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수필 범우 한국 문예 신서 1
김용준 지음 / 범우사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80년대 후반, 월북 작가들의 책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월북’ 또는 ‘납북’이라는 이유 하나로 출판도 읽기도 금지되었던 이들의 책은 정지용과 김기림을 시작으로 문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었다.  우리 집에도 그 당시 구입한 민음사에서 출판된 정지용 전집과 기민사에서 출판된 정지용 시집이 있다.  이제 책의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된 그 책들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도 않은 일상의 책이 되었다.  책장에서 꺼내보니 오히려 ‘3000원’이라는 책값과 깔끔하지 못한 활자들이 더 새롭게 다가와 웃음이 났다. 

오랜만에 월북 작가의 책을 접했다.  ‘월북’이라는 딱지가 이제는 책의 희귀성을 높일만한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문학적 가치를 논하는데 특별히 고려해야 할 기준이 되지도 못하지만 해방 전후의 사회상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이 겪었을 삶의 고단함과 예혼藝魂의 갈증에 안쓰러운 마음이 더해지는 건 사실이다.

김용준.  월북 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창설에 힘을 보탰고 광복 전후에 미술가이자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로도 활약했던 그는 글쓰기에도 남다른 재주를 지녀 그가 쓴 이 <근원수필>이란 책은 ‘한국 수필문학의 백미’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를 ‘평생 남의 흉내나 겨우 내다가 죽어버릴 인간’이라 여기고 ‘근원(近猿)’이라 호를 지었다는 글은 갑갑한 현실 속에서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예술적 욕망의 표현처럼 느껴져 책을 읽는 내내 예술과 삶을 향한 그의 암담한 번민이 풀지 못하는 엉킨 실타래를 앞에 둔 것처럼 안타깝고 애잔했다.

고졸하고 담박한 그의 글은 맑은 계곡 조용한 그늘 아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자기 자신과 주변의 인물들, 각별한 애정이 가는 늙은 감나무와 예술과 조선조의 화가들에 대한 관심을 예스럽고 격조있는 언어로 진솔하게 풀어낸 그의 글의 품위는 어쩐지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를 쓰신 최순우 님의 글들을 연상시킨다.  갑자기 최순우 님의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욕심이 생길 정도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요즘 출판되는 책들 중에 요란스럽고 시끄러운 책들이 참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술가와 세인과의 현격한 차이는 요컨대 예술가는 성격의 솔직한 표현이 그대로 행동되는 것이요 세인의 상정은 성격이 곧 행동될 수 없는 곳에 있다.  예술가가 예술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은 이 솔직한 성격의 고백이 가능하기 때문”(p.139)이라던 그는 “언제나 철책에 갇힌 동물처럼 답답하고 역증이 나서 내 자유의 고향이 그리워 고함을 쳐 보고 발버둥질 하다 보니 그것이 이따위 글"(p.175)이 되었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이 <근원수필>은 ‘답답하고 역증이 나는’ 그의 ‘솔직한 성격의 고백’이라서 이처럼 우리 수필문학의 백미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나 보다. 

“다방면의 책을 읽고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맛본 뒤에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글이고서야 수필다운 수필”(p.174)이라 한 그의 말은 글쓰기의 신중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나의 글이 미흡한 것은 아직 부족함이 많아서, 채워야할 것을 다 채우지 못해서 그런가 보다.  세밑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새해엔 나를 새롭게 채워갈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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