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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 마음을 담은 그릇
호연 지음 / 애니북스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작가 소개를 보려고 했는데 앞표지 날개에 적힌 작가의 말.
“철없는 상상과
손발의 수고로움이 혼인하면
이런 만화를 낳는가보지요.
두 분의 결합이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정말 정말 오랜만에 만화책을 읽었다. 얼마 전 <역사를 담은 도자기>라는 어린이책을 읽고 우리 도자기에 대한 약간의 기초지식을 얻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만화로 도자기의 어떤 점을 ‘알게’될까, 내심 기대했었다.
그런데 내가 뭔가 잘못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었다는 걸 이 책을 읽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앎’에 대한 책이 아니었다. 이 책은 도자기의 ‘겉’이 아니라 도자기 속의 그 ‘텅 빈 공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만화를 읽으면 어느 박물관 도자기 유물전시실 의자에 앉아서 어느 도자기 하나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도자기에게 말을 걸고 도자기의 텅 빈 공간이 자기 속을 다 보여줄 때까지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자기를 가지고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화로 풀어낼 수 있을까.
푸하하 깔깔깔 대는 커다란 웃음을 주지는 않는다. 그저 살짝 입 꼬리가 당겨 올라갈 만큼의 웃음, 눈매를 다정한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어 줄 만큼의 미소, 그러다 콧등이 찌르르 울릴 만큼의 감동으로 목구멍이 조이는, 그런 책이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고 ‘온기’에 대한 이야기이고 ‘우리’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모든 게 신기하게도 도자기 속에서 나와 도자기 속으로 들어간다.
난 뭔가 착각하고 살았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드는 책. 알아야 느낄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앎’으로 느낌을 채우려 하지 않았나 싶어 가슴 속이 따끔거렸다. 안다는 것과 바라보고 느낀다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라는 걸 너무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그 독특함 때문에 더욱 사랑스럽고 소중한 책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이 만화를 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서 작가 소개를 읽어보려고 했더니, 책날개엔 결혼 축하 카드 같은 글만 있다. 도자기를 공부하는 고고미술사학과 학생이라는 것 외에 어떤 개인정보도 드러내지 않는 게 내심 서운하면서도 과연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또 그를 겉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정보를 통해 ‘알려고’ 했고, 그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런 것 따위로는 절대로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이 책 속에 들어 있는 만화에 이어 실리지 않은 것이 있을까 싶어 네이버 웹툰에서 ‘도자기’를 찾아봤다. 아쉽게도 2007년 9월 26일자로 마지막화가 올라와 있었는데, 그게 이 책의 마지막 편 내용인 것으로 봐서 아마 웹툰에 올려진 만화의 거의 전부가 이 책 안에 들어 있는 모양이다. 더 이상 볼 수 없을 거라니 무지 섭섭하다.
도자기를 비롯한 예술작품과 ‘사적인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들, 김춘수의 <꽃>과 같은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꼭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멋진 작품과 좋은 관계를 맺고 의미를 나누는 일은 내 주변의 소소한 일상과 그 일상 속의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정을 나누고, 내 하루의 작은 삶을 사랑하는 데서 출발하는 거라는 가슴 찡한 속삭임을 듣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