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유빈이랑 구립도서관에 들러서 그림책을 고르다가 <방귀소녀 우차차>(오토모 야스오 글,그림/한림출판사)라는 책을 발견했다. 우리 옛이야기 중 '방귀 잘 뀌는 며느리'라는 이야기가 있고, 지난 해였나? <방귀쟁이 며느리>(신세정 글,그림/사계절)를 더욱 재미있게 읽은 터라 궁금증이 발동해서 그 자리에서 유빈이랑 읽고는 대출해왔다.
표지부터 비교해보면 <방귀소녀 우차차>는 돛단배를 타고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가르며 당당하게 나아가는 그림이다. 마치 방귀소녀 우차차를 호위하듯 앞서가는 돌고래 두 마리와 배 주변을 날고 있는 새도 세 마리 보인다. 부끄럽다거나 창피하다는 따위의 감정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방귀쟁이 며느리>는 우리 민화 어디쯤에서 빼다 박은 게 아닐까 싶을만큼 옛스러운 그림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우리 옛그림에 대한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아하, 이 그림은 누구의 무슨 그림과 비슷하구나!'라고 말하진 못해도 어쩐지 눈에 익은 그림들이다. 표지 그림은 가채를 올려 한껏 멋을 낸 아리따운 여인이 살짝 웃음지며 오른 손에 종을 들고 흔드는 모습이다. 주변엔 아리따운 꽃들이 흐드러지고 왼쪽 구석엔 하얀 학도 한마리 날아가고 있는데,, 저렇게 종을 딸랑딸랑 흔들며 눈웃음까지 흘리면서 "자, 조심하세요~~ 저, 가스 분출할 거예요~~"라고 애교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표지에서만큼은 두 책 모두 좀 민망하고 창피한 "방귀"라는 생리작용을 꽤 자신있게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뭐, 방귀쟁이 며느리가 위풍당당함에 있어서는 방귀소녀 우차차에 한 수 밀리고 있는 감이 없지 않지만 말이다.

그건 아마도 우차차와 며느리가 놓여 있는 배경적 특성 때문인 것 같다. 방귀쟁이 며느리의 경우 우리가 다 알다시피 여성들이 규방의 도리와 칠거지악 등등의 사슬에 묶여 있던 조선시대 어디쯤이 그 배경이다. 어려서부터 '방귀를 참말로 잘 뀌'는 사실을 비밀로 단속하며 자라야 했던 주인공은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와 신랑 앞에서 몸을 베베 꼬아가며 얼굴이 누렇게 뜨고 일그러지도록 방귀를 참고 또 참는다. 며느리가 방귀 참는 대목의 그림을 보면서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며느리의 그런 사정을 듣고는 "방귀를 참으면 쓰간디? 뀌어라, 뀌어"하며 흔쾌하게 방귀를 허했던 시부모는 며느리의 과격한 방귀 한 방을 맞고는 그만 친정으로 쫓아내기에 이른다. (시부모가 가스 분출을 허락했다고 또 굳이 당장에 그 앞에서 방귀를 뀔 건 또 뭐람?? )
며느리의 센 방귀가 그 능력을 인정받는 것은 친정으로 쫓겨가던 길에 높다란 나무에 열린 청실배를 방귀를 날려서 따주고 비단과 놋그릇을 얻고 나서다. 그 비단과 놋그릇으로 풍비박산난 집안을 부유하고 풍족하게 다시 일으켜 세운 후에야 며느리는 딸랑딸랑 종을 울리며 수줍은 듯 베시시 웃으면서 생리작용으로 인한 민생고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 결국 며느리의 위대한 방귀는 딱 거기서 멈춘다. 남자네 집안을 부유하게 일으켜 세운 선에서, 딱 거기서. 사회정의 실현이나 공공의 적을 무찌르는 데까지는 근처에도 못가고, 그저 조신한 조선시대 규수의 방귀 극복기 쯤에서 멈추고 더 나아가지를 못한다.
그에 비하면 '방귀 소녀 우차차'는 훨씬 사정이 나은 편이다. 시간적 배경이야 '옛날 아주 먼 옛날'이니 그게 '방귀쟁이 며느리'가 살던 때보다 앞선 때인지 뒤선 때인지야 알 수 없지만 뭐, 공간이 다른 바에야 시간적 배경의 앞뒤를 따지는 게 별 의미가 없지, 싶다. 우차차가 태어나 자라나는 곳은 '푸른 바다에 둘러싸인 포라포라 섬'이고 '조개와 물고기가 산더미처럼 잡히는 풍요로운 곳'이며 '나무에는 달콤한 열매가 가득 열리고, 사람들은 모두 즐겁게 살'아가는, 그야말로 지친 현대 도시인들이 꿈꾸는 파라다이스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 가무잡잡하고 두루뭉실한 사람들의 모습도 남태평양이나 아니면 필리핀이나 말레이지아 부근 어디쯤의 작은 섬을 떠올리게 한다. 방귀쟁이 며느리에 비하면 얼마나 건강하고 자연과 밀착한 배경인가!!! 그래서인지 태어나자마자 첫울음과 함께 방귀를 터트렸다고 포라포라 섬의 말로 '방귀'란 뜻의 '우차차'란 이름을 얻는 장면에서도 구김이나 조롱의 느낌이 전혀 없다. 방귀쟁이 며느리가 별당 안에서 자기의 방귀를 1급 기밀사항 쯤으로 입단속을 해야 했던 것과는 참 천지차이다.
그래서일까? 우차차는 자기가 가진 남다른 능력을 일찌감치 발휘하기 시작한다. 숲에서 갑자기 뛰어나온 멧돼지를 날려버리고(그것도 자신있게 엉덩이를 든 자세로), 바다 속에 뛰어들어 방귀로 참치 떼를 잡고... 마침내 평화로운 마을을 위협하는 존재 -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나타나서 아이 하나를 잡아가던 괴물 -을 물리친다.
당,연,히, 막강한 위력을 자랑하는 두 방귀 중에서 난 우차차의 방귀에 한 표를 던진다. 우차차가 살아가는 그 건강한 배경이 너무 부럽기 때문이다. 괴물을 물리쳐달라고 온 마을 사람들이 감자를 찌고, 굽고, 튀겨가며 우차차의 방귀를 응원하고 격려하고, 그에 호응하여 '구운 감자 88개, 찐 감자 99개, 튀긴 감자 100개 하고도 1개 더'를 먹어치우는 우차차의 씩씩한 먹성을 보고 있노라면 온갖 격식과 허례에 빠져버린 우리의 답답한 모습이 우차차의 방귀보다 더 웃기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아직도 '방귀쟁이 며느리'처럼 산다. 며느리 방귀처럼 세지도 않으면서 아직도 내 방귀는 부끄럽고, 민망하고, 숨기고 싶은 비밀이다. 아무도 모르게, 되도록이면 소리도 냄새도 없이 살짝 나와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방귀'에 대한 우스개 소리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걸 보면 뭐, 나만 그런 건 아닌가 보다. 편하게 말 트고 지내는 사이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방귀를 트고 지내는 사이라는 말은 빈 말이 아니다. 방귀까지 트고 지내는 사람이 몇이나 있나... 음,,, 결혼한지 17년을 넘어가는데도 남편 앞에서 뀌는 방귀도 아직 떳떳하고 당당하지 못한 내 주변머리로 무슨.....
얼마 전 TV의 한 토크 프로그램에 박성광이 나와서 신봉선이 개그맨 선후배와 동료 앞에서 방귀를 거침없이 뀔 뿐아니라 심지어 방귀로 장난을 친다며 폭로(?)하던 것이 생각났다. 신봉선은 녹화가 끝나고 나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그 자리에선 그냥 실실 웃고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TV를 보던 나는 '어떻게 그럴 수가!!'하는 뜨악함과 뭔가 금기가 깨지는 현장을 목격하는 듯한 개운함(?)을 동시에 맛보았다.
쓰다보니,, 뭐야, 결론은? 난 '방귀쟁이 며느리'고 신봉선은 '방귀소녀 우차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