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팔레스타인 난민인 영화감독 미셸 클레이피는 “노스탤지어는 우리에게 하나의 무기다”라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이때의 ‘노스탤지어’는 회고 취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권력자나 강자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말라’는 틀에 박힌 말로 자신의 정당하지 않은 행위를 감추고, 부당한 권익을 기정사실화하려 한다.  ‘노스탤지어’란 그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정신을 가리킨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쓴 동기이기도 하다.  (p.5)

이 책에 담긴 49명의 사람들 중에는 낯선 인물들이 꽤 많았다.  특히 일본의 군국주의에 저항했던 일본인들의 이름과 삶은 오직 식민시대의 가해자로만 여겼던 내게 무척 의외의 것이기도 했다. 군사 쿠데타로 살해된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은 알고 있었지만 정치범 수용소로 변해버린 칠레 스타디움에서 저항의 노래를 부르다 끔찍하게 살해된 빅토르 하라는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 인물들 중에서도 김구, 안중근, 윤동주, 홍범도, 김지하, 박노해, 윤이상 등등은 낯이 익었지만 B,C급 전범으로서 사형을 당했던 조선인 전범 조문상이나 박정희의 독재와 맞선 어머니 오기순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이렇게 이 책에는 강자, 권력자, 정복자들이 그려놓은 역사의 물줄기에서 함께 흐르기를 거부하고 가라앉아 버린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담겨있었다. 

낯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49인의 생애가 대여섯 페이지의 짧은 분량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읽다가 갑자기 삶이 왜 이리 서러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념과 체제, 전쟁과 폭력의 횡포 속에 내동댕이쳐진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지켜내려 했던 정신의 영롱함과  이상의 견고함이 슬프고도 서러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 책에 ‘묘비명’처럼 기록된 사람들의 핏빛 선명한 삶과 죽음이 과거의 틀 속에 고립된 채 현재로 흘러들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지불하고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더 꼬여만 가는 듯한 세계, 드러난 상처들의 치유방법을 여전히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듯한 오늘날의 모습이 이 책에 담긴 49인의 생애 앞에 부끄럽고 민망하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49인.  그러나 그들은 이미 사라지거나 사라지지 않을 의지마저 박탈당한 죽은 자들이다.  그들이 사라지고 사라지지 않고는 그들이 아니라 남겨진 우리들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은 어쩐지 섬뜩하다.  역사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인물들 중에는 저자의 말마따나 남겨진 기록이 전무한 말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고,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계속 가라앉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자각하는 것은 분명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해도 퇴적은 언젠가 강물의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는 희망을 믿고 싶다.  저자가 말한 무기로서의 노스탤지어는 그 때를 앞당길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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