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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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김선우 시인의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 책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시인인 김선우 님께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시집이 아닌 산문집으로 두 권을 더 구입했었다.  그 중 하나가 <물밑에 달이 열릴 때>이다.  <우리 말고 또 누가~>는 지난 2007년도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신간이었지만 <물밑에 달이 열릴 때>는 2002년도에 펴낸 책이다. 그래서인지 조금 더 감성적이고 조금 더 물기를 많이 가진 듯, 습윤한 분위기다.

읽어가는 내내 호두 같은 단단함이 느껴지는 글의 견고한 밀도가 내 마음에 공명의 울림을 만들어내고 자연과 생명, 원초적인 몸에 대한 작가의 몽환과 그 몽환이 현실과 맞닿는 글의 찰랑한 흐름에 푹 젖어들었다.

관념적이라든가 추상적이라든가 하는 수사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김선우의 글은, 그래서 그 느낌이 직접 피부에 닿는 듯 생생하게 전해져온다.  마치 원시적이고 감각적인,  그래서 인위적이거나 가식적인 관습이나 규범 따위로부터 자유로운 한바탕의 내림굿 같다고나 할까.... 시인의 예민한 감수성이 빚어내는 풍부한 시적 상상력 덕분에 나는 글을 읽다가 숨겨진 신화를 만난 듯 잊혀졌던 동화를 만난 듯 아련한 느낌에 젖어 종종 멍해지곤 했다.  더구나 먼 우주 품에 안긴 별빛을 바라보는 듯 아스라한 느낌으로 뻗어갈 즈음 갑자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일갈할 때엔 작가의 사유의 깊이와 통찰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울릉도 기행을 담은 글에서는 무차별한 개발에 대한 우려를 드러내고,  허난설헌 생가에 대한 어릴 적 추억담을 꺼내놓는가 했더니 여성성과 약자에 대한 착취와 폭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은은한 정취를 풍기는 달의 이야기는 꾸르베와 프리다 깔로, 뚤루즈 로트레끄, 장욱진의 그림에다 조선시대 춘화까지 보태어진 정직하고 당당한 에로스의 세계로 이어진다.  이어서 모네와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가하면  미클로시 얀초의 영화 ‘붉은 시편’이라든가 따르꼬프스키의 영화 ‘잠입자’, ‘희생’, ‘향수’등을 가지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감독도 영화도 다 처음 들어봤다) 경주나 작가의 고향인 강원도에 대한 이야기와 <그리스인 조르바>나 <침묵의 세계>를 비롯한 몇 권의 책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이 책 속에서 작가가 다루고 있는 글의 소재는 다양하고, 그 다양한 글의 소재들이 각각 하나의 문이 되어 작가가 그려내는 몽환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그렇게 몽환의 세계에서 습윤한 물기를 머금고 작가의 글을 따라 걷다보면 현실의 문제로 빠져나오는 문을 하나 더만난다.  학교문제, 약자와 제3세계에 대한 착취, 억압된 성,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혁명, 인간의 오만, 정신적 가치의 빈곤을 이야기하는 현실은, 몽환의 경로를 거쳤기에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그것이 이 책의 매력이고 내가 김선우라는 시인에게 각별한 관심을 두게 되는 이유가 된다.

이 작가가 쓴 두 권의 책이 모두 만족스러웠던 까닭에 다음 책에 대한 기대와 혹 실망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반반이다. 시인이라는 직함을 앞에 둔 작가이니만큼 시집도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나서 시집 두어 권도 읽어볼 생각이다.  단, 너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08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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