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
오주석 지음 / 월간미술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오주석 님이 2005년 2월 백혈병으로 돌아가시고 난 후 유고집으로 나온 책은 모두 3권인 것으로 안다.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가 돌아가신지 1년 후인 2006년 2월 출간되었고, 2008년 4월에 '독화수필집'이라는 <그림 속에 노닐다>가, 그리고 올 4월에 이 책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이 출간된 것이다.

생전에 동아일보와 잡지 <북새통>에 연재하셨던 글들로 정해진 지면 탓이겠지만 전작들에 비해 아쉬울 만큼 글들이 짧다. 모두 27점의 그림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중에 김명국의 <달마도>,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김정희의 <세한도>, 김홍도의 <씨름>, <송하맹호도>, <마상청앵도>, 정선의 <금강전도>, 7점이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2권에서 자세히 다룬 적이 있는 작품들이다. 거기에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에 나오는 작품과 겹치는 <이재초상>, 변상벽의 <모계영자도>, 신윤복의 <미인도>, 강세황의 <자화상>, 김홍도의 <해탐노화도> 등을 포함한다면 오주석 님의 책을 꾸준히 접해온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다소 가볍고 싱겁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골몰하기는 싫고 세상의 잡다한 일들에서 눈을 돌려 그저 담백한 마음을 그림과 맞대고 싶어질 때 펼쳐보기에는 그만일 것 같다. 책의 편집에서도 그런 의도가 엿보인다. 본문은 페이지 반쯤까지 내려오고 그 나머지는 여백이다. 종이값이 아깝다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눈이 시원하다. 그렇다고 여백으로 남은 공간이 그저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쪽은 작가 소개글로 이어지고, 어느 쪽은 작품의 설명을 도와줄 확대된 부분그림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지난해에 나온 유고집이 <그림 속에 노닐다>였는데, 이 책은 책 속에서 노닐기가 좋다. 눈이든 마음이든..

그러고 보니 서양화보다는 우리 옛 그림들이 노닐기 좋다는 생각이 든다. 서양화들은 선과 면, 색채들이 너무 강렬하다. 심지어 모노톤의 그림들도 서양화들은 왁자지껄 소리지르고 아우성치는 것 같다. 뭔가 들어줘야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렇지 않아도 지금을 살아가야 하는 나는 동네 큰 길에만 나가도 밀려 오가는 차들과 네온과 바쁜 사람들 속에 파묻히게 되고 귀에 들려오는 소식은 기쁘고 반가운 일보다 흉흉하고 심란한 것이 더 많다. 어쩌면 우리 삶에 한 점의 담백한 수묵화 속 같은 여백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우리 옛 그림 앞에서는 쉽게 고요해지고 차분해진다.

오주석 님이 해석해주는 우리 옛 그림들의 분위기도 그렇다. 김수철의 청아한 <하경산수도>에서는 천석고황의 정을 읽어내고 이정의 <풍죽도>에서는 어진 군자의 진정을 살핀다. 정선의 <통천문암도>에서는 강원도 통천 앞바다의 성나 넘실대는 파도의 결 속에서 도를 이루어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군자의 뜻을 찾아낸다. 신윤복의 <미인도>는 설레어 애타는 연정을 전해오고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는 자연과 고요히 하나가 되어 어느새 그도 하나의 풍경이 되고 산수가 되어 버린 노인의 평화로운 미소를 보여준다. 정선의 <만폭동도>에서는 우르릉거리며 쏟아져 흐르는 물소리에 내 귀를 씻을 수도 있을 것만 같고, 김명국의 <답설심매도> 속에 아직 눈도 녹지 않은 겨울 끝자락에 매서운 추위를 마다않고 어딘가에 피어있을 매화 한 송이를 찾아 나귀를 타고 훌쩍 떠나가는 선비가 부럽다. 겨울의 끝을 알려줄 어딘가 피어 있을 매화 한 송이.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그 그림 속 선비보다 더 성급해진 나는 겨울이 시작되기도 전에 매화 욕심을 부려본다.

단원에 대한 책을 따로 한 권 묶을 정도로 각별히 단원을 사랑하셨던 분이니 이 책에서도 단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단원의 그림 6점이 소복하다. <황묘농접도>, <해탐노화도>, <송하맹호도>, <씨름>, <소림명월도>, <마상청앵도>. 세인들에게 단원이 풍속화가로만 알려진 것이 안타까우셨을까. 풍속화 <씨름>과 함께 산수화에 영모도까지 골고루 뽑아 실었다. 유머러스한 단원의 스승 강세황의 작품과 단원의 제자라서 그런지 어쩐지 화풍이 단원과 닮아 보이는 김득신의 작품까지 아울러 감상할 수 있다.

그림들이 숨막힐 정도로 와락 달려들지 않아서 좋다. 그냥 조용히 다가와 나를 살며시 안고 등을 다독여주는 정도랄까. 그렇다고 오주석님의 이 책이 마냥 감상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마냥 감상적인 사람은 지친 누군가를 안고 다독여줄만한 힘이 없는 법이다. 오주석 님은 다른 인물이라고 알려진 초상화를 다른 시기에 그려진 이재초상이라고 밝혀낸 바 있는 아주 예리한 분이시다.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해서 그런 예리함이 날을 감출 리가 없다.

사소한 아쉬움이 있다. 책 속에서 호초법이니, 어자엽이니, 몰골법, 부벽준, 쌍구법, 해조묘, 태점 같은 우리 그림을 그리는 기법에 대한 용어가 나온다. 미루어 짐작해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좀 더 정확한 설명이 따라 붙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9-11-14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두고 못 읽은 오주석 선생님 책들이 몇 권 있는데 천천히 보고 싶어요. 다 보고 나면 아쉬움이 더 커질 거예요. 한국의 미 특강보다는 만족감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참 좋은 책이었어요.^^

섬사이 2009-11-16 14:23   좋아요 0 | URL
그렇죠? 이 책은 이 책대로의 맛이 있더라구요.
저도 "여전히 참 좋은 책이었어요."^^

순오기 2009-11-17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의 미 특강을 못 본 분들에게는 좋을 듯해요.
고등학교 독서회에서 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를 토론하곤
이 책을 꼭 보라고 소개해줬어요.^^

섬사이 2009-11-18 02:57   좋아요 0 | URL
그동안 나온 오주석님의 책들이 좀 '빽빽한' 책들이라
좀 헐렁한 분위기의 이 책도 좋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