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두물머리
이윤기 지음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굵직한 선을 가진 소설을 읽었다. 안이한 마음으로 햇볕 따뜻한 방에 앉아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몽롱한 졸음 속으로 빠져들 때, 잠이 확 달아나리만큼 호되게 죽도로 얻어맞은 기분이다. 하긴 나태함에 푹 젖어 있는 내게 헤매어 가는 게 인생이란 걸 가르쳐 주는 것만도 소설들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책을 읽으며 책 속에서 삶에 대한 심오한 진리나 명쾌한 해답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제대로 헤매는 일'만이라도 놓치지 않고 계속할 수 있게 해주기를 기대한다. 책을 읽고 나면 난 늘 한 가지 물음과 마주 한다.
'너는 어떠냐?' 글 속의 인물들(혹은 그 글을 쓴 작가)은 뭔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자기를 정립해가려 애쓰고, 때론 떠나고 때론 돌아오며, 늘 자기자신을 들여다 보며 살아가는데 '너는 어떠냐...'고 한다. 그렇게 내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과 잠시 마주하고 나면 세상에 대해, 산다는 일에 대해 조금 겸허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윤기의 소설을 읽으며 난 다른 소설을 읽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작가의 소리가 대성일갈처럼 들리기도 하고, 선방의 죽도와 같은 일침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 소설집 속의 여러 단편들이 내게 던지는 질문들은 다른 소설들 보다 좀더 구체적이고 그래서 좀더 섬뜩했다.
헤매임이라니... 그의 소설에서 그건 당치않은 이야기다. 그렇게 몽롱하고 애매한 분위기는 그의 글 속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그의 글들은 우리의 정곡을 찌르고 허점을 환하게 드러내며 어디로 도망칠 생각 하지 말고 나 자신을 똑똑히 들여다 보라고 한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허상들을 거둬내고 내 눈을 맑게 하라고 한다. 그렇게 맑아진 눈으로 짙은 안개 속을 뚫어지게 보고 있노라면 뿌옇게 길이 보일 것이고 오류의 미로 속에 갇히거나 벗겨진 허상을 다시 뒤집어 쓰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러면 헤매임을 좀 줄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대부분의 소설들이 절실한 무엇인가를 찾아가기 위한 헤매임의 경로를 보여준 거라면 <두물머리>라는 이 소설집은 그 절실한 무엇인가에 근접하기 위한 표지판 혹은 여행시 주의사항 또는 정확하진 않지만 참고가 될 약도 같은 것이었다. 이번에 만난 그의 글들이 종종 나에게 화두로 떠오를 것 같다. 죽도로 얻어맞았으나 기분은 말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