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 Dear 그림책
숀 탠 지음 / 사계절 / 2008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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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꺼내 들고는 헉, 하고 숨이 막혔다. 인터넷 서점에서 미리보기를 했지만 실제로 손에 쥐고 보니 이 책이 가진 기(氣)가 만만치 않게 강한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낡은 장정의 분위기를 살린 짙은 갈색 톤의 표지와 누렇게 바랜 오래된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의 그림이, 도대체 글자 없이 그림만으로 이주자들의 삶을 어떻게 담아냈다는 건지 궁금해지게 만들었다.

표지를 넘기면 다양한 인종과 나이의 초상들이 마치 증명사진처럼 빼곡히 그려있다. 삶의 질곡과 고단함, 경계의 눈빛이 담겨 있는 얼굴들. 그 얼굴 뒤로 우리네 할머니들이 말하던 ‘소설로 쓰면 열권을 써도 모자랄’ 사연들이 흐르고 있을 것만 같다. 벌써부터 이 그림책의 기에 압도당하는 기분이다.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 그림들은 1892년부터 1954년까지 운용된 미국 이주자들의 입국 수속 시설인 뉴욕이 엘리스 아일랜드에서 촬영한 사진들을 기초했다고 한다.  이 사진들은 현재 엘리스 아일랜드 이주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그러니까 내가 이 빼곡한 얼굴들에서 느낀 기운은 아마도 아직도 이주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거나 아니면 이주자의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실존 인물들의 기운인 모양이다.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그림책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마치 오래되고 낡은 필름이 영사기의 빛을 통과하면서 스크린 위에 이야기를 그려놓는 듯한 느낌이다.  종이를 접어 만든 새, 시계, 중절모, 아이가 그린 가족 그림, 금이 간 주전자, 이가 빠진 낡은 찻잔, 여행가방, 그리고 가족사진이 정성이 가득 담긴 연필소묘 그림으로 펼쳐진다.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는 이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가 떠나는 날 아침인 것 같다.  아버지를 배웅하기 위해 셋뿐인 가족이 집을 나설 채비를 한다. 표정과 시선이 살아 있는 그림이 가슴에 와서 박힌다.  이 가족이 살아가는 삭막한 도시 전체에 검은 용의 꼬리가 곳곳에서 꿈틀대고 있다. 아마도 그 용의 이름은 가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버지와의 헤어짐을 코앞에 둔 아이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그런 아이에게 아버지는 중절모 속에 숨긴 종이새를 보여주며 아버지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시키고, 울먹이는 아내를 안아주고 위로한다. 그림만 보고 있는데도 헤어지는 슬픔이 가슴 속까지 밀고 들어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와 엄마의 쓸쓸한 뒷모습이, 그 위로 떠다니는 저 망할 용의 꼬리가 걱정스럽다.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인물 하나하나의 표정과 눈빛을 정성스럽게 잡아내고 환상적인 분위기와 상징적인 묘사로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배를 타고 아득하게 먼 거리를 떠나 낯선 땅에 이주한 아버지는 어떤 난관을 만나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까.  아버지는 그 낯선 땅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림책을 보는 내 마음이 조마조마하게 조여 온다.

아버지가 도착한 나라는 아마도 이주민의 정착을 적극 장려하는 그런 나라인 모양이다.  커다란 두 석상이 악수하며 서 있는데 한 석상은 여행가방을 옆에 두고 있고 또 다른 석상은 주전자와 커다란 냄비를 옆에 두고 있는 것으로 봐서, 이주민과의 화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인 것 같아 조금 안심이 된다. 그러나 그래도 이주민은 이주민이다. 말도 문화도 다른 이 곳에서 아버지는 증명서 하나를 자켓 안주머니에 접어 넣으며 근심어린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떠나온 고향과는 다르게 무척 번성하고 풍요롭고 문명화된 이 낯선 땅에서 아버지는 헤매고 다니지만 도무지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주저앉아 사전인 듯한  책만 들춰보고 있다. 그 때 옷도 피부색도 다른 남자의 도움으로 겨우 잠 잘 곳을 찾는다. 그 곳에서 아버지는 이상하게 생긴 생물체를 만난다. 그러고 보니 이 나라 사람들 주변엔 늘 희한하게 생긴 동물이 있다.  아마 이주민들의 외로움과 절망을 함께 견뎌줄 희망의 상징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 내가 감동하는 이유는 물론 작가의 정성과 혼이 가득 담긴 듯한 이 아름다운 그림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주민의 고통과 어려움, 쓸쓸함과 함께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따뜻한 정, 위로, 친절과 상냥함 등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아버지 외에도 이 책에는 아버지에게 도움과 친절을 베푸는 또 다른 이주자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소녀시절 가혹한 노동착취로부터 도망 나온 여자와 사람들을 청소하듯 기계로 빨아들이는 거대한 사람들로부터 탈출한 가족(아마 독재 권력자의 폭력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 ‘인종청소’라는 낱말이 떠오르기도 하는 장면이다.), 무자비하고 참혹한 전쟁으로부터 떠나온 할아버지 등등. 그런 아픈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친절을 베풀고 따뜻한 관계를 맺어가는 모습들은 너무나 아름답다.

아버지는 멀리 떠나온 낯선 땅에서 그렇게 희망을 발견하고 적응하며, 일을 하고 가족에게 편지와 돈을 부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아버지는 편지 한 통을 받는다. 편지를 읽는 아버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아내와 사랑하는 아이의 도착. 오랜 이별 끝에 찾아온 재회.  가슴이 뭉클해지고 콧등이 시큰거린다.  이 책의 제목이 '이주'나 '떠남'이 아니라 '도착'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가족이 모여 있는 식탁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 아버지가 주는 돈을 받아들고 집을 나선 아이. 새로 이주해 온 듯한 여자 하나가 길에서 지도를 펼쳐들고 두리번 거리고 있다.  아이가 다가가 길을 가르쳐 준다.  따뜻한 친절은 희망에 되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책을 몇 번이나 펼쳐 읽는 동안, 우리나라에 시집온 베트남 여자 하나가 아파트 14층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녀가 죽음으로써 내려놓고자 했던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우리의 무엇이 그녀를 희망으로 이끌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이주민의 삶에 국한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양한 민족과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 전쟁과 가난을 겪는 사람이 없는 세상, 그래서 ‘이주민’이라는 분류개념의 용어가 필요치 않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이라고 되어 있지만 어른이 보아도 모자람이 없는, 아니 어른도 꼭 봐야할 최고의 그림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별 다섯개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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