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히 "한 번 시험이나 쳐보게 하자"는 남편의 주장 때문에 일이 벌어졌다.
"남들 초딩때부터 한다는 외고준비를 유진인 하나도 안했는데, 어차피 떨어질 거 뭐하러 힘빼고 시험치게 하냐"는 나의 반발을 남편은 간단하게 짓밟았다.
남편 말에 의하면 나중에 '그 때 한 번 외고 시험 쳐보기라도 할걸'이란 후회를 없게 해야 한다나? 유진이의 의사를 물었더니, 한 번 해보지 뭐.. 한다.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는 눈치다.
그래, 나도 큰 손해 볼 건 없다 싶었다. 당연히 떨어질 거라는 걸 알고 덤비는 거니까, 낙방했다고 받을 충격도 없고, 시험보는 날 유진이 데리고 왔다갔다 하는 건 말 꺼낸 남편이 알아서 책임지고 해줄테니까..
근데, 외고 원서 접수와 시험날을 앞두고 남편이 몽골로 출장을 떠나버린거다. 이런.... 원서접수하는 날은 그래도 다녀올만 했는데, 시험치르는 날엔 죽는 줄 알았다. 시험 전 날 친정엄마 오셔서 우리집에서 주무시고 다음 날 오전까지 유빈이를 봐주셨다. 유진이랑 나는 시험날 1시간 10분 전에 집에서 택시를 타고 출발했는데 길이 너무 막혀서 1km 전쯤에 택시에서 내려 학교까지 죽어라고 걸었다. 그런데 그 학교가 어찌나 높은 곳에 있는지 헉헉대며 오르는데, 혹시라도 시간 안에 들어가지 못할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싶은 생각에 유진이 손 끌고 그냥 집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이었다.
유진이는 특별전형과 일반전형에서 모두 떨어졌다. 그런데 떨어진 건 떨어진 건데 좀 찝찝한 게 있다. 유진이가 외고 시험을 치르고 집에 돌아온 날, 내가 물었다.
"외고 면접 봐보니까 어땠어?"
"뭐, 그냥 언어랑 사회 답 말하고, 영어 문장들 읽어보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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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이상적인 걸까? 아이의 잠재성, 적성, 성실성, 가능성, 꿈, 희망,,, 이런 거에 대한 질문은 하나도 없었다는 게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을 뿐더러, 딸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외고'라는 데가 무지 시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뭐야, 결국,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조건 공부만 잘 하면 된다는 거 아냐? 부모의 열성으로든 극성으로든 돈으로든, 아이가 로봇이 되든 공부 외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든 어떻든 상관없다는. 에이, 뭐 그렇게 시시해...
며칠 전에 유진이가 슬쩍, '내가 너무 공부를 못한 것 같아'며 살짝 자책의 멘트를 날려왔다.(유진이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며 과고 공부를 했던 친구가 모 외고에 특별전형으로 붙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한 말이다) 하지만 난 안다. 유진이가 중1 겨울방학 때, 학원 외고반 중에서도 최고반에 들어가 공부했을 때의 그 삭막함을 경험했으니까. 단 3주만에 외고반을 그만두게 하면서, "우린 그냥 행복하자"고 딸과 함께 웃지 않았던가.
그래서 난 외고에 들어가기 위해 그 삭막한 중학생활을 한 아이들의 시간의 질보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하고 만화보고 음악듣고 그림 그리고 책을 읽으며 보낸 우리 딸의 중학 3년의 시간의 질이 결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딸에게 말해 줄 수 있었다. 그랬더니 우리 딸
"엄마,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하며 씨익 웃었다.
딸아, 엄마는 네가 성공적인 중학교 생활을 했다고 생각한단다. 너무 멋졌어.
고맙고,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