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여인의 속삭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6
알론소 꾸에또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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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외부적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미모에 유능한 커리어 우먼이며 사랑할 수밖에 없는 멋진 아들과 좀 지루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견뎌줄만 한 남편과 안정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베로니카의 삶은 완벽해 보였다.  조금 오만하게 굴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해 줄 수 있을 만큼 꽤 특별해 보이는 그런 여자,  같은 여자들로부터 부러움과 시샘을 받는 동시에  남성들로부터는 추파와 애정 어린 호감을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는 그런 여자가 바로 베로니카다. 

그러나 조금 깊숙이 들어가 볼까? 그녀는 어릴 적 늘 우수한 언니와 비교되며 자랐고, 아버지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녀 생애의 단 하나의 사랑 니코를 향한 그리움을 지우지 못하고 살고 있으며 결국 남편 지오반니나 내연의 남자 패트릭과의 관계도 의무이거나 감각적인 차원에 머물 뿐이다. ‘항상 스스로를 프로그램화해서 타인의 이목을 집중시’(p.115)는 동료 마리타를 비꼬며 증오하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앉아서 파티에 초대해준 모나 마르조에 대한 험담을 즐기기도 하는 속물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항상 나의 고상함과 나의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었’(p.344)던 베로니카는 완벽하게 포장된 자신의 모습과 삶을 지켜내고자 사방에 벽을 쌓아올리고 그 안에 숨는 듯한 나약함, 그리고 그 나약함을 들키지 않기 위한 얍삽함, 위선, 신경질적인 감정 폭발과 감정적 도피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의 고래여인 레베카는 상처투성이다. 베로니카와 레베카가 어릴 때부터 친구사이였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철저히 베로니카의 편의를 고려한, 비밀스런 관계였다.  뚱뚱하고 독특한 외모 때문에 왕따였던 레베카는 친구들의 노골적인 놀림과 괴롭힘보다 그래도 친구라고 믿었던 베로니카의 비겁함과 위선에 더욱 큰 상처를 받는다. 영화와 문학을 좋아하고 고운 감수성을 갖고 있던 레베카의 내면은 고등학교 졸업파티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파괴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 두 사람이 25년의 세월을 건너 만난다.  베로니카는 ‘레베카의 출현이 무질서한 삶에서 일어나는 불의의 급습 같은 것’(p.344)이라고 생각했고 레베카는 아직도 남아있는 우정과 애정, 배신에 대한 복수와 증오, 원망 등이 마구 뒤섞인 혼돈된 감정과 행동을 표출한다. 25년의 시간으로도 아물 수 없는 상처, 희석될 수 없는 과오도 있는 법이다. 베로니카는 그 상처와 과오로부터 피해 달아나려고 했고 예민하게 대응했으며 다시 만난 레베카를 어떻게든 떼어내려 안간힘을 쓴다.  그에 비해 레베카는 베로니카 주변을 맴돌고, 이상한 행동과 위협적인 암시를 통해 불안감을 조장하고, 관심을 구걸하고, 해명을 요구한다.

다시 만나게 된 레베카를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베로니카는 서서히 현재의 삶에 드리워진 과거의 안개를 깨닫게 된다.  레베카의 출현을 통해서 니코를, 자신의 부모를,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게 된 베로니카는 ‘과거는 뒤가 아니라 내부에 있으며, 어떤 일들로부터 나오는 베일이며, 안개 속으로 흩어지는 피’(p.345)임을 고백하고 레베카가 떠나자 ‘영원히 길을 잃은 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고독에 빠져 들’(p.364)고 만다.

처음 레베카와 베로니카가 비행기 안에서 25년만에 해후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재밌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여성의 섬세하고 복잡한 내면 안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책이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두 읽은 날 가족이 다 함께 모여 저녁 식사를 했다.  왁자한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난 후 혼자 설거지를 하며 레베카와 베로니카에 대한 생각을 했다.  갑자기 레베카와 베로니카가 같이 손잡고 나를 보고 웃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건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순간 내 안에 레베카와 베로니카가 함께 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에 대한 열망, 사랑에 대한 환상,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을 가졌지만 치부와 상처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 덮으며 화려한 겉껍질 안에서 보호받으려 하는 베로니카와 아픈 기억과 상처에 골몰하며 진실과 대면하면서도 지금의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자꾸만 새로운 열등감과 자기연민과 원망을 양산시키는 레베카.  그 둘은 내 정신의 양 끝에서 서서 서로 만나지도 화해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그 둘은 레베카가 베로니카에게 진실과 대면하게 했듯이, 또 베로니카가 레베카에게 혼돈스러운 감정을 돌아볼 수 있게 했듯이 서로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결국 베로니카와 레베카는 양면의 동전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마지막 구절, ‘나는 아직도 그녀의 속삭임을 듣고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속삭임을 듣고 있다. 영원히.’(p.365)는 나에게도 해당하는 현재형의 문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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