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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때문에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순전히 춥고 건조한 날씨 탓이었다. 가뜩이나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몸도 별로 좋지 않았다. 추운 거리에서 잠시 길을 멈추고 따끈한 어묵국물을 마실 때와 같은, 그런 기분 전환이 필요했던 것 같다. 부드럽고 폭신폭신하고 적당한 온기와 습기를 가진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제목, 뭔가 사연을 담은 듯한 표정의 세 여자가 앉아 있는 올리브빛깔의 표지, ‘감동적인 사랑’을 그린다는 작가에 대한 글들이 이 책이 나에게 따끈한 어묵 국물이 되어줄 거라는 암시처럼 보였다. 별로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내 굳은 마음을 풀어줄 약간의 최루성분을 원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카레가루에 물을 부어 개듯이 그렇게 약간의 최루성분을 첨가해서 내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풀어지기를 바랐던 것 같다. 이 책에 기대했던 최루 효과는? 없었다. 눈물에 야박한 내 성격 탓도 있지만 책을 다 읽고나니 최루성분이 약했던 게 오히려 더 산뜻하다.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뼈가 저리도록 후회되는 과거의 시간들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자신에게 형벌을 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빠르게 전개된다. 딸을 잃은 후에 편안한 삶을 거부하며 노숙자가 되어버린 마크와 막대한 재산의 상속녀이면서도 끊임없이 스캔들을 일으키며 자신을 바닥으로 몰아가는 엘리슨, 엄마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으로 뉴욕의 차가운 밤거리를 헤매며 증오를 키워가는 소녀 에비, 그리고 지난 날 자신이 받았던 고통 그대로를 돌려주었던 복수의 기억과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정신과 의사 커너. 이들이 운명처럼 엮이며 서로의 상처를 맞대고 치유해가는 과정이 영화장면이 바뀌는 듯한 구성으로 전개되어 몰입에 가속도를 더하게 한다.
마지막 반전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아!’하며 가슴을 쓸었다. 사건이 무슨 SF영화처럼 해결된 듯한 감이 없지 않지만, 마크가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딸 라일라가 눈앞에서 다시 사라져버리는 허무함이 너무 진했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상처, 누군가에 대한 증오,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억누를 길 없는 후회와 자책은 자기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고 담을 쌓음으로써 외로움의 그늘 아래 몸을 숨기게 만든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형벌이자 방어인 셈인데 마크, 엘리슨, 에비, 커너는 서로에게서 자기의 그런 모습을 발견하면서 애틋함을 느끼고 동병상련의 상처를 드러내보이게 된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나니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제목이 가슴에 턱하니 걸린다.
“용서받지 못할 일은 없어요. 다만 인생에서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일들이 있을 뿐이죠.”(p.266)
"고통도 전혀 쓸모없진 않아요. 우리에게 다른 길을 열어주니까요.“(p.266)
"힘들었지만 우린 살아남았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지난 기억을 송두리째 잊진 못하겠지. 고통이 우리들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린 살아남을 수 있어.“(p.241)
작가가 말하는 사랑은 우리 삶에 대한 사랑이 아닌가 싶다. 모든 상처, 분노, 증오, 후회를 넘어서, 아니 그 모든 것을 가지고도 끝까지 자기의 삶을 사랑하며 서로서로 상처를 맞대고 온기를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랑으로 인해 치유와 극복이 가능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삶을 가치 있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결말이 여운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것,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다소 TV 드라마처럼 억지스럽게 엮인다는 것, 에비와 엘리슨의 몸에 나타나는 문신이 병원 로고였다는 약간의 황당함 등이 아쉽긴 했지만 애초에 기대했던 추위 속에 마시는 어묵국물과 같은 따스함은 만족할 만큼 지니고 있는 책이었다. 가끔씩 기욤 뮈소의 책을 어묵국물처럼 찾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