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꺽다리 기사와 땅딸보 기사 ㅣ 봄봄 아름다운 그림책 16
비네테 슈뢰더 지음, 조국현 옮김 / 봄봄출판사 / 2009년 8월
평점 :
별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읽고 나서는 생각이 꼬리를 길게 이어가는 책이 있지요. 이 그림책이 그런 경우였어요. 내용도 그렇지만 그림도 썩 마음에 들었고, 그림 사이사이에 배열된 글들이 그림을 방해하지 않는 독특한 편집도 눈에 띄네요. 『악어야, 악어야』와 『보름달의 전설』이라는 그림책의 그림을 그린 비네테 슈뢰더의 그림책인 걸 보면,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게 저의 불찰이었어요.
표지의 그림을 보면 꺽다리 기사와 땅딸보 기사가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어요. 그 뒤편으로 보이는 성과 노을 진 붉은 하늘에서 비네테 슈뢰더 특유의 낯설고 조금은 기괴한 환상의 세계를 엿보게 돼요. 속표지에는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두 기사의 성 위로 날아가는 한 마리 검은 새가 보여요. 노란 구슬 같은 것을 하나 떨어뜨리고 가는 데, 이것이 바로 문제의 발단이랍니다.

사이좋은 두 기사네 부부. 너무 사이가 좋아서 두 성 사이의 벽도 허물어버리고 갑옷이 녹슬어 갈 정도로 각별한 사이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성 사이 벌판에서 꺽다리 기사의 아내 로네가 새싹을 발견했어요. 리네는 닭똥을 모아 거름을 주고, 땅딸보 기사의 아내 리네는 물을 주었죠. 새싹은 쑥쑥 5미터나 자라나 아름다운 꽃을 피웠어요. 꽃은 아침에는 꺽다리 기사네 쪽을 바라보고 낮에는 꼿꼿이 서 있다가 저녁이 되면 땅딸보 기사네 쪽을 바라보았죠. 두 부부는 기뻐하며 날마다 꽃 아래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즐겁게 지냈대요.
그런데 뭐가 문제였을까요? 언제부터인가 로네는 꽃이 자기네 성 쪽만 바라보았으면...하는 욕심이 생긴 거죠. 그 때부터 사이좋았던 두 기사 부부 사이로는 욕설이 오갔어요. 욕설이 괴물의 형상으로 서로를 향해 날아가는 저 그림을 보세요.

양쪽 모두 얼굴이 붉어진 채 욕심을 다스리지 못한 네 사람은 싸움의 원인이 된 꽃마저 망가뜨리죠. 그렇게 뿌리가 뽑히고 줄기가 꺾이고 잎이 찢기는 동안에 꽃은 후두둑 꽃씨 몇 알을 뿌리지요.

꽃을 잃은 두 기사는 마침내 얼음처럼 차가운 사이가 되어버렸어요. 두 사람 사이에 서 있는 얼음 벽을 보세요. 두 기사는 물론이고 두 기사 뒤편에 서 있는 로네와 리네 역시도 추위에 떨며 서 있는 것이 보여요. 검은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는데, 눈이 쌓이는 만큼 두 기사의 마음에도 후회가 쌓이진 않았을까요.
다음 해 봄, 놀랍게도 정원에 무려 14송이나 되는 꽃이 피었어요. 꺽다리 기사네 일곱 송이, 땅딸보 기사네도 일곱 송이. 꽃을 바라보며 두 기사는 서로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앞 속표지에 나왔던 검은 새가 또 꽃씨 한 알을 물고는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어요. 그 꽃씨가 우리가족 사이에 혹은 나와 친구사이에 아니면 우리집과 이웃 사이에, 더 크게는 우리마을과 이웃마을 사이에 떨어진다면 어쩌시겠어요?
이 그림책을 덮으며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생각보다 현미경으로 뭔가를 관찰할 때 쓰는 얇디얇은 커버글라스가 먼저 떠올랐어요. 학교 다닐 때 생물시간엔가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할 기회가 있었는데, 커버글라스가 얼마나 얇던지 조금만 세게 쥐면 금방 갈라지고 말았거든요. 커버글라스를 잘 덮으려면 손에 힘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어요. 평화라는 게 그 커버글라스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아슬아슬하고 조심스러운 그런 것. 그래서 아주 세심하게 돌봐야 하는 것. 그래서 깨뜨리지 않으려면 내 힘을 모두 빼야할지도 모르는 그런 것.
또 양쪽에 똑같이 일곱 송이씩 피어난 그 꽃들을 바라보게 되네요. 만약에 어느 한 쪽이 한 송이라도 더 모자라거나 혹은 더 많았다면 화해가 이루어졌을까요. 어둡고 춥던 겨울 동안 두 기사의 마음에 쌓였던 후회만으로도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요. 평화의 조건은 공평과 조화였던가요. 우리 세상이 공평하고 조화로운 세상인지 가만히 돌아봅니다. 우리집에 있는 일곱 송이의 꽃이 이웃집에도 있는지, 우리 마을에 있는 일곱 송이의 꽃이 이웃마을에도 있는지, 아시아에도 유럽에도 아프리카에도 세상 구석구석까지 일곱 송이의 꽃들이 있고 그 꽃들이 모두 무사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