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요란 푸른아파트 문지아이들 96
김려령 지음, 신민재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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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도 안 나오던 하얀 포니2, 대학 입학 선물로 지금의 남편이 사준 스누피가 그려진 양철필통, 탈수단계에 들어서면 헬리콥터의 이착륙 소리를 내던 세탁기, 열일곱 어느 날 생일선물이라며 그 아이가 주었던 보라색 손목시계, 늘어져서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어버려 너무나 서운했던 좋아하던 노래가 담긴 카셋트 테이프, 집에 도둑이 들어 가져가 버린 소니 워크맨....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세상에 넘쳐나는 게 물건들이고 시시각각 새로운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그냥 정이 붙는 것들이 있다.  하얀 포니2를 폐차장에 두고 돌아섰을 때에도 허전함에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고, 수명을 다한 세탁기를 앞에 두고 우리 아이들 기저귀 빨아 키워준 게 넌데, 그동안 참 고마웠는데, 못쓰게 되었다고 이렇게 내치게 되어 참 미안하다고 공연히 눈물을 찔끔거렸었다.   그런 것들 속엔 내 삶의 어느 한 부분이, 그것들과 함께한 그 동안만큼의 기쁨과 한숨이 엉겨 붙어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버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다 커버린 어느 날, 어쩐지 그리운 마음에 어릴 적 다니던 초등학교를 찾아갔던 날 새로 지은 낯선 건물이 나를 맞이했을 때, 예닐곱 살 때부터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 살던 집이 허물어져 밝은 대낮에 속살을 다 들어내고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봤던 때에는 내가 곱게 간직했던 그리움이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모욕감을 느끼고 황망히 돌아섰었다.

이런 기억들을 하나하나 들춰내는 이 책은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니 적극적인 개입도 마다하지 않는 낡은 아파트 네 동과 상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기동이와 기동이네 할머니, 만화가 천기호 선생, 교장선생님인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단아는 마치 세상 횡포에 상처받고 쫓겨 와 푸른 아파트 안에 겨우겨우 자기 둥지를 잡고 살아가는 작은 새들처럼 보인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고양이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게.  푸른 아파트가 자기 안에서 힘들어도 멈추지 않고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모습은 그래서 더욱 따뜻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세상에 나는 것들은 다 지 헐 몫을 가지고 나는 것이여.  허투루 나는 게 한나 없다니께.  고 단단하던 것들이 이렇게 제 몸 다 낡도록 사람들 지켜 주느라 얼마나 고생혔냐.  인자 지 헐 일 다 하고, 저 세상 간다 생각허니. 짠허다.” (p.168) 

살아가는 일의 난감함과 누추함을 “제 몸 다 낡도록” 고생한 어떤 것들에게 위로받으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처럼 코끝이 쨍하도록 추운 날 집에 돌아오면 언 발과 손을 녹여주던 따뜻한 아랫목에, 또는 비염으로 며칠을 콧물로 고생하던 날 내 곁을 지켜주던 두루마리 화장지에, 추운 거리를 걷다가 친구와 함께 나누어 먹던 따끈한 호빵에, 서러운 이별을 하고 외로워 미칠 것 같던 날 묵묵히 대롱대롱 매달린 채 내 곁을 지켜주었던 그날의 작고 천진한 핸드백에, 오늘 바른 립스틱에, 내 모든 넋두리와 하소연과 투덜거림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받아주는 이 컴퓨터에.

오늘은 나도 기동이 할머니처럼  “니도 고생 많었다.” 고 말 건네고 따뜻하게 쓰다듬고 토닥여주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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