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정환 옮김 / 자유문학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를 처음 만났던 게 대학교 2학년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벌써 14년 쯤 전의 일인가 보다. 그 때 그의 소설이 참 인상깊었다. 그의 성에 대한 묘사는 당시로선 꽤 노골적이었지만 자극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성이라는 것이 이렇게 인간 존재의 깊은 내면을 투영해줄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덮으며 역시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때 만큼의 우리들 내면의 고독에 대해서 착잡함을 느낀다. 분주하고 번잡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군중 속에서 고독한 개인에 대해 하루키는 작중 '나'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어째서 모두 이렇게까지 고독해져야만 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든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고독해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고 각각 타인의 내부에서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는 지금까지 고독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무엇때문에? 이 혹성은 사람의 적막감을 자양분으로 삼아 회전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 채로 지구의 인력을 단 하나의 연줄로 삼아 쉬지 않고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스푸트니크의 후예들을 생각했다. 고독한 금속 덩어리인 그들은 차단막이 없는 우주의 암흑 속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가 순간적으로 스치면서 영원히 헤어져 버린다. 아무런 말도, 아무런 약속도 없이.--

작중 스미레가 레즈비언이라든가, 동성애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하루키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치되지 못하고 엇갈리는 코드 - 그것이 레즈든 동성애이든 무엇이든 간에 - 와 이를 통해 우리 생이 끝날 때까지 짊어지고 살아가야할 고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상실의 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이라는 것은 하루키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하루키 소설에 나타나는 성적인 묘사들은 독자들에게 무겁고 심각하며 들뜨는 열정이 없다. 엇갈리는 코드에 대한 안타까움은 다음 글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 이 여자는 스미레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성욕을 느낄 수 없다고 했다. 스미레는 이 여자를 사랑하고 성욕도 느끼고 있다. 나는 스미레를 사랑하고 성욕을 느끼고 있다. 스미레는 나를 좋아하기는 해도 사랑하지는 않고 성욕을 느끼지도 않는다. 나는 익명의 여자에게 성욕을 느끼기는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복잡하다. 마치 실존주의 연극의 줄거리 같다. 모든 상황은 거기에서 멈추어 어느 누구도, 그 어디에도 갈 수 없다. 선택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하루키는 그 고독과 적막감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엇갈리기만 하는 코드에 대해 괴로와 하고 갈등하며, 코드가 딱 들어맞는 다른 세계 - 스미레가 그리스의 외딴 섬에서 사라져버렸던 - 을 꿈꾸기도 한다. 엇갈리는 코드끼리의 충돌은 참고 견뎌내기 힘든 고통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하루키는 작중 스미레의 글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 (전략) 충돌(쿵!)을 면하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렵다고? 아니, 순수하게 논리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간단하다. C'est simple. 꿈을 꾸는 것이다. 계속해서 꿈을 꾸는 것. 꿈의 세계로 들어가 그대로 나오지 않는 것. 그 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

우리는 모두 스푸트니크호를 타고 우주로 나가 회수되지 못해 우주를 돌아야만 하는 개 라이카같은 존재임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둡고 적막한 우주에서 돌아갈 길을 잃고 떠도는 고독한 존재라는 걸 잊기 위해 환상을 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