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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이 출간되어 인터넷 서점 여기저기에 모습을 드러낼 때, 난 이 책의 표지를 보고는 피식 웃었더랬다. 만화야? 그런데 주인공 한 번 되게 촌스럽네. 요즘 순정만화 남자 주인공들이 얼마나 뽀샤시한 꽃미남들인데 요즘 트랜드에 맞지 않게 인물이 저게 뭐야... 남자애들이 즐겨보는 학원 폭력 명랑 만화(이런 장르가 있나?)라면 좀 괜찮을지도 모르겠네. 그런데 만화 표지치고 참 심심하다. 그리고 이름이 완득이가 뭐야, 완득이가.. 만득이도 아니구.. 대충 내 느낌이 이랬었다.
그런데 어라? 마케팅 차원에서 한 두주 메인에 뜨다가 사라지고 말겠지 했던 이 촌스런 표지의 책이 점점 더 자주 내 눈에 띄기 시작하는 거였다. 게다가 꽤 좋은 평가로 이어지는 기다란 꼬리를 달고. 이거, 학원 폭력 명랑 만화 아니었어?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시시껄렁한 녀석한테서 의외의 번쩍이는 면모를 발견하고는 놀라서 눈이 커다래진 기분이랄까. 어라, 요 녀석 봐라? 네가 그렇게 대단하단 말이지, 어디 한 번 만나보자, 완득이.. 그래서 만났다.
제 1부 첫 장 ‘체벌 99대 집행유예 12개월’ 에서 나 한 대여섯 번은 웃은 것 같다. 분량으로 보면 12페이지 8줄이다. 딱 그만큼 읽고는 소설 속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난쟁이 아버지, 완득이가 어릴 때 집을 나간 베트남인 엄마, ‘몸은 짱이지만 말은 꽝인’ 정신지체 민구 삼촌, 유들유들 뻔뻔하고 참 재수없게 말하는 재주를 가진 담임 똥주는 자라나는 청소년 완득이가 짊어지고 헤쳐 나가야 하는 사중고 인물들이다. 사실 소설 속 완득이의 가난하고 외로운 처지를 생각하면 이 책을 읽으며 이렇게 낄낄거리면 안 되는데 김려령이라는 이 작가는 그 우울하고 갑갑한 완득이의 현실을 참 경쾌하고 밝게 풀어내고 있다. 마치 권투에서 짧게 끊어 치는 잽처럼.
미화의 과정을 밟거나 아니면 진지한 무게감이 없어서 불만인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중간고사 준비한답시고 고달픈 하루를 살아가는 내 딸과 아들에게 “얘들아, 이거 읽어봐라. 킹왕짱 재밌어.”라며 권할 수 있는 책이라서 좋았다. 아이들에게도 완득이의 경쾌함이 먹혔는지 큰딸은 시험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도 완득이를 붙들고 있었다. 청소년 소설로서 이만한 미덕이 어디 있으랴.
그렇다고 이 책, 마냥 밝고 웃긴 책은 아니다. 이 책을 읽다가 딱 내 기분 같은 구절 하나를 발견했는데, ‘웃는데 그 웃는 모습이 싫었고, 웃으면서도 울까 봐 괜한 걱정을 했었다.’(p.57)라는 구절이다. 그래, 딱 그랬다. 낄낄거리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짠해지는 거, 웃을까 울을까 망설여야 할 상황이 올까봐 조마조마한 기분, 희망이 어리는 마무리 속에서도 어쩐지 쓸쓸해지는 위태로운 느낌..... 완득이가 보여주는 현실이 별빛 같은 희망 하나로 버티기엔 너무 거칠고 가혹하다는 이 궁상스러운 생각을 확 거둬치우고 싶다. 행복한 기분으로 완득이를 응원하고 싶었다. 순진한 십대 청소년들은 희망의 언어들에 쉽게 넘어갈지 모르겠지만 이제 가슴 속에 능구렁이 쉰 마리쯤 들어앉히고 사는 내 나이쯤이 되면 우주 밖 저 멀리서 내려오는 별빛으로 삶의 구질구질함을 가리려는 노력 자체가 참 쓸쓸해진다.
그렇게 웃을까 울을까 하는 심정이 되었을 때, 완득이가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윤하와의 첫 뽀뽀가 웃음 발동의 원인을 제공하긴 했지만 완득이는 개천물이 얼은 것을 보고도 웃고, 윤하의 종군기자 꿈 생각을 하면서도 웃고, 똥주가 준 홀딱 벗은 생닭 두 마리를 보고도 웃는다. 그런 완득이를 보며 나도 웃었다. 그래, 우리는 희망의 힘이 아니라 긍정의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구나, 완득아, 희망을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지금 이 구질한 삶을 긍정하면서 그저 열심히 살면 되는 거구나. 완득이가 결국은 날 TKO 시켰다. 그래, 완득아, 더럽고 치사해도 악착같이 잘 살아라... 그런데 나 같은 아줌마 TKO 시키니까 좋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