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가볍고 밝은 어감으로 다가온 ‘촐라체’가 히말라야 줄기 속에 서 있는 2천여 미터 거벽의 이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당연히 이 책이 험준한 빙벽을 오르내리는 이야기일 거라는 것도 짐작하지 못했으니 일종의 ‘산악등반소설’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염려스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살인적인 추위와 싸우며 로프 하나에 의지한 채 빙벽을 오르는 이야기야 이미 영화로 많이 만났던 것 아닌가. 영화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실감나는 묘사를 소설이 능가할 수 있을까? 영화가 느끼게 해주는 아슬아슬한 긴장감,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흰 봉우리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풍경들과 어떻게 겨루겠다는 걸까? 작가의 말에서 ‘나는 ’존재의 나팔소리‘에 대해 썼고,’시간‘에 대해 썼으며,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대해, '불멸’에 대해 썼다.‘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지금까지 만들어진 산악영화들, 이를테면 K2라든가 클리프 행어 같은 것들도 오로지 ’산을 오르는‘ 이야기만을 담았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글 속에서 만나는 산악등반에 관련된 전문용어들 때문에 짜증이 났다. 레지, 모레인, 백 앤 니, 비박, 등로주의, 알파인 스타일, 크러스트, 침니, 크레바스, 트레버스.... 일일이 책 뒤편에 있는 ‘등반용어’를 뒤적여가며 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건, 몰입에 걸림돌이 되었다. 영화라면... 이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나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는 어느덧 등반용어를 찾아보지 않고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영화에서 보여줄 수 없는 이야기를 소설이 들려주고 있었다. 촐라체를 오르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 박상민과 하영교, 그리고 스님이 되겠다는 열일곱 살 아들을 절로 보내놓고는 자신의 헛헛한 인생을 어쩌지 못하는 베이스 캠프지기 ‘나’. 셋 모두 인생살이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딘지 모를 존재의 밑바닥부터 어긋나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인물들이다. 그들에게 촐라체 정상을 넘는 일은 명예나 성공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촐라체가 숨기고 있는 크레바스와 같은 위험한 함정들, 목숨을 걸고 한 줄 로프에 의지해 타고 올라야 하는 오버행과 청빙의 빙벽들, 언제 몰아닥칠지 모르는 난폭한 블리저드와 눈사태, 화이트 아웃이나 고소증, 동상 같은 치명적인 질병 같은 것들이 우리네 ‘삶’에 대한 은유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그들이 악착같이 넘고자 하는 것은 삶도 인생도 아닌 그들 자신이라는 생각에 어느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그들에게 촐라체는 ‘다르마타’의 다른 이름이다. 작가는 조난당한 박상민과 하영교를 찾아 나선 ‘나’를 통해 ‘다르마타’를 설명하고 있다. ‘히말라야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죽음과 탄생 사이의 과도기적 시간을 ’다르마타(Dharmata)'라고 불렀다. 그것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잠과 꿈 사이의 밝은 틈새라고 했다. 목숨 값에 억눌려 온갖 욕망으로 이지러져 있던 이른바 불멸의 본성이, 하나가 통째로 끝나고 다른 하나가 통째로 시작되는 그 틈새에서, 금강석보다 견고한 본체를 보이고, 보여주는,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 바로 다르마타였다.‘(p.292)라고. 촐라체를 넘어선 그들은 다르마타를 건너 어긋나버린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맞추어간 것이 아닐까.
극한의 한계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삶에의 의지, 고난 극복 등에 영화가 초점을 맞추었다면(그 속엔 영웅적인 인물 하나가 늘 들어있기 마련이다.) 이 소설 속엔 영웅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불안한 그늘을 가진 세 사람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채 오열하다가 결국 자신의 불안과 그늘을 환하게 끌어안은 채 스스로 촐라체가 되어 우뚝 서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자신이 스스로 넘어서야 하는 동시에 늠름하게 솟은 촐라체여야 한다는 것, 그것이 세상을 향해 작가가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아등바등 사는 일에 엄살을 떨며 들끓기 좋아하고 한없이 가벼워지는 우리의 존재 앞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