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실의 검은 표범
아모스 오즈 지음, 허진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1917년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지지하는 영국의 밸푸어 선언이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치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의 수가 급증하자 영국은 아랍인들의 반발을 의식해서 유대인의 이주를 강력하게 억제하기 시작한다.  이에 유대인들은 비밀조직을 결성하며 반영국테러를 전개하기 시작하는데,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바로 그 즈음이다. 

‘열두 살 하고도 3개월’이라는 나이의 프로피는 친구 벤 허, 치타와 함께 FOD(Freedom Or Death)라는 비밀조직의 일원이다.  조직의 이름은 그럴싸하지만 소년다운 환상과 모험심을 밑천으로 삼아 그들 스스로 결성한 치기어린 조직이다.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고 없는 낮 시간동안 프로피는 영국군 부대를 폭파하거나 영국 버킹엄궁에 로켓을 날릴 계획을 짜며 시간을 보낸다.  저녁 일곱 시부터 영국군에 의한 야간 외출금지가 시작되는, 간혹 한밤중에 울리는 총성에 잠을 깨기도 하는, 비밀과 우울로 가득 차고 어둡고 무거운 안개가 사방을 뒤덮고 있는 듯한 분위기에서 프로피는 사랑, 우정, 인간애 등을 배우기보다 민족, 애국, 죽음, 증오, 분노, 경계 등을 먼저 익혀간다. 

그러나 적과 동지의 구분이 빛과 그림자처럼 분명하던 프로피에게 영국군 경사 던롭은 적과 동지의 경계를 넘어선 동질의 인간으로 다가온다. 그런 던롭 경사에게 호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프로피는 조직과 민족의 배신자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너의 죄는 말이야, 프로피. 네가 적을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 적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이야, 프로피, 비밀을 알려주는 것보다 더 나빠.  (중략)  적을 사랑하는 것은 최고의 배신이야.”(p.108) 라는 벤 허의 말은 국가적 이념의 대립과 개인간의 인간적 교류가 충돌할 때 과연 어느 것의 가치를 더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를 되묻게 만든다. 증오와 제거의 대상인 적과 인간적인 호의를 나누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며 혼란스러워 하는 프로피의 모습은 안타깝기만 하다.

책의 뒷부분에 실린 ‘옮긴이의 글’에서 아모스 오즈는 아랍 이웃들과 평화롭게 공존하자는 주장을 펴서 반역 혐의를 사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을 아모스 오즈의 자전 소설이라고 하나보다.) ‘화해 없는 평화‘를 주장한다는 그는 문학에서도 일관되게 ”옳은 것과 옳은 것이 부딪칠 때는 그 ’옳음‘보다 더 높은 가치가 이겨야 한다. 그 가치는 바로 생명 그 자체다.’라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작가 의식은 이 소설의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첨예한 대립과 충돌을 보이고 있는 아랍민족과 유대민족 중 어느 쪽이 더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옳음은 내가 어느 쪽에 서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고 따라서 개인적인 호의와 정서의 교류가 가능한 생명에 대한 존중이 이념이나 명분에 앞서는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또 책을 읽다가 디아스포라와 홀로코스트로 깊이 패인 상처를 가진 유대민족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점령하여 영토를 넓히며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이나 팔레스타인 대학살을 저지르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책 속에 나오는 프로피의 엄마가 들려주는 ‘파란 덧문’이야기(p.98)가 가슴을 울렸다.  개울이 둥근지 시험해 보려고 던진 파란 덧문. 그러나 그 파란 덧문의 ‘순화의 신호’를 확인하고 알아차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유대인들이 아랍인들을 공격하고 ‘길고 긴 박해 끝에 자신들의 유산을 찾아 돌아온 유대인들 대신 그들(아랍민족)이 박해받는 자’(p.135)가 될 것이라고 알아챈 던롭 경사만이 그 파란 덧문의 순환의 신호를 알아차렸던 것은 아닐까. 유대민족이 당했던 박해가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다시 되풀이되듯, 유대민족의 시오니즘이 이제 팔레스타인 민족의 또 다른 시오니즘으로 변형되어 어떤 모습으로 순환할지는 모를 일이다.

일어난 일의 반대는 ‘일어나지 않은 일’(p.226)이기도 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p.226)이기도 하며 또 '거짓말과 두려움이 아니었다면 일어났을 지도 모르는 일‘(p.226)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지 후회와 반성, 기대와 두려움의 향기를 풍긴다.  프로피가 연정을 품었던 벤 허의 누나 야르데나의 말처럼 지하조직을 결성하는 것보다는 엿보는 게 낫고, 엿보는 것보다는 부탁하는 법을 배우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엎드려서 빌거나 힘으로 밀어붙이거나 속이‘(p.199)는 방법을 쓰기 전에 ’제대로 부탁하는 법‘을 배워서 사용할 수 있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좋게 변하지 않았을까.  ’거짓말과 두려움이 아니었다면 일어났을 지도 모르는’ 아쉬운 일이 ‘앞으로 일어날 일‘이 되게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지금까지는 ’일어나지 않은 일‘’일어난 일‘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를테면 세계평화와 기아문제 해결, 모든 인간의 인권보장과 같은 것들..  작게는 두려움 때문에 시도해보지 못했던 내 인생의 작은 모험 같은 것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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