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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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속의 여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남성의 언어는 흔히 표면장력에 떠밀리며 피상적인 것으로부터 힘을 구가하게 되곤 하지요. 남성의 언어가 획득한 힘은 어머니의 힘과 근원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은 흔히 파괴적이고 배타적이며 경쟁적이고 연민을 모르는 문법의 질서 속에 있습니다. 남성적 질서는 적군의 어린아이들의 눈망울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할 수 있지만 여성적 질서는 절대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땅의 기억을 간직한 여성의 질서는 적군이라고 하여 앳된 소년병의 가슴에 총탄을 쑤셔박는 야만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습니다. 여성의 조국은 이 별이며 이 별이 속하여진 우주일 뿐. 야만의 폭력 위에 세워진 남성적 질서로서의 국가와 민족 개념을 넘어서고 가로지르며 여성의 말은 근원적인 대지의 힘으로 귀환합니다. 아마도 내가 아니마의 세계럴 결여한 위대한 예술가를 본 적이 없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며, 남녀를 불문하고 좋은 예술가들에게서 궁극적으로 선한, 위대한 여성성을 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34쪽

인간의 오만은 이미 극에 달하였고, 인간을 먹이고 입혀온 어머니는 신성한 곳까지 파헤쳐지고 절개되었으며, 이 야만의 질주가 언젠가는 끝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조차 희박해 보입니다. 어쩌면, 이 야만의 질주는 인간 스스로의 자각과 성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느날, 인간의 오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어머니들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될 때 마침내 끝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이 별의 인간들은 스스로를 피란시킬 수 있는 한점 대지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문명과 개발이라는 폭력 아래, 생존의 근거인 이 별 전체를 잃어가는 실향민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35쪽

시인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와 불화하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창조해내는 세계에는 가장 낮은 것 속에 든 가장 높은 봉우리와, 가장 거대해 보이는 것 속의 가장 작은 속삭임들과, 가장 미천해 보이는 것 속의 위대한 전언이 공존하며, 무엇보다 인간의 세상이 추구해야 할 의롭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갈망이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열망하고 두리번거리고 귀기울입니다. 아파하고 연민하며 공경하고 분노합니다. 골방과 광장이 공존하며 사랑과 투쟁이 공존하는 시인의 거처에서 당신은 가난한 처녀의 탄색을 아파하며 모순되 사회제도를 비판합니다. -37쪽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온 하계의 질서란 계급과 계층 간의 끝없는 쟁투와 착취의 역사였으며, 다수 민중에 대한 소수 지배계급의 착취가 가장 폭압적인 형태이거나 세련된 방식으로 그 외연을 바꿔온 것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나는 또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살았던 봉건적 왕조시대나 내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시대가 지배와 피지배 계급간의 여전한 쟁투의 장이라는 것을. 더구나 이 척박한 현대의 자본주의는 내외적인 식민지를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이 별은 끊임없는 강자의 문법에 의해 구획되고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이 살벌한 약육강식의 문법 속에서 선진제국에 의한 제3세계의 가혹한 착취가 소문없이 진행되고 있으며 일국 내 빈익빈 부익부와 다수 민중에 대한 착취가 민주의 외피를 쓰고 여전히 진행줄이라는 것을. 계급의 불평등과 인종의 불평등, 그리고 성의 불평등은 하계를 지배하는 가장 심각한 불평등체계이며 이중, 삼중으로 타자화되어 있는 연옥의 미로라는 것을. -37쪽

어찌하여 달은 지구 가까이에서, 저토록 슬프고 아름다운 얼굴로 지구를 바라보게 된 것일까요. 달의 기원을 몽상하는 일은 세속의 일상을 가로질러 나에게 우주먼지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고 우주거품이라든지, 은하, 블랙홀이라는 말들을 떠오르게 하지요. 그리고 묻게 됩니다. 나는 언제부터 나였을까, 라고.-46쪽

초승에서 보름으로 다시 그믐으로, 그리하여 달이 뜨지 않는 죽음의 시간을 지나 다시 부활하곤 하는 달은, 자신의 숨결에 성심을 다하며 지구별 위의 인간 역시 가장 낮고 겸허한 자세로 스스로를 사랑할 것을, 이 별을 사랑할 것을 묵언의 기도로 깨닫게 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달의 죽음과 부활. 우리가 일상적인 것이라 느끼는 달의 죽음과 부활이 사실은 달의 의지가 이룬 매일의 기적이라는 것을. 내게 주어진 하루분의 생이 죽음을 껴안고 흘러가는 시계추 위에서 아직은 삶 쪽으로 기울어 있는 기적과도 같은 시간이라는 것을. -48쪽

태양빛이 강렬한 수직성을 갖는 빛인 데 비해 달빛은 구부리는 빛이지요.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빛이 종종 내 속의 공격성을 일깨운다면 달빛은 그 빛이 가장 무르익었을 때에도 보듬어 소생시키는 부드러운 힘 쪽에 있습니다. 태양은 명징하게 빛나는 형태를 고수하지만 달은 자라나고 소멸하는 만물의 생멸의 주기 속에 함께 있습니다. 자라나는 달, 죽는 달, 소생하는 달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남루한 중얼거림을 받아안습니다. 그리하여 달님을 향해서라면 인지상정의 남루한 고통과 소망들을 입밖에 내어 말할 수 있게 되지요. -51쪽

생명의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능, 이것은 어떤 수사 없이도 그 자체만으로 눈물겨운 일입니다. 때로는 이 지극히 단순한 본능이 일상을 지배하는 오만한 에고로부터의 해방을 촉매하기도 하지요. 인간성이라는 관념이 강제하는 도덕과 치장이 허물어지고 날것 그대로의 단순한 욕망이 지순하게 드러날 때, 그것들은 대개는 착하고 단순해져 오히려 자유로운 것에 가까워집니다. 몸이 아파질 때 비로소 내 몸이 신의 거처임을 아는 이 아둔함이라니.-52쪽

사랑을 얻기 위해 왜 자신의 말을 부정해야 하며 왜 사람의 다리를 얻어야 하는가. 누구와 사랑해야 한다는 도덕은 얼마나 파렴치한 것인지. '누구와'가 아니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61쪽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절대적인' 무엇인가를 표방하는 것들에 관심없습니다. 나를 지속시키는 힘은 세계의 이면에서 조용히 열리고 닫히는 숨결의 아름다움이며, 그 숨결과 만나는 일이 '순간'임을 직시하는 일의 잔혹함이며, 순간의 진실이 사라지고 다른 순간이 태어나는 그 순간들의 틈새를 몽유하는 즐거움입니다. 모네는 나에게 순간의 풍경을 영원의 풍경으로 직조하는 자연의 색채로 보여줍니다. -69쪽

한 인간의 전생애를 통틀어 가장 빛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십대에 우리는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한 모험을 감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규율화된 사다리 타기에 능란한 소위 사회의 엘리뜨들이나, 사다리 타기에서 낙오된 소위 열패자들이 제도화된 사다리 타기의 과정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은 결국 약육강식의 현실이며 경쟁과 정복의 역사입니다.
우리 학교교육은 이기적이고 물질적이며 파편화된 인간을 양산하는 공장입니다. 단언컨대 나는 세상이 좀더 평화로워지기 위해선 대중매체와 학교부터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87쪽

적어도 십대를 경유하는 학교에서만이라도 다른 종류의 가르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장 비효율적이고 가장 비생산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지난 세기를 돌이켜볼 때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말은 우리의 영혼을 얼마나 도탄에 빠지게 하였는지!-을 가장 풍부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공간, 그리하여 한 인간의 영혼의 밑자리가 섬세하고 다양한 무늬들로 충만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 학교여야 합니다. -87쪽

우리 사회는 이상하게도 가장 자연스런 몇가지 사안에 대해 과민한 금기나 도덕적 포장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가 그러하고 성의 문제가 또한 그러합니다. '죽음'과 '죽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회피하려고 하는 반면 생을 욕망하는 방법들은 지나치게 차고 넘칩니다. 이 불균형은 교만과 방종을 낳는 동시에 보여지고 만져지고 획득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뒤틀린 편집증을 낳습니다. 모든 태어나는 것들은 동시에 아주 자연스럽게 죽어가고 있으며 이 죽음이야말로 새로운 탄생을 담지하는 순환의 아름다운 마디라는 것을 '자기'라는 세계밖에 볼 줄 모르도록 훈련받은 놀랍고도 이기적인 인간의 아이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 별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고리 속에서 인간이란 참으로 작은 하나의 마디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시간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88쪽

그러나 모든 인간이 결국은 직면하게 될 죽음을 가르치는 일에, 죽을 때 그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날지 이해시키는 일에, '지금' '여기에' '존재함'의 의미를 사유하게 하는 일에 우리는 한푼도 쓰지 않습니다. 나는 죽음의 의미와 죽음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충분히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한성의 자각으로부터 춤추는 하나의 별이 잉태되듯이. 우리의 무지와 오만을 깨닫고 자기 자신과 서로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사랑이 시작될 수 있기를. 더이상 이 별을 더럽히지 않고 평화롭게 살다가 평화롭게 죽을 수 있기를. -89쪽

이상을 향한 동경으로부터 예술은 태어난다고 하던가요. 삶의 배면을 흐르는 진실과 자유와 아름다움에의 추구. 모든 정직한 예술행위는 구도의 과정인 것입니다. 모순과 부조리함으로 가득 찬 삶이라는 난파선 위에서 한 예술가가 지난한 투쟁을 벌여갈 때, 그의 투쟁에 있어 유일하게 확고한 단초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창조행위 속에서의 비타협성뿐입니다.-96쪽

"위대한 작가의 작품들은 아직도 사람들에게 읽혀지지 않았다. 오직 위대한 작가들만이 이 작품들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이런 작품들을 대충 밤하늘의 별자리를 읽어내는 수준으로만 읽어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장부를 기입하고 장사에 속지 않기 위해 셈을 배우는 것처럼 글읽기를 배운다.(...)우리를 달콤하게 잠들게 하고 우리의 지적 능력을 잠재우는 독서가 아니라, 발돋움하고 서듯이, 우리가 가장 또렷하게 깨어 있는 시간을 바치는 독서만이 참다운 독서이다"라고 말이지요. 현대를 사는 대중들의 정서는 많은 부분 다양한 매체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미디어와의 접촉 빈도수가 대중의 기호를 만들어간다는 말은 팔할이 사실입니다. 이 다양한 매체들의 운동원리가 이윤의 창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때, 소위 예술이라는 이름을 사칭하는 문화상품의 생산과 소비 주체 사이에는 불가피하고 더러운 공모가 태생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셈입니다. 대중의 부박한 소비취향이 저급한 문화의 생산을 야기하며 그 역 역시 똑같이 작동합니다. -97쪽

이 '문득' 만져지는 지극한 세계. 이 세계로 나를 이끄는 힘은 세련된 영화기법과 사건 전개의 흥미진진함에 의존하는 영화로는 불가능한 무엇입니다. 오히려 의식적인 과장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수단을 포기함으로써 이르게 된 어떤 완전함의 세계이지요. 무언가 별나고 의미심장한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의도는 필연적으로 과장을 동반하고 요란스러워집니다. 이 '요란스러움'을 '무언가 말했다'로 착각할 때 영화는 천박해지고 '문득'의 세계는 소멸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모든 예술장르의 공통된 속성이 아닐까 싶어요. 일상의 속도 속에 편승되었을 때는 감지할 수 없는 영혼의 떨림, 이 미세한 꿈틀거림을 반(反)속도, 반(反)물질의 상태 속에서 섬세하게 진동합니다. 침묵이 아니고서는 말할 수 없는, 속도를 버리지 않고는 만질 수 없는 시간의 결들. -101쪽

나의, 우리의 내부에 현현하는 연옥의 묵시록. 그(베이컨)가 창조해낸 인물들은 추악한 괴물이었으며, 고깃덩어리였으며, 반인반수였으며, 그러므로 명백한 인간의 초상이었습니다. 찢기고 흘러내리고 발가벗겨진, 허위의 미의식이 거세된 제단 위에 그 물성을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차라리 자유로워진 슬픈 고깃덩어리..... 그의 화폭이 휘두르는 무언의 폭력 앞에 나는 기꺼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은, 진실을 향해 있다... -120쪽

사모하는 마음을 향해 있을 때 모든 마음은 열렬하고 귀한 것이라는 존재증명의 싱그러움.-129쪽

사랑은 움직이는 마음이니, 그 마음의 역동성을 일방적으로 막아두기만 해서야 소통이 가능해질 리가 없지요. 상대방의 욕망을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결국은 '서로'에게 마음이 기울어오도록 만드는 마법의 시간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릅니다.-130쪽

현실의 모순이 첨예할수록 꿈은 깊어집니다. 현실이 비관적일수록 꿈은 왕성해집니다. 이것이 몽환의 현재성이며 몽환의 물질성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합니다. 반역과 혁명은 삶의 원초적인 동인입니다. 억눌리고 빼앗긴 것에 대한 수동적인 반응으로서의 혁명이 아니라 삶 자체에 내재하는 힘, 지금과는 다른 더 나은 삶에 대한 꿈꾸기로서의 혁명. 그리하여 혁명이라는 몽환은, 세계에 대한 비관이 길어올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에너지의 파동을 나의, 우리의 몸 속으로 밀어넣습니다. 세계가 슬프면 슬플수록 더욱. -154쪽

객방에 큰대자로 누워 있었습니다. 밤은 깊고 들리는 것은 물소리뿐입니다. 전깃불을 켜놓으면 밖은 안 보이고 방안만 시끄럽게 훤해집니다. 불을 꺼버렸습니다. 안이 저물어야 비로소 윤곽을 드러내는 저 바깥. 어슴푸레한 계곡의 능선으로 들어가고 싶어집니다. -173쪽

영혼의 풍경이 되는 어떤 풍경은 숱한 날들 중의 어느 한순간 문득 만나지며 그 문득의 가능성은 개개의 인간이 갖는 영혼의 결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그것은 그냥 옵니다. 전신의 느낌으로 말이지요. 수차례 선운사를 들락거리던 내가 바람 많이 불던 어느 가을날 문득 사랑을 깨달은 것처럼 당신도 어느날 어느 곳에서 문득 당신의 풍경과 만나겠지요. -180쪽

그러나,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냉소의 이름이든 회한이나 야합이나 대중추수의 이름이든, 인간정신의 점진적 '죽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누군가는 말했다. 살아남으라고, 살아서 세계의 무의미와 싸워야 한다고. 그러나, 불행히도, 세계는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이 저질러온 너무나 많은 죄-의미들이 들끓고, 죽을 때까지 싸워도 무의미에 도달할 수 없을지 모른다. -210쪽

하이데거를 빌리면, 우리의 최초의 시는 '존재'이다. 물적 가치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서 언제부턴가 '시의 위기'니 '시의 죽음'이니 하는 말들이 우리 곁을 배회하고 있다. 시가, 시정신이 죽을 때, 존재의 시간도 사라진다. 어쩌면 빵만으로도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갈증이 해갈되지 못하는 정서적 기근, 영혼의 빈사상태에서 '인간의 시간'은 '사육장의 시간'과 어떻게 변별될 것인가.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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