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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공주 ㅣ 힘찬문고 35
조지 맥도널드 지음, 김무연 그림, 이수영 옮김 / 우리교육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들은 모두 하나같이 완벽한 모습들이다. 재투성이거나 100년 동안 잠을 자더라도, 그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마음씨도 고울 뿐 아니라 역경 앞에서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하늘을 감동시키기도 한다. 그 인내와 착한 마음, 완벽한 미모에 대한 보상으로 그녀들은 백마를 타며 등장하는 멋진 왕자님을 만나 행복한 한평생을 보내게 된다는 게 주된 줄거리다. 외적인 상황이 그녀들에게 고난과 역경을 가져오지만, 그 역경과 고난이라는 게 오히려 그녀들을 더 돋보이게 하지 않던가. 그녀들에게는 그저 참고 기다리면 행복은 굴러들어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부족한 그녀들은 현대여성의 모델로는 기준미달이다. 그러나 그녀들이 가진 ‘힘’은 생각보다 훨씬 강해서 그녀들이 만들어낸 온갖 신드롬과 콤플렉스들을 생각하면 속았다는 불쾌함과 함께 아직도 이 사회 속에 건재하고 있는 공주에 대한 환상과 고정관념들에 한숨이 새어나오기도 한다.
여기 또 하나의 공주 이야기가 있다. <가벼운 공주>라는 독특한 제목이 <종이봉지 공주>만큼이나 눈에 확 들어온다. 그러고 보면 내가 공주 까부수기에 은근히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가 조지 맥도널드다. 지금 중3인 큰딸이 초등학교 2,3학년 때쯤 이 작가가 쓴 <공주와 고블린>이란 책을 무척 좋아해서 몇 번이고 다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쓴 루이스 캐럴과 <반지의 제왕>을 쓴 J.R.R. 톨킨이 좋아하는 작가였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공주와 고블린>이라는 책에서도 ‘아이린’이라는 이름의 공주가 등장하는데 ‘슈렉’의 피오나 공주처럼 파격적인 외모를 갖추지는 못한 아름다운 공주지만, 모험 속으로 용감하게 뛰어들어 문제를 해결하면서 성숙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벼운 공주>는 <공주와 고블린>에 등장하는 아이린보다 훨씬 더 독특하다. 고모인 마켐노이트 공주(사실은 사악한 마녀)의 저주 때문에 무게를 잃어버린 공주는 단순히 몸무게 뿐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무게를 모두 잃게 된다. 바로 이 ‘무게’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상상력이 이 책의 매력인 것 같다. 무게를 잃었기 때문에 공중을 둥둥 날아다니는 공주는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에 대한 정서적 공감과 소통이 불가능하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불가능한 공주는 아이러니하게도 한없이 가벼운 자기 세계 안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타인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기세계를 확장하는 일 자체가 고모의 저주로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책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공주에게 가장 좋은 일은 사랑에 빠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게가 없는 공주가 무엇엔가 빠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라고. 이런 공주가 자기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희생하고 있는 왕자의 노래를 듣고는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단순한 문장은 가벼운 공주가 타인과의 진지한 관계 맺기의 성공을 알리는 신호탄이고 이는 곧 그녀의 가벼운 세계에 금이 가고 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공주는 호수에 빠져 죽을 뻔한 왕자를 구해내고 생전처음으로 눈물을 쏟아내고 무게를 되찾는다. 작가는 ‘마침내 그 많은 일을 겪고 나서야 공주가 두 발로 서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마침내 많은 일을 겪고 나서’야 무게를 찾고 내 두 발로 설 수 있다는 그 말이 어쩐지 가슴에 와 박혔다. 우리는 모두 어쩌면 너무나 가벼운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함께 겪어가야 할 일들을, 너와 내가 함께 따뜻한 관계를 일구어야 가야 하는 일들을 아직도 충분히 잘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도 너무나 가벼운 사람으로 남아 있는 건 아닐까.
이 책에 <가벼운 공주>와 함께 <거인의 심장>이라는 동화가 한 편 더 들어있다. 트릭시위와 버피보브라는 남매가 우연히 거인의 나라로 들어갔다가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못된 거인 선더섬프를 물리친다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해를 맞이하러 가기 위해 가족을 돌보지 않는 종달새를 보고 부르는 아이들의 노래가 아름답고, 거인 선더섬프가 아주 어린 아이들을 잡아먹고는 그 죄책감을 씻기 위해 일요일에 희고 긴 양말을 신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이야기 마지막에 트릭시위와 버피보브는 거인의 심장을 쥐고 위협하면서 선더섬프에게 어린아이를 잡아먹지 않고 거인국 국경을 넘어오지 말라는 것과 함께 ‘앞으로 다시는 평생토록 일요일에 흰 긴 양말을 신지 말라’고 요구한다. 자신의 과오를 우스꽝스러운 방법으로 합리화하고 위로하는 우리 모습에 대한 풍자다. 일주일 내내 죄를 짓고는 주일에 교회에 가니까 자기는 착한 사람이고 구원받을 것이라 떠드는 사람과 선더섬프의 모습이 뭐가 다를까. 우리는 모두 거인 선더섬프의 희고 긴 양말을 가지고 사는 셈이 아닐까.
1800년대를 산 작가의 작품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당시로서는 꽤 새롭고 신선한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2000년대를 살고 있는 나도 뭔가 고전적인 분위기이면서도 새롭고 참신한 맛이 느껴지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재투성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손톱 밑이 까맣지도 않을 뿐 아니라 희고 매끈한 손을 유지한 신데렐라나 100년 동안 잠을 자고도 왕자님의 입맞춤 한 방에 침 흘린 자국이나 눈꼽 하나 달지 않고 냉큼 깨어나는 미녀보다는 훨씬 매력적이다. 아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