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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웨어 ㅣ 판타 빌리지
닐 게이먼 지음, 나중길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좀 슬프긴 하지만 난 모험을 즐기기엔 너무 닳아버렸나 보다. 언제부턴가 환타지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갔다. 영화에서도 그렇고 소설에서도 그랬다. 동화 같으면서도 깊은 맛을 풍기는 미하엘 엔데의 책들을 좋아하고 해리포터를 읽으며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긴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모험과 사필귀정식의 이야기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부분이 더 커져갔다.
오랜만에 새로운 환타지 소설을 읽었다. ‘닐 게이먼’이라는 작가의 이름도 처음 들어봤다. 환타지 소설에 무심했던 탓이다. 책이 제법 두껍긴 했지만 아무 부담 없이 즐겁게 읽어주면 되겠다는 생각에 조금 설레기도 했다.
그런데 해리포터나 미하엘 엔데의 책들과는 조금 다른 부분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환타지는 그 대상이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라고 그동안 나도 모르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계기도 되었다. 이 소설은 어른을 위한 환타지다. 물론 청소년들이 봐서는 안 될 이유는 없다. 굳이 19금딱지를 붙일 만큼 야한 부분도 없다. (잔인하고 징그러운 부분은 있지만..) 내 말은 환타지 장르의 소설 안에 인생에 대한 문제라든가, 현대사회에서의 개인의 정체성 문제 등 기존 환타지 소설에서는 잘 느낄 수 없는 작가 나름의 견해가 녹아 있었다는 얘기다. 게다가 주인공도 어엿한 성인이다.
리처드는 제시카라는 아름다운 약혼녀가 있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난히 복잡하게 얽히고 꼬이며 모든 일이 뒤죽박죽이던 날에 길에서 부상을 입고 쓰러진 도어라는 소녀를 도와주게 되면서 리처드의 모험이 시작된다. 그저 평범하고 소심하게 살아가던 리처드가 런던의 지하세계에서 ‘살아남기’를 위해 변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현대문명사회에 길들여진 소심한 자아를 벗고 적극적으로 삶의 순간들을 선택하고 문제에 맞서 해결해 나가는 강인한 자아를 획득한다. 어둡고 온갖 오물과 악취로 가득 찬 런던 지하세계는 리처드에게 일종의 통과의례의 장인 셈이다.
시련과 모험이 종결되고 리처드가 지하세계의 수도원에서 의식을 회복했을 때 느꼈던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유로운 느낌’(p.492)은 그가 ‘문’을 열고 다른 세계로 넘어 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지상의 세계로 돌아와 이전보다 더욱 성공적인 삶을 누리게 되었음에도 만족할 수 없었던 것도 이미 그의 자아가 가식적인 현대문명사회의 질서로는 채워질 수 없는 가치들을 지하세계의 모험을 통해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도어’라는 여주인공이 가진 특별한 능력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은 현대사회의 우리들이 갖고 있는 벽, 관계단절과 소통의 부재를 떠올리게 만든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서 닿을 수 있는 문도 하나 갖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리처드가 스스로 지하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 벽 너머로 사라지는 것도 서로에게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마음과 마음이 맞닿는, 자기 자신을 새로 발견하고 시험해 보며 자기 확장이 가능한 문 열린 세상이 바로 그 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리처드가 벽을 두드리며 “여보세요! 혹시 그 안에 누구 없어요? 제 목소리 들려요?”(p.542)하는 외침은 단절의 벽에 갇힌 채 외쳐대는 우리의 목소리인 것만 같았다.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악당 크루프와 벤더마, 모험을 함께 했던 우직한 카라바스 후작과 매력적인 여전사 헌터, 그리고 쥐나라 말을 하는 부족과 벨벳족, 서펀타인, 올드베일리, 얼스코트 열차의 백작, 이슬링턴 천사 등 독특한 인물들과 지하세계에 대한 묘사는 책의 재미를 더한다. 미하엘 엔데의 책이나 해리포터처럼 아기자기하고 순수한 맛은 덜하지만 현실의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환타지라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