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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수업
노엘 샤틀레 지음, 정미애 옮김 / 솔출판사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고 있던 어느 날 식탁에서 아들 녀석이 내게 물었다.
“엄마, 만약 누가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면 뭘 빌 거야?”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내 손으로 밥 해 먹고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거.”
“?”
6학년짜리 아들에게는 엄마의 대답이 뜬금없게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내내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이상적이고 완벽한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아름답게 떠받치는 아흔 두 살 노모의 삶이 내가 망설임 없이 건강하고 편안한 죽음을 소원하게 만들었다.
이상적이고 완벽한 죽음이란 어떤 모습일까. 몇몇 죽음이 떠올랐다. 서서히 곡기를 끊음으로써 죽음을 맞이하고 떠들썩한 장례절차를 거부했던 스코트 니어링과 고통 없이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하길 바랐다던 헬렌 니어링의 교통사,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안타까운 장면으로 다가왔던 체 게바라의 죽음, 얼마 전에 읽었던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란 책에서 읽었던 죽음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가깝게는 올 여름에 작고하신 시할머님과 작년에 세상을 떠난 시동생까지..
아흔 두 살의 노모가 죽음을 예고한다.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어머니 앞에서 쉰아홉 살의 딸은 고통과 두려움, 어이없음을 맛보면서도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 책에서 엄마는 본질적인 기발함(p.36)을 가진 자유로운 여자(p.73)였으며 해방과 레지스탕스의 이미지(p.77)를 가진 부드러우면서도 짓궂은(p.107) 운명론자(p.70)로 묘사된다. 자신의 죽음과 함께 딸이 떠안을 애도의 강도를 조절하고 훈련시킬 줄 아는 어머니, 딸에게 열렬한 숭배와 사랑을 받는, 이 책 속의 아흔두 살의 어머니는 내가 질투심을 느낄 정도로 완벽한 모습이다.
정말 이런 어머니와 딸의 관계가 가능한 걸까? 가능하다고 해도 그건 아주 극소수의 모녀들만이 누릴 수 있는 관계가 아닐까?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수지 모건스턴, 알리야 모건스턴 지음/최윤정 옮김/웅진주니어)라는 책의 작가서문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엄마들은 엄마라는 이름의 일을 지치지도 않고 계속하고 있다. 말하자면, 들볶고 조바심치고 불안해하고 기를 꺾어놓고 기운을 돋우어주고 잔소리하고 상처 입히고 부려먹고 가슴 뿌듯해 하고 실망하고 기대하고, 한 마디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식으로든 저런 식으로든 엄마와 딸이라는 한 쌍을 이루는 각각의 짝들은 그럭저럭 살아남는다. (중략)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 엄마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사랑이란 그렇게 효과적이지가 못하다. 늘 그런 식이다. 엄마들도 딸들도,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난 이 글을 읽고 얼마나 깊이 공감했었던가. 수지 모건스턴의 글대로 엄마와 딸의 관계는 이를테면 애증의 관계다. 미워하면서도 사랑이 사라지지 않는 관계. 그래서 더욱 결속이 단단하고 찐득찐득해서 도무지 지워버리거나 끊어버릴 수 없는 관계인 것 아닐까. 그런데 어머니에 대한 100% 순수한 숭배와 사랑이라니!!! 죽는 순간까지 딸에게(그것도 쉰아홉 살이나 먹은 딸에게) 자연스럽고, 가볍고, 정당하고, 심지어 완벽한(p.156)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어머니의 완전무결함이 이 책을 말할 수 없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어머니의 자살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때 휘청거리는 엄마를 보고 말았어요. 죽음이 이미 엄마에게 동지로, 친구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어요. 우리를 제쳐놓고 말이에요. 나는 엄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이마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있는데, 죽음이란 놈이 나보다 엄마를 더 잘 알고, 가까이서 보살피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요, 엄마를 더 다정하게 다독거려주고 있었어요."(p.11)
이 구절은 오래 전 우리 큰딸과의 대화를 떠올리게 했다. 딸은 그 때 자살에 대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엄마, 왜 죽는 거야? 죽는 것보다 사는 게 훨씬 쉽잖아. 죽을 용기 갖고 살면 될 텐데.”
아마 딸은 그 때 벌써 자살은 어리석은 행동이며 잘못된 판단에서 오는 죄악이라는 가치판단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글쎄.. 엄마는 지금까지 살면서 나이가 먹을수록 삶이 점점 무거워진다는 생각이 들거든. 엄마는 특별히 고생한 적도 없이 무난하게 잘 살아온 편인데도 그런 느낌이 들어. 그래서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살다가 삶이 점점 무거워지고 더 무거워져서 삶의 무게가 죽음의 무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 오면 그 땐 미련 없이 죽음을 선택해서 훌쩍 떠날 수도 있겠다는. 그래서 이다음에 엄마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죽음이 가까이 오면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 선뜻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자살한 그 사람도 나이에 상관없이 삶이 너무너무 무겁게 느껴졌던 거겠지. 그 사람이 자살한 걸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야. 아무도 그 사람의 고통을 모를 테니까. 그 사람이 그렇게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도록 모른 척하고 방치한 사람들의 잘못이 더 크지 않을까.” 라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이 늙은 어머니의 다정한 친구로 다가왔다는 글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리고 완벽한 죽음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행동이 “삶을 너무 사랑하기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p.117) 것이고 그래서 ”때때로 죽음은 삶에 바치는 예찬“(p.117)이란 글에도 공감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쉰아홉의 딸이 쓴 글이라고 여기기엔 감정의 여린 선을 건드리는 지나치게 섬세한 문체(물론 번역작가의 의도에 의해 그렇게 되었을 여지가 크지만), 에둘러 말하는 듯한 글에서 느껴지는 답답함, 되풀이 되는 듯한 딸의 감정노출은 책으로의 몰입을 방해했다. 이상적인 삶과 죽음을 맞이하자면 치매에 걸리거나 중풍으로 쓰러지는 일없이, 아이들 앞에서 꽥꽥 소리 지르며 화를 내거나 지겨운 잔소리조차 늘어놓는 일없이 아들딸들의 우아한 우상이 되어 숭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불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적인 죽음과 삶을 동시에 꿈꾸게 하고 지금의 내 삶을 더욱 빛내라고 재촉하는, 그리하여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더욱 아름답게 하라는 이 책의 목소리가 내 가슴 위로 내려앉는 그 느낌 또한 지우기 어렵다. 죽음이 삶을 아름답게 하고 삶이 죽음을 아름답게 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