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6일
남편은 8시에, 명보는 9시 반에, 유진이는 11시 반에 집을 나선다. 명보랑 유진이가 좀 일찍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한 번에 끝내주면 좋을텐데, 이 녀석들이 방학이라고 늦잠의 여유를 누리고 싶으시단다.. 에효.. 덕분에 내 아침 시간은 엉망진창이다. 조각조각 나눠지고 잘라져서 오후를 맞고 나면 허무해진다고나 할까? 그래도 학생 시절 방학 때가 아니면 언제 늦잠을 마음껏 자보겠냐 싶어서 그냥 내버려둔다.
오후엔 유빈이 데리고 미장원에 갔다. 유빈이 앞머리가 길어서 눈을 찌르기 일보직전이고 뒷머리도 지저분해서, 좀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유빈인 미장원을 좋아한다. 미장원 의자에 앉아 꼼짝도 않고 거울만 응시하며 있어서 아줌마들과 헤어디자이너들의 칭찬을 받는다. 그런데 난 그게 공주병 증세 중 하나라는 걸 알기에 누가 칭찬을 해줘도 엄마인 나는 좀 심드렁하고 있다. 드라이까지 하고 나니 유빈이도 꽤 기분이 좋은 듯. 파카 모자도 안 쓰겠단다. 머리가 망가진다나.. 누구를 닮아 저러는 건지. (나는 절대 아니다!!)
미장원에서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다. 지흔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유빈이를 반겨준다. 지흔이는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엄마에게 빨리 도서관 가자고, 유빈이 보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며 졸랐나보다. 점심까지 다 챙겨먹고, 미장원까지 들러서 한껏 여유부리다 온 게 미안해졌다.

오후 네시 경이 되자 도서관 마더구스 모임 엄마가 아이들에게 영어그림책을 읽어줬다. 읽어준 그림책은 <Sunshine on My Shoulder> 존 덴버의 올드팝송이 그림책과 CD로 나온 거였다. 그 엄마가 한차례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나서 CD를 틀었다. 정말 정말 오랜만에 존 덴버의 노래를 듣는 거였다. 순간 도서관에 모든 소음이 사라졌었다. 아이들조차도 잠잠해졌다. 엄마들은 지난 날 기억 속 어딘가 쯤으로 휘리릭 날아가버리고, 잊고 있던 기억들이 샘물처럼 흘러나와 가슴을 촉촉치 적시는 걸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저녁으로 기우는 창밖을 내다보며, 들고 있던 커피잔의 따스함에 새삼 고마워하며, 그 먼 시간을 건너 여기에 서 있는 내 자신을 기특하다 쓰다듬으며, 지난 날 따뜻했던 누군가와 기억 속에서 해후하며.. 나도 그렇게 존 덴버의 노래 속으로 빠져들었다. 영어그림책 읽기가 끝나고 나서 엄마들이 그 그림책 주변으로 모였다. 그림은 왜 저렇게 예쁜 거야..
영어그림책 읽기가 끝나고 나니 도서관의 꿈나무 모임 엄마들이 '만화경 만들기'를 아이들과 함께 해주었다. 지흔이 엄마도 꿈나무 모임의 일원이라 유빈이와 지흔이를 비롯한 유아들 지도를 맡아줬다. 아이들의 서툰 손으로 만든 만화경이지만 불빛을 향하고 들여다보면 제법 참 예쁘다. 지난 해 11월 '나랑 같이 놀자'라는 도서관 행사에서도 유빈이는 이 만화경을 만들었었는데, 가끔 우울할 때 커피 한 잔 타서 마시면서 만화경 속 예쁜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좀 위로가 되었었다. 이제 만화경이 두 개가 되었으니 두 배의 위로를 받게 될 듯.. ^^
오늘도 어둑해져서야 책 세권을 빌려서 도서관을 나섰다. 집에 돌아와 부지런히 밥하고 순두부 찌개도 끓이고 있는데, 명보가 돌아왔다. 오늘 영어단어 시험에서 68문제 중 3개밖에 안틀렸다며 자랑이다. 명보는 영어와 국어 쪽이 약하다. 과학이랑 수학은 그나마 흥미있어 하는 편인데 영어는 명보에게 완전 독이다. 그러니 단어 시험에서 3개밖에 안틀렸다는 건 최고의 결과를 얻었다는 걸 의미한다. 이제 내 키를 살짝 넘어선 아들을 안아주고 등을 토닥거려줬다. 우리집 세 남매 중 만약 제도권 공교육에서 탈피시켜야 할 아이를 꼽으라면 그건 명보다. 끌리는 것에만 집중하는 성향이 강해서 모든 것을 잘해야만 하는 학교 시스템이 명보에게는 좀 버겁고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직접 만져보고 실험해보고 결과를 확인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학교와는 맞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안학교 쪽도 살짝 기웃거려봤었고, 좀 더 자유롭게 홈스쿨링을 해볼까 생각해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명보에게 살짝 운을 떼어봤더니 싫다고 하고, 목표로 하고 있는 고등학교도 있으니 좀 기다려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겁쟁이인지라 꿈만 꾸고 상상만 하고 있다.
권정생님의 <우리들의 하느님>을 읽고 있다. 지난 가을 도서관에서 권정생님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권정생님 책을 거의 다 읽었는데, 이 책만 못 읽었다. 오늘 아침 짜투리 시간에 읽다보니 64쪽에 엄마 까투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림책 <엄마 까투리>는 이 때부터 준비된 이야기였나 보다. 권정생 님이 우리 곁을 떠나셨단 사실이 또 새삼 안타깝다. 그러나 살아계셔서 지금의 이 세상을 보신다면 무척 괴로워하셨을 거란 생각도 든다.
그래도... 그리운 건 그리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