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단지내 놀이터에서 모래밭을 없애고 푹신한 스펀지 타일을 까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두어달 전부터 모래밭을 없애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주민들의 의견을 묻는 설문조사를 한 것도 아니고, 모여서 정식으로 찬반의견을 듣는 회의를 연 적도 없어서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다. 그냥, 무조건, 위생상 좋지않고 관리가 어렵다는 게 이유고, 게,다,가, 구청에서 사업비를 지원받아 하는 거라 꼭!!! 해야 한단다.
유빈이가 걸음마를 시작하고 놀이터에 나가면서부터 모래밭은 최고의 놀이공간이었다. 모래놀이셋트에 일회용 숟가락 몇 개, 케이크 살 때 넣어주는 빵칼 두어 개, 낡은 주걱 하나, 장난감 자동차 하나를 더 보태어 넣어주면 모래밭에 앉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고, 한가득 쏟아놓은 모래장난감들은 유빈에게 같이 어울려 놀 친구, 언니, 오빠들을 불러주었다. 유빈이는 모래놀이를 통해서 여럿이 함께 노는 법을, 장난감을 나누어서 갖고 노는 법을 배웠다.
모래로 케이크를 만들어 나뭇잎과 꽃잎으로 장식하고 나뭇가지 몇개 주워와서 초라고 꽂아놓고 신나게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 작업 하나로 유빈이는 미술과 음악 공부를 동시에 했다. 모래 떡 만들어서 떡장사 놀이를 하며 유빈이는 "3천원 임다~~"하며 사회를 익혔다. 좀 더 커서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터널과 길을 만들었다. 모르긴 해도 그 과정에서 협동을 익히고 공간과 방향에 대한 개념도 터득했을 것이다. 맨발로 모래밭을 뛰어다니며 촉감을 느꼈고, 그것은 유빈이의 뇌를 자극하기도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모래밭은 가장 가깝고 친숙한 자연이 아니었을까. 비싼 놀이학교 등에는 실내에 깨끗한 모래함을 설치한 곳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곳엔 바람이 없고, 꼬물꼬물 기어가는 개미도 없고, 근처에 이파리를 딸 만한 나무도 없을테고... 어쩐지 시시하지 않은가.
모래밭이 없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좀 착잡하고 씁쓸하다. 내년이면 유빈이는 여섯살, 어쩌면 모래밭에서 놀만큼 놀았다고 볼 수 있는 나이다. 이제 슬슬 모래밭을 졸업할 나이인지도... 그래서인지 아파트 안에서 유빈이보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 더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모래가 더럽다고 하는데, 예전에 TV 뉴스에서는 모래보다 스펀지 타일이 더 비위생적이라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모래는 바람에 마르고, 햇볕에 어느 정도 소독도 되는데, 스펀지 타일은 열을 받으면 유독성분이 나올 수도 있고 비에 젖으면 쉽게 마르지 않아서 타일 안쪽이 부패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냥, 보기에만 좀 깔끔해 보일 뿐이다. 결국은 어른 입장에서 모래가 골치가 아프기 때문에 없애는 것 뿐이다. 집안에 모래를 묻혀오고 놀이터 여기저기에 모래를 흘리고 다니는 아이들 모습이 신경에 거슬리기 때문인 것이다.
모래가 스펀지 타일보다 비위생적이라고 쳐도, 좀 우습다. 모래보다 비위생적인 것 천지인 이 세상에서,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위생에 그렇게 신경을 쓰고 싶다면 당장 대기오염, 수질오염, 먹거리오염에 대해선 왜 그리 너그러운가 말이다. 그것도 가만히 보면 공기가 나빠지고 물이 좀 더러워지고 먹거리가 오염되는 쪽이 어른들이 생활하는 데 편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으로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놀이터 모래밭 말고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걱정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수입쇠고기 불매하고 친환경 먹거리를 구매함으로써 올바른 농부들을 응원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분리수거를 잘하고, 쓰레기를 줄이고, 자연을 파괴하는 개발에 반대하고, 교육이 폭력이 되지 않게 조심하고....
모래밭 자리에 깔린 바둑판 무늬의 스펀지 타일을 보고 있자니, 아이들에게 또 즐겁게 뛰놀 자연을 하나 빼앗은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우리 어른들의 치졸하고 옹색한 모습이 거기 있는 것 같아서 유빈이 앞에서 공연히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