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짚문화 우리 문화 그림책 13
백남원 글.그림 / 사계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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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늙고 투박한 농부의 손이 보인다.  핏줄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손등, 거칠고 굵은 손마디와 노동에 단련된 뭉툭한 손끝 때문에 가만히 쓰다듬으면 어쩐지 애잔함에 빠져들 것만 같은 그런 손이다. 그 손이 짚을 엮어 새끼를 꼬고 있다.

이 책은 작지만 다부진 몸매를 가진 듯한 나이 지긋한 농부가 낫으로 벼를 베는 그림이 그려진 속표지와 첫 장의 지푸라기 그림,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있는 검버섯 자국이 짙은 주름진 얼굴의 할아버지와 짚신, 그 짚신을 신어보며 즐거워하고 있는 소녀의 세 컷의 그림을 제외하고는 모두 짚을 꼬아 짚신을 만드는 과정의 그림이다.  본문에 있는 17장의 그림 중에 15장의 그림이 짚 그림이거나 짚신을 만들고 있는 할아버지 손 그림이니 아이들 눈으로 보기엔 좀 심심하다 싶을 정도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 궁금했다.  요즘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빛깔로 칠해지고 다이나믹한 동선이 살아있는 그림, 사실화보다는 대상을 과장하고 단순화한 그림, 밝고 경쾌하고 어딘가 웃긴 구석이 있는 그림을 좋아한다는 걸 누구보다도 그림 작가가 더 잘 알 텐데 말이다.

그런데 천천히 시간을 들여가며 그림만 보면서 페이지를 넘기다가 아하, 하고 감탄했다.  이 책은 아이의 시선을 고스란히 담아낸 책이구나, 하고.  그러자 책의 글 내용과는 다른 이야기가 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도시에 사는 손녀는 할아버지 댁에 놀러왔을 것이다.  가을걷이 시기인 것 같으니까 아마 추석 때쯤이 아니었을까?  할아버지는 사랑스런 손녀를 데리고 논으로 간다.  그리곤 귀한 손녀에게 혹시 더러운 논물이라도 튈까봐 논 옆길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게 하고는 당신 혼자 논에 들어가 낫으로 써억써억 벼를 베었을 것이다.  논에서 혼자 벼를 베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속표지의 그림이다.  아이가 조금 심심하고 따분해하며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 그림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손녀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명절이라고 먼 도시에서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를 찾아온,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를 위해 짚신을 만들어 주기로 결심하셨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단순한 짚신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세대만이 알고 있는 삶의 비법이고, 이제는 다음 세대로 건너 이어지지 않을 할아버지의 향수이자 추억이며, 우리가 잊어선 안 될 할아버지 세대에서 멈춰버린 우리 전통의 자연관과 가치관이 아닐까. 

도시생활에만 익숙한 손녀의 눈에 할아버지가 지푸라기로 부리는 마술과 같은 일이 마냥 신기했을 것이다.  손녀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이 그림책 속의 그림이 오직 할아버지의 손과 짚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할아버지는 짚신을 만들며 손녀에게 사랑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자상하게 이야기를 해준다.  그게 바로 이 책의 글 부분이다.  아이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할아버지의 손놀림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에 놓인 까마득한 세대차이의 벽을 짚 하나로 훌쩍 뛰어넘는, 건너지 못할 세대간에 따스한 정이 오고가는 강이 흐르기 시작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책 <짚>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여러 가지 중 하나인 ‘짚’에 대한 정보그림책 쯤으로 여겼던 나에겐 참 신선한 충격이었다. 

할아버지는 손녀 앞에 완성된 짚신을 놓아주고는 짚을 엮느라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펴신다.  등줄기가 뻐근하고 눈이 침침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허리를 펴고 손녀가 자신이 만들어준 짚신을 환하게 웃으며 신어보는 모습에 뻐근한 허리도, 침침한 눈도 다 낫지 않으셨을까.  이 책의 맨 마지막 장, 손녀가 짚신을 신으며 웃고 있는 그림은 이 책에 담긴 유일한 할아버지의 시선이다. 

이 책을 읽고 엄마 생각이 났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시골도 아니고 대도시 중심가에 있었는데도 가끔 엄마는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알 수 없는 짚 무더기를 들고 오셔서는 바구니를 엮어서 고양이 집으로 쓰곤 했다. 그 때 엄마가 지푸라기 몇 가닥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양손을 쓰윽 비비면 마술처럼 단단하게 꼬인 끈이 되곤 했다.  일명 새끼 꼬기를 하신 건데, 하도 신기해서 나도 지푸라기 몇 가닥 쥐고서 엄마 흉내를 내보면 엄마 것처럼 야무지게 꼬이질 않고 허술하고 어설펐다.  그래도 앉아서 새끼를 꼬아보겠다고 끙끙대는 나를 보며 웃으시곤 하셨던 기억이 밀려왔다.  

네 살 배기 막내가 좀 더 크면 아이 손잡고 둘이서 짚풀 생활사 박물관에 가봐야겠다고 계획했었다.  체험 프로그램도 있는 것 같아서 아이랑 같이 하면 참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보고, 그리고 이 책 때문에 떠오른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생각해서  계획을 좀 수정했다.  짚풀 생활사 박물관에 가되, 아이랑 나랑 단 둘이 가지 않고 우리 시부모님이나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가는 것으로.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앉아서 아이가 체험프로그램을 해본다면 더 의미 있고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막내 아이에게 읽어주기엔 좀 수준이 높은 것 같아서 아직 읽어주진 못했다.  하지만 좀 더 크면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해주면서 읽어주고 싶다.  “할아버지가 지푸라기 꼬아서 짚신을 만드는 게 너무 신기해서 이 아이는 할아버지 손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나 보다..”하면서.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보다 쉽게 낡기는 했지만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었어. 자연이 허락한 만큼만 쓰고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난 뒤엔, 또다시 자연이 준 것으로 새로 만들면 되었으니까.” 라는 글은 할아버지의 투박한 손과 함께 편리와 효율의 잣대가 최선은 아니라는, 소박하고 단순한 자연의 순환과 연대의 가치를 돌아보게 했다.  아이는 그것을 말이 아니라 몸으로 배운다.  뒷표지의 그림은 그래서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보면 볼수록 맛이 느껴지는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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