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너무 만만하게 봤다.  300쪽이 조금 넘는 분량에 글자들도 빽빽하지 않은데다 영화화된 소설이니만큼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한 내용일 테니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잡았다가 어찌나 지루하던지 중간에 짜증내며 몇 번이나 덮어버렸는지 모른다.  까칠함으로 따지자면 며칠 전에 읽은 주제 사라마구의 책도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할 텐데, 이 책은 마치 바싹 마른 톱밥과 모래를 반씩 섞어 씹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까칠하고 차갑고 거칠고 불친절하기가 주제 사라마구가 울고 갈 정도다. (주제 사라마구의 책은 이 책에 비하면 너무너무 친절한 책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총기에 관련된 어휘들은 왜 그리 많이 나오는지 나에게는 거의 이해불능의 외국어 수준이었고, 미국 서부극에서 나올법한 배경에서 총격전과 추격전이 벌어지는 이야기는 ‘이거 영 내 취향이 아니네..’하며 한숨이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그렇게 어렵게 질질 끌며 100페이지를 겨우 넘기면서 나는 슬슬 이 책의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사내들의 무모하고 잔인한 총싸움 이야기였던 것이 슬며시 다른 면모를 내비치면서 깊이를 더해갔다. 

 

도무지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절대 악의 화신이라 할만한 인물 안톤 시거는 살인을 하면서도 털끝만큼의 흔들림이나 갈등, 번민도 없다.  또 다른 인물 모스는 평범한 트럭 운전사였으나 마약 거래상들의 살인 현장에서 돈가방을 거머쥐면서부터 위험 속으로 빠져든다.  탐욕으로 인해 쉽게 위험한 악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마는 우리 평범한 인간들의 대표주자라고나 할까.  보안관 벨은 선과 진리, 점점 살벌해져가는 세상에 대해 고민하며 안타까워하는 인물이다.  어쩌면 이 책 제목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노인의 부류에 보안관 벨이 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있지만 이미 제어할 능력을 상실당한(결코 스스로 상실한 것이 아니라) 지난 세대와 인물들 말이다.  결국 보안관직을 포기하고 쓸쓸히 떠날 수밖에 없는 벨은 베트남전 참전 당시 훈장을 받게 했던 전투의 진실을 고백함으로써 우리의 양심과 선한 의지를 일깨우고 경고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제목 “No Country for Old Men'이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에서 인용된 것이라고 한다.  그 시에서 노인이 바다를 건너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움으로 떠나듯이 벨은 보안관직을 포기하고 떠난다.)

책을 덮으며 나는 이 책이 단순히 산탄총을 사람의 얼굴에 대고 쏴대는 잔인한 총싸움에 대한 책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날이 잔혹해지는 세상에 대한 고발이며, 그 잔혹성에 무뎌져 가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아비판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피곤하게 느껴졌던, 감정을 절제한 거칠고 성마른 문장들이 나중엔 이 책의 이야기와 가장 잘 어울리는 문장이라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처음엔 내가 이 책을 이해하려면 ‘영화’라는 매체의 해석이 필요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해가며 비호감 도서로 분류해 두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영화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책으로 먼저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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