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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 1 ㅣ 비룡소 걸작선 49
랄프 이자우 지음, 유혜자 옮김 / 비룡소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미하엘 엔데를 좋아하는 건, 그의 판타지가 따뜻하기 때문이다. <모모>나 <끝없는 이야기>를 읽으면 신비스러운 인물들과 흡인력 강한 모험담들 아래로 따뜻하고 부드럽게 흐르고 있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작가의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의 판타지가 사람의 내면을 어루만져주는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랄프 이자우의 책 <비밀의 도서관>을 갖고 있지만 아직 읽어보질 못했다. 그 책을 읽기 위해서는 미하엘 엔데의 두터운 책 <끝없는 이야기>를 다시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계속 다음으로 미루고 있는 사이에 미하엘 엔데에게 후계자로 인정받았다는 랄프 이자우라는 작가에 대한 궁금증은 자꾸 커질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끝없는 이야기>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고 랄프 이자우를 만날 기회,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을 내 손에 쥐었다.
우선은 미하엘 엔데의 작품과 분위기가 많이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시황의 진흙병사와 수메르의 쐐기문자, 고대 바빌론의 유물과 유적들, 신화적 동물들과 시대와 연대의 구분을 허무는 인물들의 등장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주인공을 돕는 세헤라자데의 유리새 니피와 나폴레옹의 외투 코퍼, 소크라테스의 잊혀진 제자 엘레우키데스, 벨레로폰의 페가수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그런 신기함으로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판타지 문학의 기본 조건(?)이므로 다른 판타지 작품들과의 차별화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작가의 자료수집에 대한 열성과 그 방대한 자료를 한데 엮어내는 능력은 높이 사야겠지만.
그것보다 내가 놀랐던 건 작가가 판타지 속에 엮어 넣은 이야기의 주제다. 제목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무척 새롭게 다가왔다. 작가는 우리의 본질이 ‘기억’ 속에 있다고 말한다. 현실을 중시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지나가버린 시간들이나 오래되고 낡은 사물에 대한 애정을 너무 쉽게 잃어버린 채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증오하지 않는, 그 어떤 감정도 표현하지 않아서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린’(p.367)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한 염려를 지우기 어렵다.
이 책을 읽으며 만약에, ‘이 세상에서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서 내가 사라진다면, 그렇게 하얗게 잊혀진다면, 과연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하는 물음 하나를 갖고 가게 되었다. 얼마 전에 읽은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보통은 ‘우리는 조금씩 남들이 우리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고 하면서 우리의 자아를 아메바에 비유하고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잊혀진다는 것은 우리가 존재의 본질을 잃어버린다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야기에서 자기의 진정한 본질을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잃어버린 기억의 세상, 크바시나로 들어가게 된다. 잃어버린 기억들, 지워진 꿈들, 잊혀진 사람들과 사물들은 크바시나에서 자기가 좋아하던 일을 계속하며 살아가지만 지배욕으로 가득 찬 크세사노의 등장으로 이쪽 세계와 크바시나의 균형이 무너지고 평화가 깨어지고 만다. 크바시나는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상징하는 공간이며 크바시나와 이쪽 세계를 모두 자기 손안에 넣으려는 크세사노는 곧 의식과 무의식 세계를 지배함으로써 세상을 정복하려는 난폭한 무법자라고 볼 수 있었다.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과거의 경험과 교훈을 소홀히 하며 엄청난 속도로 오직 앞을 향해 질주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갖고 있는 랄프 이자우의 책은 ‘도서관’이라든가 ‘박물관’과 같은 기록과 보존의 의미를 가진 낱말이 들어 있다. 망각으로 본질을 잃기 쉬운 우리에게 기록과 보존은 본질을 지켜가는 수단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 녹아 있는 본질에 대한 사유가 참신하고, 주인공인 쌍둥이 남매 제시카와 올리버가 크바시나에서 아버지 토마스 폴락을 구하고, 지배욕으로 불타는 크세사노를 물리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제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 2>을 펼쳐야겠다. (080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