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나라에 간 코끼리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진일상 옮김 / 솔출판사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두 번째로 만나본 아르토 파실린나의 소설이다.  지난번에 읽었던 <토끼와 함께 한 그 해>도 주인공 바타넨과 토끼를 따라 핀란드 구석구석을 여행한 느낌이었는데 이번 소설 <모기나라에 간 코끼리>도 한 편의 아름다운 로드무비를 연상시킨다. 

러시아춤 트레팍을 출 줄 아는 코끼리 에밀리아는 따뜻하고 섬세한 감정과 우아하고 선한 품성의 낭만적인 성향의 코끼리다. 그런 에밀리아를 보살피며 따스한 우정을 나누는 루치아는 강인한 성격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매력적인 아가씨다.  유럽연합의 새 지침에 따라 동물들을 이용한 서커스 공연이 금지되자 루치나는 에밀리아를 데리고 기차를 타고 러시아를 떠돌며 서커스 공연을 벌인다.  그 자체만으로도 영상이 아름다운 한 편의 로드무비가 그려진다.

핀란드에서 러시아, 그리고 다시 핀란드로 이어지는 여정에서 에밀리아와 루치아가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네 사는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러시아 기차여행길에서 에밀리아의 사육사 일을 맡은 마흔 살의 역무원 이고르 루초프스키는 에밀리아에게 트레팍을 전수한 장본인이다.  다정한 성품을 가졌지만 다분히 몽상가다운 그는 고향 헤르만토프스크에서 비록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루치아와 성대한 결혼식 축제를 벌이는 꿈을 실현한다.

루치아가 이고르와 헤어지고 핀란드로 돌아오는 길에 루비아에서 만난 오스카리 렌지외와 그의 아내 라일라는 부부로서의 미덕이나 상호존중 따위 잃어버린 지 오랜, 그저 관성에 의해 살아가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정뱅이에다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서슴지 않는 오스카리를 게으르긴 하지만 ‘말짱한 상태에서는, 어느 정도 쓸모가 있는’ 남편이라며 두둔하는 라일라는 종속된 여성의 표본이라고 할만 하다.

육류가공공장의 생산부장이며 노련한 소시지 기술자 루히넨은 어떤가.  코끼리 소시지의 레시피를 짜면서 그가 꿈꾸는 것은 이윤의 극대화이고, 에밀리아를 도살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강구하는 모습은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에 우선하는 현대 산업 사회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타이스토 오얀페레.  루치아의 젊고 생기 있는 아름다움에 매력을 느끼고는 에밀리아가 겨울을 지낼 유리공장을 임대하고 루치아를 위한 방을 마련해주고 물심양면으로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지만, 루치아가 에밀리아를 아프리카로 보내기 위해 길을 나설 때 자신의 생활터전인 가게를 포기할 수 없었던 남자다.  타이스토라는 인물을 생각하다보면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떠오르곤 했다. 룻의 아내가 뒤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말을 어기고 자기가 살던 터전에 대한 미련을 못 이기고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타이스토 오얀페레는 어쩌면 자기의 재산, 가게에 대한 집착 때문에 아름다운 루치아를 놓치고 말았던 것 아닐까. 

그런 타이스토 오얀페레에 비해 농부 파보는 행운아다.  아내 카리나와는 애정보다는 재산상의 이유로 유지되고 있는 결혼관계였다.  게다가 그는 자기 자신을 주교 헨릭을 살해한 농부 랄리 의 후손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남성답고 유능하다.  결국 루치아의 사랑을 얻어내지만 아주 현실적인 성격이라 아내 카리나와의 이혼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만약 카리나가 이혼하면 나랑 결혼할래요?”하는 루치아의 질문에 “너한테 100헥타르 경작지가 있으면 결혼하지.”(p.188)라고 대답할 정도로 야멸차고 매정하다. 그것이 우리시대의 사랑일까? 현실적인 이유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열정적인 사랑은 이제 가능하지 않은 걸까? 파보의 아내 카리나도 체육 교사이자 소방대 대장인 타우노 리이지칼라와 부정을 저지르지만 파보와 카리나는 타협과 묵인 아래 상대방의 부정을 서로 눈감아준다. 이제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관계라는 것도 쿨하다 못해 서류상의 기록, 재산의 공유, 공적으로 인정받는 규범적 틀만으로 유지되는 삭막한 관계로 이행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게 삭막한 가정이 양산하는 것은, 부도로 사업이 망하고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우울증을 앓다가 잠수함 만들기에 심취해 살아가는 고독한 인물 레오 발카마 같은 인물일 것이다. ‘가진 것은 고양이와 자신의 원대한 꿈 뿐’(p.201)인 그는 파보와 루치아에게 자신의 쓸쓸함을 호소하지만 그 또한 파보와 루치아를 따라 훌쩍 떠나지는 못한다.  그에겐 고양이와 잠수함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귀향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떠남’이라는 것 자체가 쉬운 것은 아닌가 보다.  지금 여기서 이루어야 할 꿈이, 크고 작게 맺어진 여러 관계들이, 지금까지 다져온 생활 터전이, 매일매일 해결해야할 일들이 자유로운 유목민으로 훌쩍 떠나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아르토 파실린나의 소설들이 모두 한편의 로드무비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읽은 두 편의 소설을 생각해보면 자유로운 유목민에 대한 꿈과 떠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집착이 소설 속의 ‘독특한 여정’ 안에 어우러져 우리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되는 것 같다.

후우톨라의 타락한 목사와 탐페레의 녹색당원들도 묘한 대조를 이루며 등장한다.  후우톨라의 목사는 술에 빠져 살면서 스스로를 비관할 뿐 아니라 삶의 목적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에 비해 탐페레의 녹색당원들은 지나치게 과장된 목표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목적을 상실했건 또는 과장했건 간에 진실한 삶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에선 같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에밀리아를 아프리카로 보내기 위한 여정 속에 만나는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은 에밀리아와 루치아, 파보의 여행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인간군속의 지지고 볶고 아등바등한 삶에 비해 코끼리 에밀리아가 내딛는 걸음은 얼마나 자연스럽고 듬직하고 품위 있게 느껴지는지..  핀란드의 울창한 침엽수림 사이를 누비고, 맑은 호수 속에서 수영을 즐기고, 유연한 코로 인간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하고, 눈물을 쏟으며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고, 즐거울 땐 코로 트럼펫 소리를 내거나 트레팍을 추는 코끼리 에밀리아의 모습은 삶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마다 가슴 속에서 떠오를 것만 같다.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남아프리카의 아도 자연공원에서 에밀리아를 만났다고 했다. 물론 소설의 연장선에서의 이야기겠지만, 아프리카의 사바나를 배경으로 서있는 에밀리아를 생각하니 가슴이 다 후련해진다.  에밀리아에게 우리 인간이 사는 모습이란 모기 떼들의 앵앵거림과 별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젠가는 나도 이 모기 나라를 벗어나 에밀리아가 살아가는 그 큰 세계를 느껴보고 싶다. 거침없는 큰 걸음으로 흔들림 없이 내딛고 싶다.   (08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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