도 그런 아이들이 있다면 저자의 ‘앞머리’ 글에 쓰인 대로 그 아이의 마음속에 반듯한 본 하나가 그려지기를 더욱 바라게 된다.
저자가 우리에게 남긴 한 마디가 ‘뒷마당’ 글에 실려 있었다. “사람은 저마다 성격과 능력이 달라. 아무리 부족해 보이는 사람도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히 배울 점이 있게 마련이지. 그러니 네 곁에 있는 친구와 가족들 가운데 너만의 ‘숨은 영웅’을 찾아보렴. 네가 누군가의 작은 영웅이 되는 것도 근사할 거야!”라고. 좋은 세상이 되려면 숨어 있는 작은 영웅이 많아져야 한다. 숨은 작은 영웅이 되려고 노력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우리 모두가 해내야만 하는 과제가 아닐까.
읽다보니 글이 절반 정도까지만 내려오는 페이지가 많다. 요즘 이런 편집이 유행인가? 하긴 아이들이 책을 빼서 휘리리릭 넘기며 훑어볼 때 ‘요 책, 읽기에 만만하겠구나.’하는 인상을 심어주기엔 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쪽에 ‘나의 작은 인물 사전’이라는 꼭지가 있다. ‘대한민국을 빛낸 다섯 인물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었는데, 나비박사 석주명, 김수환 추기경, 비디오 아트 백남준, 노르웨이 라면왕 이철호, 옥수수박사 김순권, 성악가 조수미에 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 실려 있다. 좀 큰 아이가 있다면 아이와 함께 ‘나만의 작은 인물 사전’을 만들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뚝딱 완성하는 사전이 아니라 공책 한 권에다 신문에서든 책에서든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을 모아놓는다면 그것도 아이의 삶에 하나의 본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