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9일  

그 날 남편은 새벽 2시 20분 쯤에 들어왔다. 저녁에 전화로 "나, 지금 들어가는데 아직 저녁 안 먹었어."하길래 찌개 끓이고 갈치 구워 놓았더니 "갑자기 일이 생겨서 집으로 가다가 다시 나가고 있어.  좀 늦을 거야."했다.  구워놓은 갈치는 그대로 뒷베란다로 쫓겨났고 찌개는 조용히 식어갔다.  

새벽 2시 20분에 들어온 남편이 "나 배고파.  밥 있어?"한다.  음..  귀찮다거나 황당하다는 생각보다 먼저 '이 시간까지 밥도 굶고 뭐 했나..'하는 뜨악함이 먼저 스쳤다.  쫓겨났던 갈치를 불러다 다시 데우고 찌개는 가스레인지 위에서 쿨럭쿨럭 거리며 몸을 덥혔다.   

"이 시간까지 밥도 못먹고 뭐했어?"
"박OO선생님이 보자고 하셔서 청담동에서 술 좀 했지."
"빈 속에?"
"그렇지, 뭐..."
"밥이랑 바꿀 만큼, 배고픔을 참아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어?"
"그냥..   아, 어쩌면 나, 다음달 쯤 중국 가게 될지도 몰라."
"왜?"
"확실한 건 아닌데 일이 좀.." 

아이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에 식탁에 앉아 중국에 가게 될지도 몰라로 시작해서,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이 다니던 회사 돈을 횡령해서 해외로 도피했대를 지나 사업이라는 게 그렇더라구 쯤에서 잠시 멈칫했다가 업무용 차를 하나 마련하고 직원을 한 명 더 뽑아야 될 것 같아 라는 희망으로 마무리된 밤이었다.  

난, 남편의 이야기를 듣다가 '이 사람, 싸우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덩치 커다란 남편이 측은해 보였다.  살다보면 미울 때도 있고(어쩌면 미울 때가 더 많고), 이러쿵 저러쿵 구시렁구시렁 불만이 쏟아져 나올 때도 있고, 왜 이렇게 사나.. 할 때도 많지만.... 그 날 밤만큼은 남편은 성 밖에서 불 뿜는 100톤짜리 용과 싸우고 돌아온 기사였고, 나는 성 안에서 세상 모르고 조잘대고 투덜대며 살아가는 철없는 마누라였다.  마흔이 넘도록 세상과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다는 게, 너 참 못났구나 하고 머리를 쥐어박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참 운이 좋았구나 해야 하는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연봉 1억 받는 마누라가 있고 BMW를 몰고 다닌다는 후배를 보면서 남편이 "난 참 지지리 복도 없지!"한다고 해도(물론 그렇게 표현한 적은 없지만 속으로 부럽기는 했을 거다) 한 10%쯤 이성적으로 이해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결코!!! 감정적 폭발에 대해선 책임을 질 수 없으며 경제적 이윤 창출 능력만을 가지고 마누라를 비교한 괘씸죄에 대해서는 90% 용서가 어려울 게 틀림없다) 

자려고 누웠는데 전인권이 부른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는 노래가 맴돌았다.  '난 아직 세상을 모른다고.....그것만이 내 세상~~'하던 노래 가사가 그날 밤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네 세상은 너무 작구나,,, 그렇지, 섬사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